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보건방역체계의 선진국으로 꼽히던 한국이 졸지에 중동에 이은 최악의 메르스 진원지로 추락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된 이유는 엇인지, 메르스 급속확산의 4대 미스터리를 파헤쳐본다.
1. 삼성병원은 왜 '숙주'가 됐나
삼성병원에서 메르스 감염과 재감염이 반복된 환자 수는 80명으로 전체의 절반을 넘어섰다. 대부분은 14번 환자가 다녀간 응급실에서 접촉한 3차 감염자들이지만, 일반 외래 환자 2명도 메르스에 감염됐다. 환자를 이송한 구급차 운전자와 동승자도 감염돼 4차 감염까지 진행된 상태다.
삼성서울병원에서 국내 첫 메르스 환자를 확진했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지만, '슈퍼 전파자'인 14번 환자가 사흘간 머물면서는 최대의 메르스 진원지가 됐다. 전국에서 넷째로 많이 붐비는 삼성병원 응급실 환경은 '2m 이내에서 한 시간 접촉' 기준이 사실상 무의미해 메르스가 전파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삼성병원에 대한 보건당국의 비호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병원 측이 접촉자 수를 축소해 보고했거나 보건당국이 대상자를 줄였거나 둘 중 하나다. 35번 환자의 확진 일자는 6월 1일이지만, 질병관리본부는 2일과 3일 환자 집계에서 35번 환자를 누락시켰다. 병원 명단을 공개한 시점 역시 석연치 않다.
2. 공기 중 감염 가능성 배제 못해
보건 당국은 메르스의 '공기 중 감염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메르스 밀접접촉 기준은 '2m 이내에서 1시간 이상 접촉'으로, 메르스 환자의 입에서 나온 미세한 물방울인 비말에 섞여 가까이 있는 사람의 호흡기로 전염된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런 논리도 100% 신뢰하기 어렵다. 특히 삼성병원에서 감염된 확진자 2명은 응급실을 거치지 않고 일반 외래진료를 위해 방문했기 때문에 감염자와 직접 접촉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서울아산병원 청원경찰인 92번 환자가 6번 환자와 접촉한 시간도 10분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119번째 확진자인 평택 경찰관도 메르스 환자와 동선이 겹치지 않아 지역 감염이 의심되고 있다.
실험으로 예측한 평택성모병원 바이러스 확산 상황
메르스 민간합동대책반이 평택성모병원에 대한 역학조사를 벌인 결과 에어컨 필터에서 바이러스 조각이 검출됐다. 역학조사위원장인 최보율 교수는 "침 등의 비말이 오래 있으면 축적될 가능성이 높아 문을 열면 퍼져나갈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고 말헀다.
메르스 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발견한 이집트의 알리 모하메드 자키 박사도 공기 중 감염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낙타 헛간 안의 공기 중에서 상당량의 메르스 바이러스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보건 당국은 '병원 내 감염'의 입장을 고수해왔지만, 버스, 지하철 등 인구밀도가 높고 밀폐된 모든 장소의 환경은 병원과 비슷하다.
3. 위기경보 격상 안했나, 못했나
6월 7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등은 정부에 "위기경보단계 격상을 적극 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부정적 입장이다. 문형표 장관은 "지역사회보단 의료기관 내 감염이 100%로 나와 있기 때문에 '경계'로 격상하지 않았다"며 "현재 '주의' 단계이지만 실제 조치는 '경계'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경계 단계로 올라가면 거기에 따른 국가 이미지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위기 등급을 격상할 경우 외국에서 한국에 대한 여행 자제령을 발동할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한국에 대한 여행 자제령을 직·간접적으로 발령한 상황에서 경계경보를 발령하면 대외적 이미지 악화가 이뤄질 수 있다. 하지만 국가 이미지 등을 위해서는 단계를 올려 메르스 확산을 종결시키는 게 효과적일 수 있다.
또 "실제 조치는 경계"라는 점에서 한 야권 관계자는 정부가 초동 단계에서 메르스 사태를 진압했다고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게다가 등급 상향 조정 등은 정부의 대응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나마 가장 낮은 등급인 주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된다.
감염병 예방 책임기관인 질병관리본부의 미숙한 대응이 사태 확산의 요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정부의 '메르스 대응훈련'을 보면 중동지역 여행자가 메르스 의심환자로 발견될 경우 '주의'를 발령하고, 환자 가족과 의료진에 유사한 증상을 보이면 '경계' 발령을 내도록 했다. 전국적 유행단계(5개 시도, 39명 환자 발생)에는 '심각'을 발령토록 했지만 실제 정부의 대응은 이와는 다르다.
4. 사스는 잘 막았는데 이번엔 왜 실패했나
메르스와 사스는 둘 다 호흡기질환을 일으키는 코로나(CoV) 바이러스의 일종이며, 외국에서 발생한 신종 감염병이다. 사스가 유행했던 2003년, 정부의 발빠른 대응 덕분에 국내에서 확진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으면서 사스 예방 모범국가로 평가받았다.
당시 정부 대응을 살펴보면, 4월 사스 환자를 치료하던 홍콩 의사가 숨지고 국내 환자가 발생하기 전에 고건 당시 국무총리는 4월 23일 관계부처 차관들을 소집하고, 국립보건원에 사스방역대책본부를 가동했다. 25일에는 인천공항을 방문해 방역활동을 점검했다. 대규모 방역은 한 부처의 힘만으로 안 된다며, 상위부처인 국무조정실이 나서 관련 부처를 총동원하여 군 의료진이 공항 방역에 투입되기도 했다.
28일에는 고 총리가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다. 또한 민간 의료단체 대표들을 초청해 자문을 구하고 민간 협력체계를 확인했다. 고 총리는 상황실에서 하루 두 번씩 보고를 받으며 방역 활동을 직접 챙겼다. 그 결과, 세계에서 8천 명이 넘는 감염자가 발생하고 770명이 사망했지만 한국은 사스 청정국으로 주목 받았다.
현재 메르스에 대응하는 질병관리본부 구성원 대부분이 당시 사스 방역의 일선에 나섰던 경험자들이었음을 감안하면, 결국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컨트롤타워의 판단력과 의지로 모아진다. 박근혜 정부의 메르스 관련 주요 관계자들은 상황을 축소하고 위험성을 과소평가하기에 급급했다. 국민의 건강보다는 경제에 미칠 영향, 병원의 이미지 피해를 더 걱정하는 기색이 뚜렷했다.
국내 첫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5월 20일, 질병관리본부에서는 워크숍과 체육대회를 진행했다. 최경환 국무총리 직무대행은 그로부터 13일이 지난 후에야 긴급 관계부처 장관회의를 열었다. 전날 메르스 의심환자 중 첫 사망자가 발생한 뒤였다.
최 직무대행은 이날 오후 비행기를 타고 OECD 각료이사회 참석을 위해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가 컨트롤타워의 부재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아지자 귀국일을 하루 앞당기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행보 역시 한 걸음씩 늦었다. 처음 메르스를 언급한 건 첫 환자가 발생한 지 열흘도 넘은 1일 수석 비서관회의에서다. 환자 수도 잘못 알고 있었다.
감염병은 초기 소수의 환자를 집중 관리하면 확산을 막을 수 있지만, 임계점을 넘는 순간 확산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져 손을 쓸 수 없게 된다. 이는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들도 알 수 있는 상식적인 말이지만 지켜지지 않는 것이 이번 메르스 사태의 최대 미스터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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