얼마 전 아이치 트리엔날레에서 평화의 소녀상 작품 철거로 논란이 일었어요. 우익의 여론에 의해 피해를 받은 이 작품은 권력을 통한 예술의 검열이라는 화두를 던졌어요.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가 10월 14일 총 75일간의 전시를 마치고 폐막했다. 한국 언론에서는 8월 초 ‘평화의 소녀상’ 전시에 대한 일본 우익의 비판과 협박을 대서특필했다. 전시 개시 3일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시 중지라는 조처가 취해졌다. 경색된 한·일 관계라는 맥락에서 ‘우경화하는 일본사회’라는 프레임으로 이를 해석하는 기사가 주류를 이뤘다.

9월 이후, 전시 중단에 대한 관심은 한국에서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경우, 예술계를 제외하고는 실제 아이치 트리엔날레라는 행사, ‘평화의 소녀상’이 전시된 배경이나 맥락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일본의 경우, 예술계와 시민들의 적극적인 전시 재개 운동(크라우드 펀딩 및 관련 전시 기획 등)이 시선을 끌었다.

그 결과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에 대해 입장객 추첨 등, 제한 조처가 취해지긴 했지만 10월 8일 전체 전시가 모두 재개되는 성과를 거두고 10월 14일 트리엔날레가 종료됐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양국에서 그다지 평가받지 못했다.

예술의 영역에서 한·일의 대결은 과연 정확한 것일까? 이런 국가 간 대결 구도만으로는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 사태와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의 문제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상에서의 우익 선동과 이에 편승한 일본 보수 정치가들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다. 그러나 사건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한·일 양국의 대립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일본의 정치적 프로세스가 존재한다.


일본 보수여론과 혐한은 같은 집단 아니다

 

:쓰다 다이스케 예술감독은 8월 15일 트위터에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단에 대해 사과글을 남겼다. 그는 “이런 상황 자체가 검열”이라고 비판했다. / 사진:쓰다 트위터 캡쳐

 

한국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지가 가장 중요한 이슈로 부각이 될 즈음, 일본에서는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에 포함된 두 전시물이 관심사도 떠올랐다. 우리가 알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과 ‘원근을 안고 II(천황 사진을 불태우는 영상)’가 그 주인공.

 

일본의 인터넷과 SNS를 중심으로는 두 작품 모두 반일작품으로, 한국인 작가가 작품을 제작해 전시한 것처럼 유포됐다. 이는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일본인 작가가 제작한 작품으로 일본인으로서의 자아를 추적하기 위한 시도로서 계획된 것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온라인상에서 우익 네티즌을 중심으로 한 일본 보수정치가들이 ‘평화의 소녀상’이 한국의 일본대사관 앞뿐만 아니라 전국에 세워졌다는 점을 이슈화했다. 그 당시 경색된 한·일 관계의 맥락에서 예술이 아닌 한국의 프로파간다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실제 아이치 트리엔날레 현장에서는 히로히토 천황의 사진을 불태우는 모습이 들어 있는 ‘원근을 안고 II’에 더 많은 비판이 쏠렸다. 즉, 인터넷과 SNS 등 온라인상의 비판과 실제 일본 시민들의 비판이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 밝혀진 셈이다.

쓰다 다이스케 예술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온라인에서는 혐한적인 맥락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문제 삼는 이들이 ‘원근을 안고 II’을 같은 맥락으로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현장으로 걸려오는 항의 전화나 팩스, 이메일 등에서는 오히려 소녀상보다는 ‘천황의 사진을 불태우는 행위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상처 입었다’는 격한 반응이 많았다는 점이 확인된다.

일본 일반 여론은 ‘원근을 안고 II’에 더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일본 보수정치가들은 ‘평화의 소녀상’에 보다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평화의 소녀상’이 현실의 한·일 관계, 특히 정치외교 이슈와 밀접하게 연결된 까닭일 것이다.

한국에 대한 일본사회의 여론은 상당히 악화된 상태다. 사회적 흐름을 고려해볼 때 현실 정치인들은 한·일 역사 인식과 갈등의 상징물인 ‘평화의 소녀상’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게 자신의 선명성을 드러내는 데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반면, 일본의 국민 여론은 일본 작가의 작품이지만 천황을 모욕했다는 점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결론적으로 이번 전시 중단 사태를 통해 일본의 보수적인 여론의 흐름과 혐한여론이 반드시 일치하거나 동일한 집단을 이루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이런 차이를 인식하기가 쉽지는 않다.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 전시 중지와 이후 전시 재개를 둘러싼 움직임에서 한국인들이 자칫 간과하기 쉬운 면이 있다. 이 사태를 둘러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명백한 입장 차이가 그것이다. 한국에서는 전시가 ‘일본 정부의 압력’으로 중단됐다는 식의 평면적인 분석과 인식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아베 내각을 필두로 한 중앙정부와 지방 정부는 전시 중단 및 전시 폐막 시점까지 지속적인 갈등 상태에 있었다.


日 지방자치단체는 중앙정부 꼭두각시 아니다

 

우선 8월 3일 취해진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의 전시 중단은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총책임자인 쓰다 다이스케와 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의 합의로 이뤄졌다. 단순히 중앙정부의 압력에 굴복해서 지방정부가 이를 따른 것으로 해석하는 건 무리라는 것이다.

물론 전시가 이미 진행 중인 상황에서 전시 중지라는 조처를 내린 것은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시에 대해 항의가 폭주해서 업무가 마비됐다. 또 7월 중순 교토에서는 애니메이션 센터 방화 테러 사건으로 4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시와 관련해서도 그와 유사한 방식의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 위협과 제보가 접수된 상태이기도 했다. 인명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도 전시를 중지할 필요성이 제기됐을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터넷과 SNS를 통해 전시에 대한 비판여론이 비등하고, 유력 정치인뿐 아니라 심지어 문부과학성까지 내용을 문제 삼아 행사 지원 거부를 시사한 상황까지 겹쳤다.

이런 환경에서도 오무라 지사는 중앙정부의 전시 중단 압력에 대해 ‘권력을 통한 예술의 검열’이라고 정면 반박하고 위헌 가능성을 제기했다. 중앙정부에 맞서는 지방정부의 독자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7월 들어 일본이 전략물자 수출 규제에 나서자 한국에선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들도 평소 진행하던 한·일 문화교류 사업을 일방적으로 중지하거나 무기한 연기했었다. 심지어 몇몇 지방자치단체는 공식적으로 ‘NO JAPAN’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려다 시민의 항의로 무산됐었다.

이와 비교하면 오무라 아이치현 지사의 대응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한국과 일본 정부 차원에서 빚어지는 마찰과 갈등이 지방자치 영역으로까지 번지는 게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오무라 지사는 외부의 전시 중단 압력에 결연히 반대하는 입장을 계속 견지했고 결국 문부과학성은 아이치 트리엔날레 폐막 이후 지원 불가 방침을 최종 결정했다. 이에 오무라 지사는 법적 소송을 제기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정부의 일방적 결정에 일본의 지방정부가 순순히 추종하기보다 독자적 판단과 행보를 한다는 사실은 한국의 지자체에게도 적지 않은 착안점을 준다고 하겠다.

역사 문제로 한·일 관계가 경색되면서 일본을 찾는 한국 관광객 감소로 일본 지방 경기가 침체됐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한·일 간 지방 소도시를 연결하던 비행 편이 대폭 감축되면서 한국의 지방공항도 막대한 적자를 보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관계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복잡하고 밀접하다. 앞으로 있을 한·일 문화교류를 감안하더라도 이런 점을 보다 심도있게 고려해야 한다.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 전시 중단 사태 이후 한국에서는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시각이 확산됐다. 또 ‘표현의 자유’라는 인간의 기본 인권에 대한 일본인들의 무감각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특히 주류사회를 겨냥하는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예술작품인 ‘평화의 소녀상’과 ‘원근을 안고 II’에서 보여지듯 근현대 일본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작품들은 일본 내에서 늘 논란의 대상이 됐다. 문부과학성의 지원금 취소나 “일본 국민의 마음을 짓밟았다”는 나고야 시장의 발언 등 보수정치가들의 비판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간다.


정치와 예술의 관계를 묻다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는 바로 이런 문제를 예술을 통해 성찰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쓰다 다이스케 예술감독은 원래 미디어 평론가이지 예술가는 아니다. 다만 그는 2010년대 이후 강화되는 정치와 주류사회의 검열적인 움직임, 즉 ‘문제적 작품’에 대한 정부의 지원금 삭감이나 취소, NHK의 프로그램에 대한 압력 등에 주목했다. 그래서 예술과 정치 관계의 비평적 검토를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의 테마로 삼았다. 2015년 이미 도쿄에서 개최돼 화제를 모았던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가 이 트리엔날레에 참가하게 된 것도 이런 주제의식의 산물이다.

쓰다 다이스케 예술감독은 “‘평화의 소녀상’은 명백히 프로파간다이자 예술”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는 우익 네티즌의 주장처럼 이것이 프로파간다이기 때문에 예술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정치와 예술이 분리될 수 없는 이상, ‘평화의 소녀상’은 정치적 의미를 지닌 예술인 것이다.

 

특히 ‘평화의 소녀상’은 한·일 양국에서 공히 정치적 의미를 배제해서는 존재할 수 없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쓰다 감독은 “오히려 ‘평화의 소녀상’을 원래 놓였던 장소(한국의 일본대사관 앞 등)에서 분리해 전시회장에 배치함으로써 정치적 의미와는 다른, 작품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를 일본 관객들에게 직접 경험하도록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립과 갈등이라는 작품이 지닌 정치적 의미를 넘어 어떤 감동, 그리고 어떤 감정의 힘을 들여다보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는 한국의 예술가들, 나아가 세계의 예술가들이 처한 상황과도 오버랩된다. 한국의 경우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또 민주화 이후의 시기에도 정치적 성향에 따라 불이익을 받는 간접적 검열에서 자유로운 정권은 없었다는 점과도 겹친다.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는 일본 주류사회의 압력에 의해 전시가 중지되거나 철회된 작품을 모아놓은 기록으로서도 의미를 갖는다.

한국에서 ‘표현의 부자유전’과 같은 기획을 하게 된다면 어떤 작품이 포함될 것인가? 그리고 이런 기획을 중앙정부 혹은 지방자치단체와 같은 공적 기관 행사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관용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의 예술계 또한 일본의 예술계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는 한국과 일본의 예술계가 이런 압력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함께 힘을 모야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같은 맥락에서 10월 8일 전시가 재개된 사실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일본 당국이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 관람객 수를 제한하고 다양한 안전 조처를 한 것과 관련해 한국에서는 관람의 자유를 제약했다는 식의 비판이 많았다. 하지만 한번 전시가 중지된 작품전이 다시 열려 폐막 시점까지 갔다는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가 없다.

 

게다가 일본 정부 조치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전시를 보이콧했던 모든 작품(한국 작가의 작품 포함)이 다시 온전한 형태로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에 참여한 것도 인상적이다. 이는 2019년 현재, 일본의 주류사회와 예술적 표현이 어디까지 협상하고 절충 가능한가를 보여준 중요한 사례라 할 것이다.


김효진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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