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사매거진에서 30~40대의 젊은 CEO들을 만났다. 남들과 다른 길을 선택하고, 그 길에서 자신을 알린 이들이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은 돈이나 물건이 아니었다. 그들이 부모에게 받은 최고의 유산은 무엇일까?
▒ "가족과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겨라" - 나상균 죠스푸드 대표
나상균(40) 죠스푸드 대표는 아버지가 주신 최고의 유산으로 ‘정성’을 꼽는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엉터리 질문에도 언제나 정성껏 답을 해줬다. 그는 “내게 있는 음식에 대한 애정과 감각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매주 일요일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서울 곳곳의 맛집을 찾아다녔다. 마주치는 사소한 풍경의 의미를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해줬다. 과일가게 앞에서 빨간색 사과와 초록색 사과의 차이를 알려줬고, 건어물 가게 앞에서는 황태와 북어의 차이를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1998년, 그는 무작정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강아지에게 입힐 옷이 마땅치 않다는 점에 착안해 애완용품 무역을 시작했다. 장사는 잘 됐지만, 2년 후 “내가 이 일을 평생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밀려왔다. 2006년 말 문득 “요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뉴욕 CIA요리학교에서 정식으로 요리사 코스를 밟겠다고 결심하고,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려대 앞에서 죠스떡볶이 1호점을 열었다.
떡볶이 떡은 경동시장의 최고급 가래떡을 사용했고, 어묵은 부산에서 직접 공수해왔다. 오징어는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 낸 후 튀김옷을 입혔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나 전국 400개의 매장을 거느린 떡볶이 프랜차이즈 업체로 성장했다. 2013년 시작한 김밥 전문 프랜차이즈 ‘바르다 김선생’도 전국에 210개의 매장을 갖고 있다.
“샐러리맨이던 아버지는 주 6일 회사에 출근하는 바쁜 생활 중에도 일요일만큼은 가족과 함께하려고 노력하셨어요.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그리고 좋아하는 걸 이루기 위해 어떤 준비와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 "중심을 잃지마라" - 황희승 잡플래닛 대표
황희승(33) 잡플래닛 대표는 경제학과 교수인 아버지와 함께 독일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가 유학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던 건 어떤 순간에도 중심을 잃지 않는 아버지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오후 6~7시에 귀가해서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셨죠. 그런 다음에는 늘 서재에서 공부하다 잠자리에 드셨어요.”
미국 에모리대 재학 시절 방세 월 300달러(약 36만원)의 허름한 집에서 룸메이트 윤신근(잡플래닛 공동대표)씨와 같이 살았다. 차도 없어 장을 보려면 수km를 걸어야 했다. 집에 있을 때면 두 친구는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폈다. “만약 이런 걸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런 기술이 나오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까. 그런 이야기를 둘이서 밤새 나누곤 했죠.”
군대를 다녀온 두 사람은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2008년 나란히 학교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두번을 실패하고 세 번째 시도한 사업이 현재의 잡플래닛이다. 잡플래닛은 온라인 기업 정보 서비스다. 2014년 4월 서비스를 개시한 이후 1년 만에 2만7000개 기업에 대한 45만 건의 정보가 등록됐고 이용자는 300만 명을 넘어섰다.
교수인 아버지와 사업가인 아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사업 역시 중심을 잃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그는 아버지의 삶을 본받고 싶어한다.
“자기 기준이 없으면 남과 비교하게 되고 이룰 수 있는 꿈도 멀게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중심을 잡고 그 어떤 유혹이나 잡음에도 흔들리지 않으면 실패도 배움으로 이어지고, 다시 도전할 힘이 됩니다.”
▒"신은 내가 감당할 정도의 시련을 준다" - 신경철 태극당 전무이사
신경철(31) 태극당 전무이사는 창업주 신창근 회장의 손자다. 밥보다 빵을 더 많이 먹고 자란 신 전무는 자신이 ‘태극당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했다. 2013년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졌다. 카운터만 보던 그는 당황했다. “빵 이름말고는 아는 게 없었어요. 태극당 역사, 경영 철학, 단골손님에 대해 무지했죠. 이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뤄놓은 걸 발전시키기는커녕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닥쳐왔어요.”
한 달에 월급 30만원을 받으면서 1년 동안 하루도 안 쉬고 일했다. 직원들의 대소사와 애환을 알게 되면서 책임감이 생겼다. 많은 사람도 만났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단련돼 갔다.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거절 못하던 성격도 바뀌었다. 내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결정하기 힘든 일이 있으면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처음 일을 시작하던 때의 마음가짐 대로만 하면 된다’고만 하셨어요. 모든 걸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했죠.”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는 큰 잘못을 해도 스스로 깨닫고 뉘우칠 때까지 기다려주셨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배운 건 주어진 환경에서 투정부리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었다. “감당하기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면 ‘신은 내가 해결하고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시련만 준다’는 말을 되새겼어요."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 3대에 걸쳐 변하지 않는 가르침입니다. 지금도 공장에는 50년 넘게 일한 직원이 세 명이나 있죠. 사람 귀하게 여기고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으면 평생 함께할 사람들을 얻고, 사업도 오래갈 수 있다는 걸 내 아이에게도 전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