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권익 구제를 업으로 살아온 사람이 있어요. 지영림 경기도 옴부즈만은 우리나라 옴부즈만 제도(Ombudsman System, 공무원의 권력남용 등을 조사·감시하는 행정통제 제도)의 산증인이에요. 1994년 옴부즈만 제도가 도입되면서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한 뒤로 현재까지 이 일을 하고 있어요.
그의 활동 범위는 중앙·지방을 가리지 않는다.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서울특별시의회 사무처 입법담당관으로 일하던 그는 2017년 경기도 시흥시로 행선지를 돌렸다. 시흥에 어떤 연고도 없는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시흥에서 상근 독임제(獨任制, 하나의 행정관청에 그 권한을 일임하는 조직제도) 옴부즈만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다고 한다.
지 옴부즈만은 “독임제야말로 옴부즈만 제도의 본류(本流)”라고 말했다. 그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시흥시 옴부즈만으로서 임기를 마친 그는 5월 10일부터는 경기도 옴부즈만으로 활동하고 있다. 월간중앙은 지 옴부즈만이 시흥시 옴부즈만으로 일하던 4월 30일 시흥시청 시민호민관실에서 그를 만났다.
옴부즈만? 권익위의 지방판, 명칭은 제각각
옴부즈만은 어떤 일을 하나?
“국민권익위원회의 지방판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행정심판·소송으로 이어지기 전 행정처분을 조율해 권익 구제하는 일을 지방자치단체에서 하는 게 바로 지방 옴부즈만이다. 명칭은 지역마다 제각각이다.”
업무도 지역마다 다른가?
“대체로 비슷하다. 권익구제·갈등관리·고충민원처리·제도개선·규제개혁·시민감사 등이다. 옴부즈만 제도가 만들어진 취지는 행정기관의 위법·부당행위로 불편을 겪은 시민이 권력에 연줄 따위가 없어도 공정한 해결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법·행정의 전문가가 옴부즈만을 통해 시민의 부족한 정보와 지식을 메워 억울하지 않도록 한다.”
왜 아무 연고도 없는 시흥시에서 일할 생각을 했나?
“독임제를 채택한 곳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옴부즈만 선진국인 유럽에서는 대부분 독임제를 채택하고 있다. 시흥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상근 독임제를 실시하고 있는 도시여서 옴부즈만인 제게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독임제가 왜 옴부즈만 입장에서 매력적이냐면,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독립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실제 일해보니 이러한 독립성이 잘 지켜지고 있어서 만족하고 있다.”
지 옴부즈만이 시흥시 옴부즈만으로 위촉된 날은 2017년 5월 2일이다. 임기는 2년, 한차례 연임해 올해 5월 1일 시흥시 옴부즈만으로서의 4년을 종료했다. 임기 종료를 앞두고 그는 경기도 옴부즈만 공모에 응시해 합격했다. 지 옴부즈만은 5월 10일부터 경기도 옴부즈만으로서의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왜 경기도 옴부즈만으로 자리를 옮기려 하나?
“지자체마다 사건의 처리 방향은 물론 심판의 결정도 달라 민원인이 불편을 겪는 경우를 자주 목격했다. 예를 들어 복수의 지자체와 얽혀 있는 개발제한구역 문제를 시흥에서 해결하려고 해도 인근 지자체의 결정이 달라 민원인을 구제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시 단위가 아닌 도 단위로 옴부즈만 업무 범위를 확장해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 경기도 움부즈만에 지원하게 됐다.”
지 옴부즈만은 줄곧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법학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법무부 법무심의관실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사법고시에 응시하지 않고 권익위의 전신인 국민고충처리위 전문위원으로 들어갔다.
그가 처음 옴부즈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주변에서 뜯어말렸다고 한다. 그가 고충처리위로 간다고 하니 주변의 법학자들은 “행정심판·소송 등 기존 방식으로 충분히 권익 구제가 가능한데 왜 옥상옥(屋上屋, 불필요하게 이중으로 하는 일) 기관을 하려고 하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일반적인 법률가의 길과는 조금 다르다. 왜 이 길을 선택했나?
“억울한 사람의 눈물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법률가지만, 법의 한계를 많이 느낀다. 일단 법으로 억울함을 풀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오죽하면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라는 말이 있겠나. 나는 평생을 법과 행정의 경계인으로 살아왔다. 법학계에서 보면 나는 행정으로 가버린 사람이고, 행정 분야에서 나는 외부인이다. 그런데 그런 경계인 신분이 오히려 시민의 아픔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연세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제자들에게 옴부즈만의 길은 추천할만한가?
“잠을 줄일 정도로 일하는 걸 무척 좋아하고, 남의 일을 해주는 걸 내 일보다 즐기는 사람이라면 적극적으로 추천할 만하다(웃음). 옴부즈만은 고독하고 외로운 자리다. 평생 경계인으로 살 각오를 해야 한다. 그리고 가시밭길이다. 잘못하면 행정기관과 민원인 양쪽에서 욕을 먹을 수 있다.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권하겠다.”
권익위 전국협의회 공동의장 중책 맡아
지 옴부즈만은 3월 1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1차 권익위 전국협의회에서 공동의장으로 선출됐다. 지 옴부즈만은 “앞으로 진짜 시민 편에 바로 설 수 있는 정책적 계기를 마련할 수 있도록 협력과 논의를 지속해 나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공동의장으로서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옴부즈만 기구에 자문과 교육, 평가를 해주고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네트워킹 강화도 필요하다. 옴부즈만의 역량을 어떻게 강화할지, 어떻게 연속적인 권익 구제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고민하고 있다. 현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옴부즈만을 운영하는 지자체 수를 확장하는 것이다. ”
왜 그 일이 가장 중요한가?
“전국 234개 지자체 중 옴부즈만 제도를 운영하는 곳은 현재 52개뿐이다. 25%에도 미치지 못한다. 2005년 옴부즈만 제도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고 15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온전히 제도가 우리나라에 정착했다고 보기 힘든 이유다.”
근거법이 있음에도 지자체가 옴부즈만을 적극적으로 설치·운영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옴부즈만과 지역 토착세력과의 유착 우려로 강제 규정이 아닌 임의 규정으로 법을 만들었다. 지자체장과 한통속이 돼 이상한 짓을 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그렇다 보니 지자체가 옴부즈만을 설치하는데 소극적이다. 옴부즈만 설치를 의무화하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가 많다. 대표적으로 전문성·독립성이 항상 문제로 지적받고 있다. 그 외에도 인사권·예산권이 확보되지 않는다든지, 중앙정부와의 연계 미흡이라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 특히 선출직인 지자체장이 바뀔 때마다 옴부즈만의 독립성이 심하게 훼손되고 있다.”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뜻인가?
“그렇다. 국회에서 권익위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인구 50만명 이상인 지자체는 옴부즈만 설치를 필수화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공무원 입장에서 옴부즈만은 불편한 조직일 수밖에 없다. 공무원의 행정 처분 중 민원이 발생하는 건에 대해서는 옴부즈만이 상위법 등을 살펴보고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행정기관이 시정하도록 권고한다. 이때 처분을 내린 공무원이 ‘혹여나 자신이 감사받으면 책임져 줄 것이냐’라는 입장을 보일 때가 있다. 이런 문제를 해소할 수 있게끔 옴부즈만이 권고하는 건에 대해서는 다른 상급 기관의 감사면책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
지방 의회와 옴부즈만의 차이는 무엇인가?
“의회는 시민을 대변하는 기관이고, 옴부즈만은 권익 구제에 특화된 기관이다. 시민이 행정 처분이 위법·부당하다고 할 때 옴부즈만은 직접 조사를 원칙으로 하며,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반드시 권고의 형태로 시정을 요구한다. 의회가 지자체를 견제한다면, 옴부즈만은 지자체가 스스로 변하도록 유도하는 일을 한다.”
지자체 옴부즈만 표준화, 계량화 시급
시민의 권익 구제는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있지만, 시민을 만족시켜야 하기에 성과로 연결하기는 힘들다.
“그렇다. 권익 구제를 평생 업으로 삼아 30년 가까운 기간 이 일을 하고 있지만, 매번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결국 시민과 공감하면서 시민의 입장에서 얘기를 진정성 있게 경청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법과 행정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고 시민에게 꼭 필요한 부분을 지자체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민원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런 질문을 많이 받지만, 하나만 꼽기는 힘들다. 대부분의 민원이 기억에서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가슴 아픈 사연이다. 가장 최근 민원만 봐도 그렇다. 개발제한구역 내 거주자의 민원인데, 보상이 없는 상황에서 민원인은 30년 넘게 투쟁만 하다가 이행강제금만 잔뜩 받았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확대 회의를 만들어 인근 지자체 관계자까지 모두 모았는데, 민원인에게 암이 발병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다행히 민원인의 건강 상황이 조금 괜찮아졌을 때 확대회의 날짜가 잡혔다. 민원인은 가족의 부축을 받아 회의장에 들어와서는 울면서 ‘개발제한구역은 우리의 목숨을 담보로 유지되고 있다. 나는 이렇게 가더라도 우리 아이 세대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고 호소했다. 지울래야 지울 수가 없는 기억이다.”
우리나라 지방 옴부즈만 제도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표준화되지 않았다. 지자체마다 천차만별이다. 지원 조직도 제각각이다. 이걸 표준화하고 계량화해야 한다. 일단 관련 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라도 옴부즈만 제도를 운영하는 지자체가 지금보다 늘어나야 한다.”
옴부즈만 양성 과정이 존재하나?
“없다. 권익위에서 고충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이건 조사관 교육이고, 옴부즈만 양성 과정은 따로 없다.”
옴부즈만 양성 과정을 만들 계획은 없나?
“제가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다. 아버지는 생전에 제게 ‘어려운 사람을 돕는 회사를 차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향후 옴부즈만을 양성하는 법인의 대표를 하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웃음)”
타지방 옴부즈만과의 협업도 중요한가?
“그렇다. 민원이 양극화·집단화 경향을 보여 시간이 지날수록 협업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공동의장으로서 원활한 협업을 위해 권역별 지자체 모임을 열 계획이다.”
“권익 구제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 받고파”
지 옴부즈만은 앞으로의 꿈을 묻는 질문에 “권익 구제 영역에 한 획을 긋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품어왔던 꿈이라고 한다. 그는 “30년 동안 이 일을 해왔으니 한 획을 긋기 위한 초석은 마련됐지 않았겠냐”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아픔을 살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다. 법이 국민과 조금만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이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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