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세희(59) 국립중앙의료원 건강증진예방센터장은 의학계의 ‘르네상스인’이라고 할 만해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전공은 소아과예요. 하지만 안정된 의사 코스로 꼽히는 서울대병원에서 인턴·레지던트·전임의 과정을 수료한 뒤 1994년 중앙일보 의학전문 기자로 전업해 16년을 일했어요. 이 경험을 통해 인간의 몸 전체로 지식과 관심을 확장할 수 있었다고 해요.
황세희 국립중앙의료원 건강증진예방센터장은 2001년 기자생활 중 미국 보스턴의 MIT에서 과학 저널리즘에 관한 연수를 1년 동안 받았다. 관심 영역이 심리학, 사회학 등으로 한층 넓어진 계기가 됐다. 인생 후반에 국가공무원으로 신분이 바뀐 뒤에도 황 센터장은 강연과 기고 등을 통해 대중에게 의료 상식을 전하고 있다.
황 센터장은 중앙일보·JTBC 최고경영자과정인 J포럼의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코로나19부터 아동학대, 성범죄, 죽음에 관한 성찰까지, 그의 호기심은 마르지 않는다. 3월 31일 서소문 중앙일보에서 황 센터장을 처음 만났을 때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에 생동감이 넘쳤다. 활력과 행복의 비결은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삶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의 문제임을 새삼 실감했다.
의사에서 기자가 된 사연
의사로서 보장된 길을 잠시 접고, 기자로 일했다.
“그때(1990년대 초)만 해도 지금보다 정보가 부족했고, 교육·문화·사회 수준이 낮았다. ‘뱀을 먹으면 어디에 좋다더라’ 같은 근거 없는 속설을 믿다가 환자들이 실려 오는 걸 서울대병원 응급실에서 너무 많이 봤다.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주려면 언론의 영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중앙일보가 사내에 전문기자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신문사로 들어왔다.”
기자로 일하다가 돌연 미국 MIT로 연수를 떠났는데…
“MIT의 ‘나이트 사이언스 저널리즘(Knight Science Journalism)’ 펠로우십에 뽑혔다. 미국인이 아닌 국적자 중 최초의 유료 연수자였다. 뽑히기 전, 전화로 영어 인터뷰 심사를 받았다. 사실 영어가 잘 안 됐다.(웃음) 예상 질문지 20개를 혼자 만들어서 영작한 뒤 미국인에게 수정을 받았다. 전화인터뷰를 하는 날, 중앙일보 책상에 질문지 20장을 펼쳐놓고 찾아가면서 대답했다. (실제 질문이) 정말 거기서 한 개도 안 벗어났다.(웃음)”
미국 연수를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이었나?
“(9·11테러 직전인) 2001년 9월 4일 개강했는데 노벨상 수상자, 노엄 촘스키, 미국 언론계 베테랑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하버드와 MIT의 모든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그때 심리학, 인류학, 메디컬 히스토리에 대해 배운 게 많다.”
상상하던 미국과 현실의 미국 사이의 괴리도 체감했겠다.
“당시 우리에게 미국은 거의 ‘신의 나라’였다. 그럼데 막상 가서 보니까 미국은 선진국이지만, 우리가 떠올렸던 ‘신의 나라’는 전혀 아니었다. 미국은 멜팅 팟(Melting Pot, 인종의 용광로)이 아니었다. (인종·소득 등에 따라 단절·구분되는) 계층사회였다. 어울려 사는 문화가 절대 아니다. 가령 백인 부자 동네에는 흑인이 살지 않는다. 미국의 이런 면모를 보면서 20년 전부터 ‘대한민국은 미래가 있구나’라고 믿게 됐다.
2010년까지 중앙일보 의학전문 기자로 일한 뒤 국립중앙의료원으로 옮겼다.
“의학 기자를 하면 인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기사 소재로) 다룬다. (이때의 취재물을 모아) <황세희 박사에게 물어보세요>라는 책을 썼다. (경험이 쌓이니) 다이어트까지 상담해줄 수 있었다. ‘검진센터장이라는 자리가 나에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중앙의료원 건강증진예방센터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취지로 만들어진 곳인가?
“2010년 4월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이 됐다. 그해 5월에 내가 갔다. 서울대병원, 삼성병원, 아산병원도 훌륭하지만 검진비용이 너무 비싸다. 국립중앙의료원은 그 정도 수준의 검진프로그램을 제공하되 비용은 60% 이상 줄였다. 가령 다른 큰 병원에서 400만원 받는 걸 우리는 150만원 정도로 했다. 중산층도 부담은 되겠지만, 그래도 받을 수 있는 정도의 고퀄리티 종합검진 프로그램이다. 중산층, 보통 사람들에게도 합리적이고 착한 가격으로 최고급 검진을 해주자는 취지다.
또 공단 검진에 관해선 (수요에 부응하는 측면에서) 대한민국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알려진 큰 병원에서 공단 검진은 하루에 5명밖에 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 병원에 오는 공단 검진 환자들은 제대로 잘 진료하자’고 다짐한다. 국가에서 (의료) 장비와 (병원 부지) 땅을 사주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다.”
국립중앙의료원이니까 막연하게 신종플루, 메르스, 코로나19 대응이 주 업무인 줄 알았다.
“아니다. 코로나19 대응 병원은 맞다. 하지만 일반 환자를 더 많이 본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슈가 1년을 넘어가고 있다. 백신을 맞아야 끝이 나는 것일까? 황 센터장은 코로나19 사태에 관한 글을 지속적으로 써왔다.
“처음부터 ‘2년은 갈 것’이라고 했다. 코로나 백신은 노벨상을 받을 만하다. 인류 최초로 mRNA백신을 만든 것이다. 백년 만에 온 팬데믹이 2020년 터졌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좋아한다. 2019년 해외로 나갈 때마다 어디든 중국 사람이 많더라.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에서) 나왔을 때 내가 ‘이건 팬데믹’이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프랑스, 이탈리아처럼 중국인이 많이 간 곳부터 터지더라.”
언제까지 백신을 기다리며 마스크 쓰고 살아야 할까?
“원칙적으로 호흡기 바이러스를 어떻게 종식시키나? (확진자가 급증하지 않도록) 조절을 할 수 있을 뿐이다. 30년 넘게 의료계에 있었지만 이런 호흡기 바이러스는 처음 봤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감염과 회복 측면에서) 나이가 너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아데노바이러스는 어린이는 심하게 앓고, 중간층은 감기처럼 앓고, 노인은 심하게 앓는다. 인플루엔자도 (위험도에 따라) 3세 이하·65세 이상만 의무 백신이다. 왜냐하면 이 연령층은 앓으면 후유증이 심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기존의 바이러스들과 무엇이 다를까?
“이 정도면 젊은 사람 중에 (사망자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세대 간에 (증상의) 격차가 심한 병이 없다. 단적인 예가 20대와 50대 에이즈(후천성 면역 결핍증)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다. 20대 환자는 에이즈 치료를 안 한 상태(면역력이 결핍인 상태)에서 코로나19에 걸렸다.
50대 환자는 에이즈약 치료를 잘 받아 면역력이 좋은 상태에서 코로나19에 걸렸다. 얼핏 (코로나19 증상을 봤을 때) 20대가 더 나빠야 하는데 50대가 더 나쁜 것으로 나왔다. ‘코로나19는 혈전을 만드는 혈관병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고령층에서 무서워할만하다.
“다른 바이러스는 폐를 조금씩 망가뜨리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혈전이 혈관을 막아 갑자기 상태가 나빠지는 환자가 많다.”
그럼 계속 이렇게 봉쇄 모드로 살아야 하나?
“전 세계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만 해도 (확진자) 샘플이 10만 명 이상이니까 (통계적으로) 딱 나올 수 있다. 스웨덴의 집단면역이 실패했다고 하지만, 80~90대가 가장 많이 사망했다. 국가가 나서서 ‘(일부 연령층을 제외하면 걸려도 큰 문제는 없을 테니) 집단면역을 해라’고는 못하지만, 젊은이들은 감염돼도 대부분 괜찮다고 본다.
(코로나 방어를 위해) 특히 어린이들의 학교 수업을 막는 건 어찌 보면 굉장히 잔인하다. 마스크를 쓰고 대화를 하다보면 자라나는 아이들은 표정을 못 읽는다. 지금처럼 집에 놔두면 아동 학대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 의사로서 소아과를 전공하면서 모성애가 착각이구나 싶을 때가 있었다. 모성애는 동물적인 것인데, 자기에게 유리한 애한테 더 잘해주는 부모가 많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이 백신 없는 집단면역에 흔쾌히 동조하겠는가?
“젊은 친구들도 (걸리면) 큰일 나는 줄 안다. 예전 광우병 사태처럼 백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도 내가 죽을 확률이 있으면 싫은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20대 젊은 여성이 가장 힘겹다. 자살률이 40% 늘었다. 코로나19로 죽은 20대는 한 자릿수일 텐데, (역설적이게도 예방을 위한 봉쇄 탓에) 일자리나 아르바이트 자리가 날아가 생활고에 시달려 자살로 내몰린 젊은이들은 훨씬 많을 것이다.”
혈관병 같은 코로나19 바이러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관해선 ‘종식’이라는 표현에 비판적인 듯하다.
“첫째 코로나19는 호흡기 바이러스다. 둘째 무증상이 50%다. 이런 병의 종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메르스는 치사율이 40%까지 나왔다. 그리고 메르스는 증상이 나타나면서 전염성이 생긴다. 반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증상 발현 전후에 가장 전염성이 높다. 증상이 나타나기도 전부터 전염력인 있는 걸 어떻게 종식시키는가? 게다가 호흡기로 전파된다.”
이러면 또 확진자가 증가할 수 있겠다? (실제 4월 초 코로나19 확진자가 다시 500명대로 증가했다.)
“(팬데믹 전염병의) 아주 전형적인 패턴이다. 겨울철 끝자락에 시작해 봄철에 소봉(小峰), 그해 겨울에 대봉(大峰)이 나오고…. 백신이 나왔기에 망정이지 10년이 돼도 없어지지 않을 뻔했다. 다만 코로나19 백신을 지난해 여름부터 구했어야 했다.”
코로나 대응에 대해 희망적인 측면을 찾자면 무엇일까?
“상당히 효과적인 백신이 개발됐다는 점이다. 백신을 전국민이 동시다발적으로 접종해 집단면역을 만들면 바이러스 변이도 적게 생긴다”
“행복은 자신감에서 나온다”
백신을 맞은 직후 많이 앓는다고 들었다.
“늙은 세포는 (바이러스에 대항하다가) 죽을까 봐 안 싸운다. (같은 이치에서) 나이 든 사람은 폐렴에 걸려도 열이 안 난다. 그러나 젊은 사람은 열이 심하게 난다. 세포가 열심히 싸우는 것이다. 젊은 사람은 정작 코로나에 걸리면 증상이 가벼운데 백신에 대한 반응은 세게 나오는 이유다. 가볍게 앓는 것과 mRNA 백신 맞을 때와 감염과 면역의 루트가 다르기 때문이다.”
본업 외에 아동학대·성범죄 등 심리에 관한 글을 많이 썼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정작 행복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지 못하는 것일까?
“대한민국은 ‘절대 평등’의 나라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에게 보통 선거권을 준 건 유럽 선진국들보다 몇 년 차이 안 난다. 1945년 조선 왕실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런 나라는 거의 없다. 해방과 더불어 절대 평등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가난해도 자녀가 공부를 잘하면 무리를 해서라도 해외 유학을 시키려 한다. 반면 미국과 유럽은 의외로 계층별로 산다. ‘가난한 사람들은 당연히 대학에 안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절대 평등이 역설적이게도 불행의 씨앗이었겠다.
“우리나라는 평등사상이 강하고, 인구 밀도도 높다. ‘(이렇게 빈부 격차가 심한데도) 미국에서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미국 사람들은은 비교를 하지 않는다. (대개의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볼 일도 없다. 반면 (부자와 빈자가 섞여 사니까) 우리나라는 계속 보고 산다. 서로 경쟁적이다. 내가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이 욕망하는 걸 내가 욕망한다고 착각한다. 우리나라는 루이뷔통 같은 고가품이 ‘3초 백’(길거리에서 이 명품가방이 3초마다 보일 정도로 흔하다는 뜻)으로 등장한다.”
남을 의식하고 끊임없이 비교하는 한, 행복은 잡히지 않겠다.
“이런 나라는 발전은 빠르지만, 경쟁적이니까 행복과 거리가 멀다. 모두가 평등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평등하지 않으니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남이 벤츠를 사면 나도 사야만 하는 사회는 기본적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이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자기 철학이 있어야 한다. 흔히 노후 준비라고 하면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돈보다는 혼자서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게 행복의 지름길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취미가 아니라 벤틸레이션(ventilation, 환기) 할 수 있는 취미와 친구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노력을 해야 한다. 이건 셀프 컨피던스(self-confidence, 자신감), 자기 기준의 문제다.”
글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사진 박종근 비주얼에디터 jokepark@joongang.co.kr
녹취 정리 박남화 월간중앙 인턴기자
월간중앙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