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준비는 어느 한 쪽만 지나치게 신경 쓰거나 반대로 소홀하면 균형을 잡지 못한 자전거처럼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 쉽다. 은퇴를 앞둔 CEO들이 행복하게 사는 데 필요한 4가지 은퇴 준비물을 꼽았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은퇴한 CEO들이 흔히 겪는 심리적 증상 중 하나가 ‘잠시도 한가해서는 안 된다’는 ‘수퍼 노인 증후군’이다. 이미 많은 것을 하고 있지만 더 많은 걸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 CEO들처럼 하루하루를 숨 가쁘게 달려온 분들은 계속해서 뭔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은퇴 후 모처럼 찾아온 인생의 자유에 애써 새로운 의무를 만들어 입힌다. 피로감을 느낄 만큼 빡빡하게 하루 일과를 채우는가 하면, 일과표의 빈자리를 어떻게든 메워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시간 죽이기 식 활동을 늘어놓는다.
은퇴 후 홍수처럼 밀려드는 자유 앞에서 당황하지 않으려면 미리 하루 시간 계획을 세워보는 게 좋다. 가족, 취미·여가, 건강, 사회활동 등 ‘행복 포트폴리오’를 구성해볼 것을 권한다. 노후 삶의 행복은 이러한 요소들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완성된다. 지나치게 한 분야에만 매달리기 보다는 포트폴리오 별로 시간과 노력을 골고루 배분해야 한다.
2011년 7월 삼성경제연구소가 진행한 설문에 따르면 우리나라 CEO들은 66.2세를 본인의 적정 은퇴연령으로 꼽았다. 66세의 기대여명, 즉 66세인 사람의 평균 생존 년 수가 18.9년인 것을 감안하면 은퇴 후 20년 가까이 제2의 인생을 살게 된다. 은퇴는 우리에게 그 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선물한다. 특히 CEO들처럼 사회를 위해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에 놓여 있는 분들이라면 누구보다 이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다.
우선 정년 후에 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인지 미리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해야 한다. 글로벌 휴대전화 제조사를 이끌던 CEO는 은퇴 후 63세에 농사꾼으로 변신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은퇴 후 땅을 사서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내겠다고 마음 먹었다.
등산을 할 때마다 산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을 유심히 살폈고 틈틈이 농업 전문 서적을 읽었다. 그러다 식습관 변화와 쌀 소비량 감소로 어려움을 겪는 한국 농가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해결해야겠다는 사명의식이 생겼다. 이후 수년간의 연구 끝에 친환경 농법으로 생산한 쌀을 원료로 만든 쌀국수를 개발했다.
현역시절 CEO자리에 있으면서 쌓아온 전문지식과 기술을 은퇴 후 새로운 일자리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채 취업 전선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 강점을 잘 활용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도 젊은 사람들보다 유리하다.
얼마 전 은퇴설계 강의에 참석한 청중에게 노후에 병에 걸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열의 여덟은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세계보건기구는 우리나라 사람은 인생의 후반 10%를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보낸다고 발표했다.
특히 CEO 중에는 일에 매달리느라 평소 자신의 건강을 잘 돌보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따라서 갑작스럽게 몸에 이상이 생기거나 나이가 들어 어쩔 수 없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됐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 실제로 건강하지 못한 시기에 어디서 어떤 간병을 받으며 지낼 것인지는 노후생활의 질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럼에도 대부분 사람들이 인생 후반기에 찾아오는 간병기에 대한 대책이 허술하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에서 조사한 결과 3년의 간병기간에는 2000만~6000만원, 5년의 간병기간 동안에는 3000만~1억원 정도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안일하게 계획을 세웠다가는 거액의 의료비와 요양 경비가 필요한 간병기에 돈 문제로 곤란을 겪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을 이용하는데 쓰이는 장기 요양비는 생활비와 별도로 준비해야 한다.
요양비는 크게 3단계로 마련할 수 있다. 1단계로 연금상품을 활용해 본인 부담금과 간병비 등을 준비하고, 2단계로 건강보험을 통해 장기요양 비용을 마련할 수 있다. 마지막 3단계로 실손보험을 활용해 실제로 들어간 병원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여기에 남편보다 일반적으로 10년을 더 사는 부인의 간병기를 고려한다면 남편을 피보험자로 한 종신보험을 부인의 간병 비용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미국 메사추세츠 기술연구소와 영국 경제잡지 이코노미스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무려 70%가 재산상속에 실패한다고 한다. 부모의 자산 규모나 상속 계획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상속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속을 죽음과 연결 지어 생각하기 때문에 기분 나쁜 일로 여기고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상속이란 어렵게 쌓은 부를 지키면서 대대로 이어가기 위해 지금부터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할 과제다. 특히 CEO들은 미리 상속 계획을 세워둬야 자식 간의 재산 다툼이나 예상치 못한 세금·법률 문제로 고충을 겪지 않는다.
최근 미국에서는 재산뿐만 아니라 부모의 지식과 철학, 가치관까지도 물려주는 새로운 차원의 유산상속(Legacy Planning)이 유행한다. 가업을 승계하는 경우 단순히 재산이나 경영권을 물려주기에 앞서 경영철학을 전수하고 경영 역량을 높이는 후계자 교육이 함께 이뤄지는 방식이다.
또 상속을 두고 가족 회의를 하길 권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엔 내 아이들이 너무 커버리지 않았나’ 하고 걱정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부모와 자녀가 일 대 일의 대등한 관계로 서로의 인생관, 경제관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지금이 적기일 수 있다. 만약 이 과정이 낯설고 부담스럽다면 패밀리 오피스 등 전문 회사의 도움을 빌려 세대 간의 목표와 요구를 정리해나가는 방법도 있다.
글 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
[포브스코리아, 2012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