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국보 센터라고 하면 은퇴한 서장훈 선수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하지만 서장훈 선수조차 해내지 못했던, 올림픽 농구 은메달을 따낸 국보 센터가 있어요. 바로 박찬숙 WKBL 유소녀 농구 육성본부장이에요.
여자농구는 대한민국 구기(球技) 사상 올림픽에서 첫 은메달을 딴 종목이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한국은 캐나다·유고·호주·중국을 연파하고 4승 1패의 성적으로 당당히 2위에 올랐다. 그 중심에 센터 박찬숙이 있었다. 190㎝의 큰 키에 빠른 발과 민첩한 동작, 정확한 슈팅은 월드 클래스 급이었다. 박찬숙은 1975년 서울 숭의여고 1학년 때 최연소 국가대표에 뽑혀 출전한 세계선수권대회(콜롬비아)에서 기자들이 선정한 ‘미스 월드 바스켓’에 선정될 정도로 미모도 돋보였다.
1980년대 여자농구 전성기를 이끈 박찬숙은 사업가 서재석 씨와 결혼해 딸과 아들을 낳았고, 여성 최초 농구 국가대표 감독, 대한체육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체육계에 굵직한 선을 그었다.
그러나 선이 굵은 만큼 생채기도 컸다. 2009년 남편이 직장암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남매를 키우기 위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지인의 권유로 시작한 사업이 실패했고 자신이 모든 빚을 떠안게 됐다. 그는 법원에 파산·면책 신청을 했으나 ‘숨겨둔 소득이 있었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항고 끝에 2016년 12월 면책 선고를 받았다.
그의 현재 직함은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유소녀 농구 육성본부장이다. 여자농구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WKBL에서 ‘레전드’를 모셔왔다. 최근에는 한 종편 프로그램에 박찬숙 가족의 알콩달콩한 일상이 소개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딸 서효명 씨는 배우·리포터로 활동하는 엔터테이너고, 아들 서수원 씨는 엄마와 같은 190㎝의 키에 이국적인 외모가 돋보이는 모델이다.
박찬숙 본부장과의 인터뷰는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있는 WKBL빌딩 유소녀육성본부장실에서 진행됐다. 그는 여전히 큼직큼직하고 시원시원했다.
극단적 선택 직전 아이들 떠올리며 정신 차려
요즘 일과는 어떤지요?
“평소에는 여기로 출근하고요. 지금 여자프로농구 시즌 중이니까 경기가 있으면 현장에도 가죠. 박찬숙농구교실은 후배들과 동생(박찬미, 농구 국가대표 출신)에게 맡겼어요. 유소녀 꿈나무 행사에 꼭 나가서 시상하고 격려하는 게 제 일이죠. 요즘은 자녀를 한두 명밖에 안 낳으니까 이기적이 되기 쉬운데 단체운동을 하면 배려·양보·협조 같은 걸 저절로 익히게 됩니다. 아이들을 만나면 ‘선생님은 보통 분이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궁금해서 부모님께 여쭤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더 가까워지게 되죠.”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아프고 힘든 세월을 보내셨죠.
“남편 보낸 지 10년이 됐네요. 아이들 기죽지 않게 키우려고 노력하고 앞만 보고 살았는데 세상일이 뜻대로만 되겠어요? 운동한 사람 단순하잖아요. 다 내 마음 같으려니 하고 착한 마음으로 협조하다 보니 당하는 건 나 혼자였고, 모든 책임이 나한테 다 돌아왔어요. 상상도 못 한 일들을 겪었죠. 의지할 남편도 없고 아무한테나 가서 아쉬운 소리 하려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냥 숨 쉬고 싶지가 않았어요. 전에는 사람이 죽는다는 생각을 왜 그렇게 쉽게 하나 했는데, 당하고 보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어떻게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나요?
“우리 아이들 덕분이지요. 극단적인 생각을 하다가도 아이들을 떠올리면서 ‘아니야.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라며 정신을 차렸어요. 일단 부딪쳐 보자, 조언도 받자 하면서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니 풀려나가더라고요. 제가 정말 나쁜 맘먹고 속된 말로 잔대가리 굴렸으면 해결 안 됐을 겁니다. 곧이곧대로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결과가 좋아졌어요. 내가 법을 어떻게 알아요. 오죽하면 재판정에서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판사님?”하고 물었을까요. 판사님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이렇게 이렇게 하라구요’라고 얘기하면 ‘네. 감사합니다’ 하고 시킨 대로 했죠.”
이젠 모든 게 해결됐나요?
“그러니까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고 방송에도 나오고 하지 않겠어요. 결국 돈 문제인데, 만져 보지도 써 보지도 못한 거라 얼마나 당황스럽고 억울하겠어요. 모든 게 정리가 되고, 법적으로 면책도 받았으니까 당당하게 일할 수 있죠. 한 길로 열심히 살다 보니 나에게도 이런 일이 있구나 하고 많이 깨우쳤습니다. 내 옆에 좋은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도 복입니다. 어떡하면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걱정하고 마음 써주시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고 놀랐어요. 나이 육십에 새로운 인생을 사는구나 싶어요.”
따님이 방송에서 ‘엄마가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강한 척한 것일 뿐이었다’고 하던데요.
“아이들이 잘못할 때는 강하게 카리스마 있게 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엄마죠. 자식한테는 약하잖아요. 아빠 자리까지 채워야 하니까 약한 모습 안 보이려고 했고, 그게 부담이 컸죠. 혹시라도 아빠의 빈자리로 인해 아이들이 잘못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굉장히 바쁘게 살았어요. 아이들이 만족했는지 모르지만 그 이상 해주려고 노력 많이 했습니다.”
박 본부장은 자녀들을 운동선수로 키우지 않았다. 그는 ‘안 시킨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운동에 잠재력은 있어요. 딸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너 공부 안 할 거면 농구해’ 했더니 싹싹 빌면서 ‘공부할게요. 농구 안 할 겁니다’ 하는 거예요. 아주 어릴 때지만 엄마가 힘들게 뛰는 걸 봤거든요. 다쳐서 얼굴에서 피 나는 것도 보고. 나는 내 아이에게 절대 운동은 안 시킬 거라는 신념 같은 게 있었어요. 운동을 해서 성공하는 길은 너무너무 힘들고, 한마디로 피눈물을 흘려야 해요. 내가 그 고통을 아는데 그걸 아이한테 권할 수는 없었어요”라고 박 본부장은 회고했다.
그런데 아드님은 축구 선수를 했잖습니까?
“그러게요. 아들이 초등학교 졸업하면서 축구를 하겠다는 겁니다. 자기는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고 활동적이고 뛰는 걸 좋아한다면서요. 그러면 농구 어떠냐 했더니 농구보다 축구가 더 재미있다는 겁니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자식 이기는 엄마 있습니까. ‘절대 중간에 그만두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인맥을 총동원해서 좋은 팀을 찾아줬죠. 주말에 외출 나왔다가 다시 합숙소로 들어가는 애를 내려주고 차를 돌릴 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아, 내가 운동할 때 우리 엄마 아버지 마음이 이랬겠구나’ 절감했죠.”
그런데 아들이 중간에 축구를 그만뒀습니다.
“고2 때 지방의 축구센터에서 운동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숙소를 이탈했어요. ‘합숙훈련이 너무 힘들다. 난 묶여서 지내는 게 싫다’면서요. 때릴 순 없고 물건 집어 던지고 난리를 피웠죠. 그러면서도 ‘남자가 한번 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대학 들어갈 때까지만 하면 안 되겠니’ 하고 어르고 달래고 했어요. 그래도 자기는 모델을 너무너무 하고 싶다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학교도 옮기고 모델 아카데미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활동을 시작했죠. 끼가 있어서 그런지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아요. 딸은 방송인으로서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제 앞가림은 하고 있으니 이젠 아빠의 몫까지 했구나 싶어요.”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로 농구 시작
‘불세출의 농구 스타’ 박찬숙의 출발은 미미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농구공을 잡았다. 농구를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 농구공이 그렇게 큰 줄도 몰랐단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아이를 농구부 담당 체육 교사가 그냥 둘 리가 없었다. 공부를 꽤 잘했고 학급 반장도 하고 있던 터라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도 ‘그래 찬숙아, 농구보다는 우리 공부하자’고 만류했다. 결국 체육 교사는 부모님을 설득했고, 박찬숙의 농구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박찬숙은 당시 ‘이렇게 큰 공을 저 하늘에 있는 조그만 링에 어떻게 집어넣지?’ 하고 걱정했다고 한다.
본인이 운동신경이 있다는 걸 느꼈나요?
“키는 크지만 운동을 늦게 시작했으니 작은 아이들과 손발을 빨리 맞춰야 했어요. 단체운동한 뒤에 코치님이 따로 불러 개인연습을 시키시는데 그게 너무 싫었어요. 그런데 하나를 시키면 둘, 셋을 하는 거예요. 키만 큰 게 아니라 뛰기도 잘하고 점프도 잘하는 겁니다. 코치님이 신이 나서 ‘찬숙아 잘했어. 이번엔 요만큼만 더 뛰어봐’ 하시는데 그걸 내가 하는 겁니다. 집에 가서 ‘엄마, 신기해. 난 운동 못 하는 줄 알았는데 느는 게 보이니까 재밌어’ 했더니 그제야 엄마가 ‘아버지 엄마가 육상 선수였잖아’ 하시는 겁니다. ‘역시 그랬구나. 하니까 되네’ 하는 희망을 갖게 되면서 피나는 노력이 시작됐죠.”
어느 정도 열심히 하셨는가요?
“제가 남산 밑에 있는 숭의초-숭의여중-숭의여고를 나왔어요. 당시에는 밤 12시 이후 통행금지가 있었잖아요. 우리집이 도봉구 쌍문동 버스 종점 근처였는데 버스에서 내리면 통금 알리는 사이렌이 ‘애앵∼’ 하고 울렸어요. 단체운동 뒤에 개인연습 하고 정리하고 체육관 불 다 끄고 버스를 타면 그 시간에 도착하는 거죠. 파김치가 돼서 내리면 엄마가 버스정류소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내 운동가방·책가방 들어주시고 둘이 함께 이런저런 얘기 하며 집까지 걸어가는 겁니다. 그걸 엄마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셨는데 그게 선수 생활 내내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몰라요. 새벽에는 4시에 일어나서 도시락 두 개를 싸 주셨어요. 그걸 갖고 학교로 가서 체육관 불도 켜지 않고 연습을 했죠.”
고1 때 최연소 대표선수가 됐고, 태평양화학에서 전성기를 누리셨죠. 당시 업계 맞수인 한국화장품과의 라이벌전이 불꽃을 튀겼죠. 한국화장품에는 김영희(202㎝) 선수도 있었고.
“영희하고는 라이벌 의식 같은 건 없었어요. 키는 저보다 컸지만 한참 후배인데다 기본기가 확실하게 잡힌 선수가 아니었어요. 빨리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이것저것 가르쳐주기도 했고요. 선수 때도 몸이 썩 좋지 않았는데 결국 안 좋은 병(거인병) 때문에 힘들게 됐죠. 부천에서 혼자 사는 영희 이야기를 다룬 TV 다큐멘터리 찍을 때도 집에 가서 만났고, 영희 위해 모금운동도 많이 했어요. 어려운 환경에서도 밝고 맑게 지낸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1984년 LA 올림픽 은메달 얘기 좀 들려주시죠.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올림픽 보이콧으로 한국이 대신 나가기로 결정된 게 대회 3개월 전이었어요. 당시 저는 올림픽을 포기하고 있었어요. 무릎 부상이 심각한 데다 결혼을 앞두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6개국이 출전하는데 뻔히 꼴찌할 게 보이는데 나갈 이유가 없었죠. 대표팀 훈련 한 달이 지났는데도 내가 안 들어오니 선수들이 술렁술렁하는 겁니다. 결국 조승연 감독님이 저를 찾아오셨어요.”
포기했다가 뒤늦게 합류한 LA 올림픽
뭐라고 하시던가요?
“‘선택은 본인이 하는 거다. 그런데 네가 지금까지 어떻게 농구를 해 왔는지 돌아봐라. 누구보다 화려했던 선수 생활의 마무리를 이렇게 할 거냐’ 이러시는데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겁니다. ‘뭐야. 이렇게 끝나는 거라고? 그건 아니지’ 싶어서 ‘네 알겠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했습니다. 꼴찌 하더라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마무리를 잘하자, 정말 국가를 위해서 뛰자는 마음으로 들어갔어요. 늦게 합류했으니 평소의 두 배 이상 피눈물 나게 훈련했어요. 주장인 제가 앞장서니까 후배들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죠.”
첫 상대가 캐나다였죠?
“몇 달 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똑같은 멤버로 우리가 졌어요. 게임 전날 선수촌 식당 앞에서 캐나다 선수들과 마주쳤어요. 조승연 감독님이 상대 감독과 얘기를 나누기에 ‘선생님 무슨 얘기 했어요?’ 물었죠. 감독님이 ‘내일 경기 준비 다 됐냐고 했더니 내일 한국과 게임이 제일 중요하다. 반드시 이겨야 해서 긴장된다고 하더라’고 전해주셨어요. 그 순간 ‘뭐야, 우리만 캐나다 무서워하는 줄 알았는데 쟤들도 우릴 두려워하는구나’ 싶어서 힘이 불끈 나는 겁니다. 그 경기에서 이기고 나니 다른 팀도 두렵지 않았죠. 유고·호주를 잇달아 꺾었습니다.”
기적의 3연승을 거뒀고, 숙적 중국(당시는 중공)만 이기면 은메달 확보였죠?
“이기면 은메달 확보지만 지면 3∼4위전에 나가는데, 캐나다·유고 같은 팀들이 우리 변칙 작전에 말려 한 번은 졌지만 다시 붙으면 우리가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어요. 무조건 중공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밤새 뒤척였는데, 막상 경기가 시작되니까 내 몸이 붕붕 날아다니고 링이 두 배나 커 보여요. 던지면 쏙쏙 들어갔죠. 수많은 국제 경기를 치렀지만 그때만큼 잘 된 적이 없었어요. 우리 선수들도 덩달아 신이 나서 상대를 압도했어요. 종료 버저가 울린 뒤 끌어안고 한바탕 운 뒤에 제가 ‘얘들아 우리 진짜 이긴 거야? 내 다리 꼬집어 봐. 꿈 같아서 그래’ 했더니 후배들이 진짜로 꼬집는 겁니다. 하하하. 지금 이렇게 말로 표현하지만 그 순간은 온 세상이 전부 내꺼였어요.”
당시가 여자농구 전성기였다. 실업팀이 13개나 됐다. 박 본부장은 “그때 모든 종목을 통틀어서 여자농구가 꽃이었어요. 선수촌에서 가장 인기가 좋았고, 국제대회 나가면 성적 내고, 국내 리그도 모범적으로 진행됐고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현실 이야기가 나오자 금세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금은 금융팀 6개 체제로 됐는데 팀이 줄면 선수가 줄고, 그러면 저변이 줄어든다는 말이거든요. 초중고 팀이 각각 50개를 넘었는데 지금은 20개 안팎입니다. 저변이 좁으니 스타가 나오지 않고, 국제대회 성적도 나오지 않는 악순환이 됐어요. 저는 후배들한테 ‘국제대회 나가서 그동안 선배들이 해 놓은 걸 지켜만 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요즘 여자농구가 배구한테 한참 밀리는 걸 보면 자존심 상하고 화도 납니다.”
여자농구 전성기를 되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민해야죠. 농구인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요. 우리 땐 27∼28세 정도엔 은퇴하고 결혼을 했어요. 요즘 프로팀 주전은 억대 연봉을 받으니까 40살까지 뛰는 선수가 나오잖아요. 새 얼굴이 나올 기회가 크게 줄었죠. 10년 동안 벤치에만 있는 상황을 견딜 선수가 얼마나 많겠어요. 그래도 박지수(21·KB국민은행) 같은 선수가 나온다는 게 얼마나 다행입니까. 박지수는 체격조건(키 198㎝)이 월등하고 미국 프로농구(WNBA)에서도 뛰어본 선수잖아요. 그런 빅 스타를 보유한 팀이 자꾸 지면 되겠습니까. 독주해야죠. 본인도 월등하게 뛰어나야 합니다. 샌드위치 마크(한 선수를 두 명이 앞뒤로 마크하는 것)는 기본이고 3명이 달라붙어도 그걸 헤쳐 나가야죠. 가서 코치해주고 싶을 정도로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확 성장해서 세계 무대를 휘젓는 멋진 선수가 됐으면 좋겠어요.”
꿈나무 육성에 보람… 초등학교 땐 농구 즐기게 해야
이런 상황에서 유소녀육성본부장의 역할이 큰데요.
“농구 하는 여자아이가 줄고, 학교 팀도 줄고 있어요. 어차피 학교 운동부 위주의 엘리트 중심에서 지역 농구클럽이 주도하는 생활스포츠로 축이 옮겨가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초등학교 땐 엘리트를 키울 생각 하지 말고 즐기도록 해 줘야 한다고 봅니다. 아이들 공 갖고 노는 게 얼마나 귀여운 줄 아세요. 그 속에서 ‘어 저놈 봐라’ 하는 애가 꼭 튀어나와요. 그런 선수는 중학교 진학 때 본인의 희망에 따라 엘리트 선수로 클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면 되는 겁니다. 과거처럼 ‘너 키 크니까 농구 해’ 하는 식은 아니라는 거죠.”
최근 스포츠계 폭력과 성폭력 문제가 불거졌는데요.
“저는 운동하면서 한 번도 맞아본 적도 기합 받아본 적도 없어요. 맞으면서까지 운동할 이유가 없었죠. 성폭력 같은 것도 전혀 본 적도 없어서 지금 그런 게 나오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기가 막힙니다. 그런 뉴스 보면 어느 부모가 딸아이 운동 시키려고 하겠습니까. 그런 지도자는 무조건 ‘원 스트라이크 아웃’으로 농구계에서 퇴출시켜야 합니다. 요즘 여자농구팀에는 의무적으로 여자 코치를 두게 하고 있어요.”
살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과 가장 슬프고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였나요?
“제일 기뻤던 건 역시 LA 올림픽 은메달 딸 때였죠. 그 순간에 내 가슴으로 세상을 모두 안았기 때문에 그 감동이 늘 새록새록 합니다. 가장 슬펐던 때는 부모님, 그리고 남편이 돌아가셨을 때죠. 남편을 보낸 뒤에는 화도 났죠. ‘어떻게 무책임하게 나한테 아이들 떠넘기고 먼저 가냐 이거야’ 하면서요. 우리 아이들 잘 컸고 요즘 잘 나가는데 이럴 때 같이 있어서 기쁨도 보람도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그렇지만 위에서 잘 보고 있겠지요. 저는 아이들한테 ‘아빠는 돌아가신 게 아니야. 하늘 위에서 다 보고 계셔. 그러니까 너희가 잘해야 돼’라고 늘 강조했습니다. 아이들도 아빠 얘기는 잘 안 해요. 생각 안 날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엄마 마음 다칠까 봐 안 하는 거죠.”
가장 감사한 분은 누구신가요?
“부모님이죠. 두 분 다 돌아가시고 난 뒤에 아들이 산소 갔다 오다가 ‘어, 울엄마 고아 됐네’ 하는데 실감이 팍 나더라고요. 엄마 아버지가 계셨으니까 내가 있었어요. 내가 가장이 돼서 아이들 키워보니 ‘이럴 때 이랬겠구나, 저럴 땐 저랬겠구나’ 새록새록 생각이 나요. 동생들이 ‘언니는 엄마와 너무 똑같아’라는 말을 자주 해요. 저도 신기합니다. 전에는 못 느꼈는데,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봐요. 아이들이 엄마 그늘에서 잘 커 준 것도 감사하고요. 요즘은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삽니다.”(박 본부장의 눈가에 살짝 물기가 맺혔다.)
자신 인생에서 가장 큰 가치는 뭘까요?
“농구죠. 큰 농구공만큼 크게 인생을 살아왔어요. 그래서 농구를 떠날 수가 없어요. 또 대한체육회 부회장도 역임했고, 체육 쪽에서도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닌가 싶어요. 체육의 발전과 활성화를 위해서 말이죠. 너무 잘난 척하는 거 아니냐고요? 아니요. 난 자부심이 있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농구를 떠나선 안 되고 체육을 떠나선 안 된다고요. 그 사명이 나를 버티게 해 줍니다.”
레전드가 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박 본부장에게 물었다. 그는 “바르게 사는 게 맞죠. 실력이 뛰어나거나 남들보다 조금 앞선다고 해서 겉멋 들지 말고 그럴수록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저도 선수 시절에 얼마나 건방졌을까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들 정돕니다. 후배들한테 얘기하고 싶은 건 ‘레전드면 레전드답게 겸손하라’ 입니다”라고 강조했다.
박 본부장은 인터뷰 중에 ‘피눈물’이라는 말을 몇 차례 했다. 마지막도 ‘피눈물’이었다. “자라나는 세대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 그 꿈이 중간에 바뀌어도 좋아요. 어떤 분야든 인정받을 수 있는 때가 있는데 그럴 때까지 즐기세요. 그러다가 목표가 딱 생기면 그때부터 그냥 노력이 아닌,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정말 피눈물을 흘려야 달콤한 성공의 열매를 맛볼 수 있습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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