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산업은 한 나라의 제조업 경쟁력을 가늠하는 지표 산업이에요. 2017년 기준 국내 제조업 전체 생산액에서 자동차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2.7%에 이르지요. 업체 수로는 6.6%, 종사하는 종업원 수도 11.9%나 돼요. 자동차 산업의 발전이 곧 국가 산업 경쟁력 확보의 원천인 이유이지요.

 

 

한국은 지난 1975년 전 세계에서 9번째로 자동차 독자 모델을 생산해냈다. 초창기 ‘싼 맛에 탄다’던 한국 자동차는 이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밀리지 않을 만큼 경쟁력을 갖췄다. 손욱의 대화 11번째 순서에선 한국 자동차산업의 대부로 통하는 이충구 전 현대자동차 사장을 만났다.

 

이 전 사장은 1969년 현대차에 입사해 첫 독자 모델인 포니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후 2000년대 초반 은퇴 직전까지 에쿠스 개발을 이끌었다. 그가 재직 시 개발한 승용차 모델만 35개에 달한다. 이 전 사장은 자동차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말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선정한 과학기술유공자에 뽑히기도 했다. 자동차 엔지니어로는 처음이다.

 

한국 자동차산업의 살아 있는 역사인 그는 “독일, 일본과의 경쟁에서 아직 넘을 산이 높다”며 우리 자동차산업이 나아가야 할 미래를 제시했다.

손욱: 이충구 사장은 아무것도 없던 바닥에서 작은 부품 개발부터 시작해 한국의 첫 고유 모델인 포니를 내놓았습니다.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개발을 진두지휘하셨죠. 이 정도 내공을 쌓은 기술 전문가가 우리나라에 많지 않습니다. 무에서 기초를 쌓고 유를 창조한 분이시죠. 대한민국의 자동차산업을 세우고 이끈 선도자라고 생각합니다.

이충구: 과찬이십니다. 우리 자동차산업 발전기와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게 제 복이죠. 한편으로는 그만큼 고생도 많았고요.

손욱: 흔히 미국, 독일, 일본이 자동차 강국으로 꼽힙니다. 우리 목표도 결국 이들을 넘어서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충구: 맞습니다. 우리 경쟁 상대는 이들 세 나라죠. 미국은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제너럴 모터스(GM), 포드, 피아트크라이슬러(FCA) 등 ‘빅 3’가 여전히 건재합니다. 미국은 독일과 일본이 따라오니 세 번이나 자동차 세계대전을 벌이기도 했죠. 1985년 아우디를 망하게 했는가 하면, 일본은 230만 대 수출 제한으로 묶어버렸고 도요타 리콜 사태까지 터뜨렸어요.

 

가장 최근이 폴크스바겐의 디젤 게이트였죠. 미국의 자동차산업 수성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사례예요. 미국을 제외하면 결국 독일과 일본, 한국의 싸움입니다. 자동차 본고장이라는 미국에 제대로 자국 제품을 수출하는 나라도 세 곳뿐이에요.

손욱: 자동차산업에 투신하신 배경이 궁금합니다. 현대차 창립이 1967년이고, 이 사장 입사가 1969년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던 시절 아닌가요?

이충구: 제가 서울대 63학번 자동차공학전공 1기입니다. 시골에서 방앗간을 운영하신 아버님 덕에 어릴 때부터 기계와 친숙했어요. 직접 전봇대에 올라 수리하시고, 방앗간 기계를 고치시는 아버님 모습을 동경하며 컸죠. 당시는 자동차산업이라는 게 아예 없던 시절입니다. 대학 전공이라 해봐야 교수님이 구해온 지게차 한 대가 실습 자재의 전부였죠.

 

3학년쯤 되니 미군 지프차용 오토트랜스미션 한 대가 들어왔을 정도로 열악했어요. 트랜스미션을 동기들과 열심히 분해하고선 역순으로 다시 조립했는데 부품 몇 개가 남더군요. 교재랄 것도 변변치 않아 『오토모티브 엔지니어링』이라는 미국 원서 5권이 전부였습니다. 학교보다는 오히려 군 수송병과에 입대한 덕에 운전·정비 매뉴얼을 익힐 수 있었죠.

 


청계천에서 포드 매뉴얼 구하던 시절

 

이충구 회장은 정주영 회장과 주지아로 (이탈디자인 창업자)의 헝그리정신이 포니 개발의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손욱: 대학이 그랬으니, 현대차 초기라고 열악한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거 같습니다. 당시 한국의 중공업산업이 대개 그랬듯이요.

이충구: 회사에 가서 보니 포드 코티나를 하루 2~3대 조립 생산하는 수준이었어요. 뻘을 메워 세운 울산공장은 비가 술술 새는 지경이었습니다. 처음 포드의 코티나와 M20 모델을 생산하다, 나중에 M20을 접고 고급차 모델인 그라나다를 조립했어요. 청계천에서 포드차 매뉴얼만 봐도 반가워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손욱: 생산 매뉴얼 하나 없던 나라가 어느 날 갑자기 고유 모델을 생산하는 기적을 썼습니다. 포니 생산이 1975년이었죠?

이충구: 1973년 울산공장을 떠나 서울의 기술정비 부문으로 옮겼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처음 정미소를 열었던 때부터 자동차에 대한 꿈이 있었어요. 현대차 설립이 그 꿈을 이루게 한 거죠. 때마침 정부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며 중화학공업 육성책을 들고 나왔어요. 자동차 국산화가 계획 중 하나였는데, 처음엔 1980년 완전 국산화가 목표였습니다.

 

사실 정부든 재계든 다들 안 된다는 말뿐이었어요. 정 회장의 혜안이 오늘날 현대차를 있게 한 겁니다. 정 회장은 아랫사람이 대답을 잘 못하면 호통을 치기보다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라며 직접 아이디어를 고민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존경스러운 면이죠.

손욱: 포니는 이탈리아의 디자인과 미쓰비시의 협력으로 개발됐다고 들었습니다.

이충구: 1974년 2월에 이탈리아로 가서 8개월 만에 굴러다닐 수 있는 프로토타입 모델을 모터쇼에 내놓았습니다. 기적이었죠. 정 회장과 주지아로(이탈디자인의 수장이자 세계적 자동차 디자이너)의 헝그리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처음엔 포드와 GM에 협력을 요청했다가 모조리 퇴짜를 맞았어요. 그러다 미쓰비시에서 후륜구동 엔진과 변속기, 조향장치 같은 섀시 기술을 들여왔습니다.

 

정 회장은 1974년 2월 설계에 들어간 차를 1975년 말에 팔 수 있게 하라고 독려했어요. 결국 설계에 들어간 지 1년 10개월 만인 1976년 1월 세상에 내놓았죠. 시장에서도 그야말로 대박이 터졌죠. 컴퓨터나 로봇도 없던 시절입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이었는데, 지금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아요.

손욱: 포니에 이어 후속작들이 연이어 히트하면서 한국 자동차산업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습니다. 가장 기업에 남는 모델은 무엇인가요?

이충구: 포니가 첫 고유 모델이라는 면에서 유명하지만, 엔지니어 입장에선 ‘엑스카 프로젝트’가 가장 뜻깊습니다. 바로 포니엑셀과 프레스토 모델이죠. 포니와 후속작인 포니2 모델은 국내뿐 아니라 캐나다에서 대박이 났어요. 가성비를 중시하는 캐나다 소비자 덕에 혼다를 누르는 기적을 썼죠.

 

반면 미국 소비자들은 가성비 못지않게 디자인과 색상, 성능을 꼼꼼히 따지는 편입니다. 당시 일본은 이미 도요타, 닛산, 혼다, 미쓰비시가 미국 시장에 진출한 때였죠. 포니엑셀과 프레스토는 국산차 최초 전륜구동 모델인데, 여기에도 우여곡절이 참 많았습니다.

손욱: 전류과 후륜의 차이가 큽니까?

이충구: 엑스카 프로젝트를 한창 진행하던 중에 미국 현지 시장조사를 나가니 딜러들 말이 “내년부터 일본 차는 모조리 전륜구동으로 바꾼다”는 거예요. 그때 우린 “전륜구동이 도대체 뭐지”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전륜구동은 1960년대에 이탈리아 알파로메오가 처음 개발했어요. 후륜은 프로펠러 샤프트가 뒤로 가다 보니 뒷좌석이 좁아지고 승차감도 떨어집니다. 순발력도 낮죠.

 

이에 비해 전륜은 엔진과 미션까지 전부 앞부분에 놓아야 해 부품 사이즈 자체가 작습니다. 정밀가공 기술이 필요한 겁니다. 일본은 독일에서 열심히 배운 덕에 이미 전륜구동 차량을 생산했어요. 독일은 폴크스바겐과 아우디가 이미 대형 차량에도 전륜구동 시스템을 갖춘 상황이었고요.

 

협력 관계였던 미쓰비시는 전륜구동을 준비하면서도 우리에게 일절 귀띔조차 없었죠. 정주영 회장이 설득 끝에 구보 도미오 당시 미쓰비시 회장을 만났는데 “당신들은 자동차가 뭔지도 모르면서 만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손욱: 개발하던 시스템 자체를 모조리 바꾼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제조업 종사자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엑스카 프로젝트 역시 포니 개발 못지않은 고생을 하셨군요.

이충구: 결국 미쓰비시와 전륜구동 모델인 미라지 플랫폼 계약을 다시 맺어야 했습니다. 애초 엑스카 프로젝트 목표가 1983년 미국 진출이었는데, 결국 1986년에야 포니엑셀로 첫 수출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포니 때 수천억원을 들여 개발한 생산라인을 포기하고 다시 그만큼의 비용을 들여 새로운 라인을 깔아야 했어요. 그렇게 전륜구동으로 생산한 첫 차 포니엑셀은 1986년 한 해에만 미국에서 16만8000대가 팔렸습니다. 단일 차종으로는 미국 내 어떤 수입차도 못 해냈던 대기록이죠.

손욱: 단순히 잘 팔리는 것, 즉 가성비 전략이 계속 먹힐 수는 없었겠지요? 품질의 본원 경쟁력은 어떻게 갖춰나갔습니까?

이충구: 정확합니다. 미국에서 많이 팔리면 팔릴수록 애프터서비스 노이즈가 커지더군요. 색상, 성능, 소재 같은 소위 ‘격(格)’이 떨어진다는 거였죠. 선진문화에선 그게 맞습니다. 일본도 1950년대 미국에 진출했다 망하고 1960년대 들어 다시 들어갔어요. 선진국의 감성 품질을 맞춘 끝에 성공한 거죠.

 

결국 미국에 진출한 지 3년쯤 지나자 문제가 불거지더군요. 도요타 코롤라, 혼다 시빅, 미쓰비시 미라지, 현대 프레스토의 경쟁 구도에서 현대와 미쓰비시가 똑같은 어려움을 겪게 됐습니다. 자동차의 핵심인 엔진에 문제가 생겼어요. 판매가 늘수록 한국 자동차는 싸구려라는 이미지가 강해졌죠.

손욱: 말씀만 들어도 고난의 연속입니다. 엔진은 미쓰비시와 협력관계 아니었습니까?

이충구: 전문적인 분야라 설명하기 어려운데, 당시 도요타와 닛산, 혼다는 엔진이 앞 방향으로 회전했습니다. 반면 미쓰비시는 반대였죠. 기술을 전수받은 현대도 마찬가지였고요. 역방향 엔진(3축엔진)은 출발할 때 차량이 출렁하는 미세한 쇼크가 있어요. 아주 작은 차이지만 결국 감성 품질을 맞추지 못한 겁니다.

 

미쓰비시에 자문했지만 “문제없다(No Problem)”는 답만 돌아오더군요. 시장에서 1~2년 시달린 끝에 결국 2축엔진(미쓰비시는 3축엔진)으로 바꿔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엔진과 미션 전용 생산라인을 새로 구축하는 데만 당시 3000억원이 들었어요. 정주영 회장은 물론이고 현장 엔지니어들도 굳이 왜 바꿔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후륜에서 전륜으로 바꾸는 데 수천억원이 들었는데, 또다시 그에 맞먹는 비용을 투자해야 했으니까요.

 

결국 마북연구소에서 R&D에 뛰어든 끝에 2축 알파엔진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새 엔진을 스쿠프 500대에 앉혀 시험해보니 문제가 없더군요. 끝까지 3축엔진을 고집했던 미쓰비시는 결국 미국 시장에서 힘을 잃었습니다.

 


한국, 결국은 독일·일본과 경쟁해야

 

손욱 회장은 제조업의 품질관리는 내가 가진 기술의 객관적인 수준을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손욱: 품질관리는 객관적 실체를 아는 데서 출발합니다. 제조업의 발전이 거기서부터 시작되죠. 에쿠스까지 개발하고 현역을 마치셨습니다. 에쿠스는 독일 차를 목표로 개발됐다고 들었습니다.

이충구: 한국 자동차를 대표하는 플래그십 모델이라는 열망으로 개발한 차가 에쿠스입니다. 이보다 앞서 그랜저가 있었죠. 1세대 그랜저는 미쓰비시의 데보네어를 기반으로 개발했습니다. 데보네어V가 1세대 그랜저와 같은 모델이죠. 당시 데보네어는 주로 미쓰비시 중역들만 타는 차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후속 모델 공동개발을 제안하니, 미쓰비시로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죠. 1세대 그랜저는 부품의 80%가 일본산이었어요. 2세대부터 보디를 우리가 독자 개발했죠. 3세대 격인 에쿠스는 2축엔진부터 거의 대부분 독자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독일에서도 인정받은 작품이었죠.

손욱: 최근 제네시스의 행보가 두드러집니다. 도요타 렉서스와 비교해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이라 보십니까?

이충구: 1989년 시카고 모터쇼에서 렉서스를 처음 봤을 때 충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렉서스가 뭐냐고 물으니 도요타에서 만든 럭셔리 브랜드라더군요. 곧장 남양연구소에 들여와 시동을 켰는데, 엔진이 돌아가는지 아닌지 모를 만큼 조용했어요. 독일 차와 가장 큰 차이점이죠. 독일은 “기계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지금도 강해요.

 

처음 6개월간 렉서스도 고전했지만, 이후 불티나게 팔렸어요. 벤츠보다 1만5000달러나 쌌으니까요. 제네시스도 지금 현대에서 생산되는 모델에 비해서는 월등히 높은 품질입니다. 하지만 주력 시장인 미국에 늦게 진출한 만큼 시장의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미국은 컨슈머리포트처럼 품질에 관한 한 엄청나게 투명한 시장이에요.

손욱: 독일 차와의 경쟁은 어느 정도 수준이라 평가하시나요?

이충구: 독일 병정이란 말이 있죠. 독일 자동차는 후퇴라는 걸 모릅니다. 오직 전진만 있을 뿐이죠. 분명한 건 우리 경쟁 상대는 독일과 일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에요.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처음에 일본과 피를 섞었습니다. IMF 외환위기 때 1년간 자재 책임을 맡았는데, 그때 독일과 미국 업체로 바꿀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우리 차가 글로벌 레벨로 올라간 계기예요. 미국이나 독일은 한번 믿으면 끝까지 업데이트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반면 일본은 뭘 물어도 웬만해선 알려주지 않아요.

손욱: 결국 미국이라는 공룡을 제외하면 독일과 일본, 한국의 3파전이군요. 한국 자동차산업이 이들을 넘어서기 위한 과제는 무엇일까요?

이충구: 미국 차는 품질의 일관성(consistency)이 떨어진다는 약점이 있지만 워낙 덩치가 커요. 한국은 독일과 일본에 비해 상품 경쟁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정의선 부회장은 2025년까지 하이브리드, 전기차, 수소전기차 등 3대 전동차 부문에서 빅 3로 올라서겠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내연기관에서 국산차 경쟁력이 3.5순위 정도라면, 전동차에서 충분히 3위 안에 오를 거라 봅니다. 특히 전동차의 경우 그간 쌓아온 히스토리와 플랫폼이 있어 2025년 연 56만 대 판매 목표가 가능하리라 봅니다. 대단한 성과죠. 자율주행 기술도 아직은 독일, 일본에 뒤처져 있어요. 우선 지도(map)와 기술표준을 누가 선점하느냐가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다음으로 문화·윤리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죠.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보험 서비스 등이 개편돼야 할 테고, 윤리적 측면에선 소위 트롤리 딜레마를 해결해야 할 겁니다. 현재 자율주행 기술은 4레벨까지 와 있고, 상용화는 2.5레벨 수준입니다. 사회적 문제까지 완전히 해결할 5레벨에 이르려면 20년은 걸릴 것으로 봐요.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사진 임익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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