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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작가가 추천하는 여름휴가와 함께할 책 10선

“책은 청년에게는 양식, 노인에게는 오락, 부자에겐 지식, 고통스러운 사람에겐 위안이 된다.” -키케로

손꼽아 기다리는 이번 여름휴가에는 틈틈이 책 속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분주한 삶을 뒤로하고 이유 있는 나른함을 즐기는 시간. 한 줄의 문장과 한 편의 이야기가 대숲의 바람이 되고, 넓은 바다의 파도가 된다. 한국 문학계를 이끄는 10인의 작가가 올여름 휴가에 동행할 책 한 권을 소개한다.


01. 김별아 소설가 |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시


정본 백석 시집 백석 지음 |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 1만5000원


시시하지만 까다로운 내 취향에 들어맞는 한 권의 책은 주로 시집이다. 그중에서도 여태껏 가장 많이 동행한 것이 백석의 시집이다. 1935년부터 1948년까지, 그다지도 아팠던 시절을 통과한 그토록 아름다운 시들은 낱낱이 절창이다. 백석의 시는 여행의 시기가 어느 계절이든 여행의 장소가 어디든 함께하기에 맞춤이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가난한 나라에서는 헛된 오만을 눅이고 풍요한 나라에서는 오연한 자존을 높인다.


너무 많은 생각을 줄이고 지레 텅 빈 가슴을 채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있지만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해도 마냥 기쁠 책이다. 그는 특히 ‘흰 바람벽이 있어’를 사랑하여 이렇게 외곤 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올해 나는 어느 곳으로도 떠나지 않을 계획이지만, 백석의 시집과 함께 어디로든 유랑할 예정이다.


02. 김용택 시인 | 빈 배처럼 텅 비어 오라


빈 배처럼 텅 비어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8000원


이번 휴가 때는 그냥 아무 ‘짓’도 안하고 그냥 갔다 그냥 놀다가 그냥 오면 안 될까. 한번 그래보면 안 될까. 그 무엇도 도모하지 않고 그냥. 휴가란 놀러 가는 것 아닌가. 가는 파도에 무거운 몸과 마음을 실어 멀리 보냈다가 오는 올 때는 빈 배로 오라. 모두 받아들이고 모두 비운다. 세상에 자기 자신만한 책은 없다. 살다가 보면 자기가 어느 책보다 더 책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놀다가 문득, 정말로 심심하면 펼칠 시집 한 권을 권한다.


최승자 시인의 <빈 배처럼 텅 비어>(문학과 지성사) 시집은 일단 가볍다. 시들이 길지 않다. 15행을 넘은 시가 한 편인가 두 편인가 밖에 없다. 모두 7~8행 미만이다. 얼마나 좋은가. 이번 휴가지에서 모든 것을 다 비우고 빈 배처럼 산뜻하게 돌아 올 수 있는 책이다. 읽기 싫으면 한 두어 편 읽고 눈 감고 누워 있는 그대 곁에 이 책을 가만히 놓으라. 폼 날 것이다. 아! 우리가 언제 빈 배로 바다 위에 둥둥 떠서 집 앞에 서 보았던가.


03. 김홍신 소설가 | ‘끌어안기’의 관계학


날마다 웃는 집 법륜스님 지음 | 김영사 | 1만800원


우리는 각자가 나름대로의 기준을 갖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간다.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담을 쌓거나 가시를 곤두세워 다른 사람이 내 영역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선을 긋고 산다. 하지만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서로를 끌어안아야 한다. 그러나 섣불리 끌어안았다가는 서로의 가시에 찔려 상처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사에서 평탄한 삶은 매우 드물고 가정은 시끄러운 게 정상인지 모른다. <날마다 웃는 집>은 제목만 보면 인간사에 불가능한 주제라는 느낌이 들지만 책을 읽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날마다 웃는 집>을 읽고 수많은 고뇌와 부딪히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은 나보다 좀 더 일찍, 좀 더 지혜롭게 갈등을 딛고 뚜벅뚜벅 걸어갔으면 한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모든 사람들이 웃으며 살 수 있었으면 한다.)


04. 성석제 시인·소설가 | 맛있는 고민에 빠져보기



식탁 위의 세상 켈시 티머먼 지음 | 문희경 옮김 | 부키 | 1만6500원


음식에 관련된 담론은 일상에서 과잉이라 할 정도로 넘쳐난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음식에 관련된 것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음식은 예능이고 위안이고 중독과 마비의 기제로 대중을 지배한다. 관심에 비례해 지식과 정보도 늘어났지만 그게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책임질 수 있는 발언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상당부분 찾을 수 있다.


저자는 1979년 생으로 젊고 기운차며 의욕과 행동력이 뛰어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음식, 커피와 사과와 바나나와 초콜릿 같은 것들이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며 누구에게 기쁨과 고통과 이득을 안겨주는지 직접 현장에 찾아가 몸으로 부딪치며 탐색한다. 음식을 둘러싼 센세이셔널한 논란 자체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다. 적어도 내 아이나 가족, 부모와 친구들이 뭘 먹고 있는지 그게 어디서 온 것이고 누가 생산한 것인지 알려주고 선택하게 해준다.


05. 오은 시인 | 순순히 늙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시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김혜순 지음 | 이피 그림 | 문학동네 | 1만6800원


이 책에는 시이면서 산문인, 동시에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닌 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술술 읽히면서도 어느 순간 둔중한 것에 머리를 가격당한 느낌을 받는다. 가슴에 뭉근한 것이 차오르는가 하면 내일의 삶에 대해 찬찬히 곱씹고 있는 스스로를 목도하고 놀라기도 한다. 어쩌면 이 책은 삶에서 마주치는 무수한 문학적 순간들에 대한 책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어떤 식으로 삶을 관통해야 할지, 살면서 찾아오는 반짝이는 순간들을 어떻게 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는 순순히 늙을 수 없는 사람, 마음만은 늙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을 더 많이 발견하겠다고 작정한 사람, 지금 여기를 의심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책이다. 휴양지에서 돌아오기 전날 밤, 이 책의 문장들은 당신의 가슴에 한 줄 한 줄 새겨질 것이다. 당신은 이제 휴양을 마치고 여기로 돌아오지만, 여기는 그대로여도 당신은 이미 조금 달라져 있을 것이다.


06. 윤고은 소설가 | ‘낯선 기시감’으로의 일상탈출



뉴욕3부작 폴 오스터 지음 |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1만2800원


폴 오스터의 소설은 얼핏 보기에 소풍이나 낭만과는 영 어울리지 않고, 휴가의 동행으로 삼기엔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뉴욕3부작>에 담긴 세 편의 소설은 모두 일상의 사소한 균열에서 시작된다. 수록작 <유리의 도시>는 잘못 걸려온 전화 한 통이 등장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오류를 대하는 한 사람의 태도다. 그는 잘못 걸려온 전화를 제대로 걸려온 척, 능청스럽게 받으면서 기어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곧 급격한 미로에 빠지기 시작한다. 뉴욕이든 서울이든 집이든 휴가지든 지금 이 상황을 모두 낯설게 만들어버린다. 소설 속의 인물뿐 아니라, 그 책을 읽는 독자 역시 ‘낯선 기시감’이라는 이상한 기운에 사로잡혀, 일상과는 작별하게 된다.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휴가엔 좀 부담스럽고, 어쩌면 위험할 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한번은 동행하게 된다.


07. 정한용 시인 | 여행은 삶을 통해 죽음을 응시하는 과정이니…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1만5000원


단 한 권의 책을 고르는 일은 불가능하다. 세상엔 추천하고 싶은 책이 너무나 많으니까. 하지만 나는 기꺼이 줄리언 반스의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권하겠다. 아직 안 읽은 책이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을 누구에게라도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다. 이런 불확실한 확신은 그 책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줄리언 반스는 현존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불리는데, 나는 이게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안다.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부터 <10 ½장으로 쓴 세계역사>에 이르기까지, 풍자와 유머와 상상력을 얼마나 맛있게 요리하는지를 본 바가 있다. 더구나 최근에 나온 이 책은 나이가 든 작가가, 생의 미세한 틈에서 다큐식으로 죽음을 읽어낸다고 하니, 정말로 기대가 된다. 여행은 바로 삶을 통해 죽음을 응시하는 과정일 터이니.


08. 조용미 시인 |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내리는 비



비 마르탱 파주 지음 | 발레리해밀 그림 | 이상해 옮김 | 열림원 | 7500원


하늘이 무겁더니 드디어 세찬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다. 흙 냄새가 물씬 올라오고, 창가의 단풍나무는 흠뻑 젖어 나뭇잎들을 쫙 펼쳐 들고 비를 맞는다. 비가 오면 떠오르는 장소들이 있다. 그곳에 가서 빗소리를 들으면 비가 얼마나 감미롭고도 처연한 음악을 연주하는지 더욱 깊이 알 수 있다. 저 빗소리에 귀는 더욱 예민해지고 잊고 있었던 후각의 관능적인 감각도 살아날 것이다. 아뜩한 비 냄새.


휴가지에서 이런 비를 만난다면 마르탱 파주의 <비>를 펼쳐보면 좋겠다. 이 책은 빈 공간이 많고 얇고 가볍다. 비에 대한 전방위적인 사유가 섬세하고 감각적이고 달콤하게 펼쳐져 있다. 여름 휴양지에서 이보다 더 좋은 책이 있을까. 마르탱 파주의 <비>를 보고 놀랐다. 수년간 써온 비 혹은 나무에 대한 단상들을 모은 바로 이런 산문집을 나도 꿈꾸어왔기 때문이다. 마르탱 파주의 말처럼 오늘 저 “비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내린다.”


9. 한유주 소설가 | 어느 지중해 휴양지에 쏟아진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 윌리엄 트레버 지음 | 이선혜 옮김 | 현대문학 | 1만6000원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집은 누군가가 권한 책 중 하나였다. 현대문학에서 출간된 이 책의 제목은 <윌리엄 트레버>이고,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지중해의 어느 휴양지를 배경으로 하는 짧은 소설이었다. 그러나 결코 길지 않은 페이지들에 압축된 찰나의 시간이 세 인물의 삶 전체를 담고 있었다. 이는 영미권 단편 작가들의 특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트레버의 방식은 조금 달랐다. 직접 읽어보고 느껴보시라고 할 수밖에.


고백하자면 나는 이 단편집을 다 읽지 않았다. 하루에 한 편씩 읽고 있기 때문이지만, 아껴 읽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같은 책에 수록된 ‘탄생을 지켜보다’는 아마도 내가 지금껏 읽은 소설들 중 가장 이상하고 서늘하며 끔찍한 이야기에 속할 것이다. 남들처럼 여름에 휴가를 가지 않는 나로서는 이 책을 조금씩 읽으며 더운 계절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 단편집을 다 읽은 뒤에는 역시 같은 작가의 <비 온 뒤>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10. 함정임 소설가 | 인생이란 추억을 완성할 여행길



릴케의 프로방스 여행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 이리나 프로벤 엮음 황승환 옮김 | 문학판 | 1만4000원


<릴케의 프로방스 여행>에서는 보헤미아(체코) 출신으로 유럽의 국경들을 넘나들며 보헤미안으로 머물고 떠나기를 계속했던 릴케의 눈과 의식에 새겨진 남 프랑스의 풍경들이 편지 형식으로 전달된다. 편지의 수신자들은 릴케의 영원한 연인, 러시아계 독일 여성 작가 루 살로메를 비롯 스위스의 건축가, 독일의 출판업자, 오스트리아의 여가수, 폴란드의 귀족 부인 등 다양한 국적의 연인, 예술가 및 후원자들이다.


이 책은 앞으로 프로방스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여행자들에게는 실용적인 동선(動線) 안내를 겸하면서, 폐허조차도 아름다운 프로방스 자연의 본질에 대한 사유와 고독이 서정적이면서도 명징하게 펼쳐진다. 그동안 전투하듯 일상을 치르면서 떠남을 감행했던 여행자들에게는 추억의 쉼터로, 반대로 피할 수 없는 도의적 사정과 현실적 의무에 발이 묶여 누군가의 발자취로 간접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는 독서 여행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