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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속, 주인을 잘못 고른 탁월한 신하들

탁월하지만 주인을 잘못 골라 불운의 생을 마감한 인재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진궁이다. 신하는 자신의 역량보다 자신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주인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첫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신하는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잘 활용해야한다. 오늘 그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경영에 관한 교훈을 얻어보자.

조조

진궁은 ‘잘못된 만남’과 연이은 ‘잘못된 선택’으로 어긋나는 인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진궁은 유가적 선비의 가치를 추구하려고 애쓰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가치를 배반하는 조조를 만나 인생이 꼬인다. 그 인연을 회피하기 위해 어리석은 여포를 선택하고, 그 잘못된 선택에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그가 도달하는 곳은 나락이다.


진궁은 머리는 모자라고 미련하면서도 잘난 척하는 스타일리스트 여포를 모시고도 계략으로 수차 조조를 곤경에 빠뜨리는 등 탁월한 재능이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끝없이 조조와 엮이어 돌아가면서 그 꼬인 인연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삼국지』의 수많은 등장인물 중 가장 안타까운 사람을 꼽으라면, 필자는 진궁을 그 첫 번째로 꼽는다.


▒ 『삼국지』등장인물 중 가장 안타까운 사람


진궁

소설에서는 조조가 동탁을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고향으로 달아나던 중 중모현 현령으로 있던 진궁을 처음 만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때 조조는 동탁에 의해 수배 중이었고, 관문에서 잡혀와 진궁 앞으로 끌려온다. 진궁은 이내 조조를 알아보고, 한밤중에 감옥에 갇힌 조조를 찾아가 그를 풀어주고 벼슬을 버리고 함께 도망친다. 한실(漢室)의 녹을 먹고 사는 신하로써 조조의 충의에 감복해 함께 달아나 역적 동탁을 도모하겠다는 것이었다.


진궁은 애당초 이렇게 선비적 충의와 도덕성을 신봉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함께 도망치다 성고라는 마을에 도착해 조조는 자신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은 여백사의 집에서 묵어가자고 청한다. 진궁은 기꺼이 따라가고, 여백사의 환대를 받으며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칼을 가는 소리가 들린다. 쫓기던 신분인지라 그들은 이것이 자신들을 잡으려는 계략이라고 생각하고 여백사의 가족들을 모두 죽인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들에게 대접하기 위해 돼지를 잡으려고 칼을 갈았던 것이다.


조조와 진궁은 도망친다. 그런데 저쪽에서 여백사가 술을 받아서 느릿느릿 오고 있다. 이때 조조는 여백사마저도 베어버린다. 이 모습을 본 진궁은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며 조조를 버리고 떠나버린다. 이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다.


정사에서는 이 부분이 기록돼 있지 않고, 진궁이 조조의 수하였으나 그를 배신하고 여포에게 연주를 바친 것으로만 기록돼 있다. 어쨌든 동군 출신인 그는 나중에 동군 태수로 왔던 조조와 함께 연주로 들어갔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조조를 주군으로 섬겼지만 결국은 조조를 버린다. 그러나 진궁은 단순한 기회주의적 배신자는 아니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관점에서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주군을 스스로 버린 것이다.


당시 조조는 자기 아버지가 서주에서 죽임을 당하자 서주로 분노의 진군을 한다. 소설에는 서주목 도겸의 부하로 황건적 출신인 장개라는 자가 재물을 노려 일가족을 살해한 것으로 나오고, 정사 삼국지 위서 무제전에는 도겸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나온다. 어쨌든 조조는 서주의 여러 성을 깨부수면서 백성들을 도륙하고, 시체가 쌓여 물의 흐름이 막혔다고 할 정도의 살육을 벌인다. 이 정도의 살육전이 감행됐으므로, 위나라를 정통으로 하는 정사에서 도겸의 신하가 죽였다고는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소설에 따르면 이때 진궁은 조조에게 달려가서 말한다.


“저는 그 사건이 단지 황건적 출신인 장개 혼자 저지른 일인지, 도겸의 사주를 받고 저지른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 그 죄는 어쨌건 개인이 저지른 것이지 백성들은 무관합니다. 백성들은 장군의 원수가 아니오니 부디 백성을 상하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의인이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이 무렵의 조조는 무도했다. 진군하는 길에 무덤을 파헤쳐 부장물을 모두 탈취하고 서주의 것은 풀 한 포기까지 베어버렸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니 조조가 진궁의 말을 들을 리 없다. 설득에 실패한 진궁은 조조의 군영을 나와 그대로 진류 태수 장막에게로 가서 그곳에 와서 의탁하던 여포에게 연주를 바친다. 자신과 이상이 맞지 않는 주군을 버리고, 새 주군을 앉힌 것이다.


▒ 주군 조조를 버리고 여포를 맞이했으나


사실 주군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신하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게 떠나거나 참거나 아니면 반역을 해서 그 자리를 빼앗는 것 정도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진궁은 옛 주군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는 방법을 택한다. 이는 담력이 큰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이다. 실제로 안의 신하는 밖의 적과 내통하여 언제든 주군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 그래서 신하는 충성을 다하고, 주군은 신하에게 예의를 다하여야 한다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주군도 신하의 목을 쥐고 있지만 신하 역시 주군의 명운을 쥐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진궁의 배반으로 연주 내 다른 10여 개 고을이 호응하여 대번에 여포는 연주를 차지한다. 다만 조조의 모사 순욱과 정욱이 지키던 견성·범현·동아 등 세 고을만 조조 진영으로 남았을 뿐이다. 서주 출병으로 인해 조조는 연주를 잃어버리고 이를 찾을 때까지 2년이나 걸린다.


하지만 진궁이 새로 맞은 주군은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여포는 이름만으로는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다. 후한 말, 천하에 적수가 없다는 최고의 무장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명마인 적토를 타고 다녔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두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고, 말에는 적토가 있다(人中呂布 馬中赤兎)”라고 했을 정도로 탁월하고 유명했다.


그런데 원래 유명한 인물들 중에 알고 보면 허당이 많다. 여포는 무장으로서의 탁월한 능력 하나 빼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인간적으로는 잘생기고 화려하고 귀여운 구석도 있었지만, 리더로서는 젬병이었다. 제 기분대로 구는 자기중심적인 유아적 면모가 강했고, 신의가 없고, 배신을 밥 먹듯 하고, 지혜는 모자라고, 귀는 얇았다.


그야말로 진궁 하나 잘 만나서 연주까지 챙기는 행운을 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진궁의 가치를 잘 몰랐다. 그리고 믿을 구석이라고는 없는 자기 자신을 너무 믿었다.


연주를 빼앗은 초기에 진궁은 태산(泰山)에 매복하여 조조의 군대를 끊고, 연주성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여포에게 간한다. 그러나 워낙 출중한 여포는 이 말을 무시하고, 복양으로 들어간다. 서주에서 급히 돌아온 조조는 이 모습에 이렇게 말한다.


“여포는 하루아침에 연주를 얻었다. 그러나 동평을 근거로 항부와 태산의 길을 끊고 요충지를 이용하여 우리를 공격하지 않고 복양에 들어앉아 있으니,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겠노라.”


조조는 한마디로 ‘이런 미련한 여포 같으니라고!’하며 무시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곁엔 진궁이 있었다. 여포는 진궁의 계책에 따르며 몇 번을 이기고, 조조는 불 속에서 죽을 고비까지 넘긴다. 더구나 여포 밑에는 장요와 장패와 같은 탁월한 무장들이 있었다.


그러다 극심한 가뭄에 장수들이 식량을 구하러 밖으로 나갔을 때, 조조가 복양으로 쳐들어간다. 진궁은 장수들이 돌아온 뒤에 대적하고 일단 굳게 지키자며 말린다. 그러나 잘난 여포는 이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며 대적하러 나갔다가 패하고 만다. 이후의 몇 차례의 전투에서도 여포는 죽어라 하고 진궁이 간하는 것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하다 결국 패하고, 연주 일대는 다시 조조의 손으로 넘어간다.


진궁은 여포가 달아나자 여포의 가족들을 모두 챙겨 여포를 쫓아가고, 결국 서주의 유비에게로 이끌고 가서 의탁한다. 그리고 유비가 조조의 계략으로 원술을 치러간 사이 여포는 서주를 접수한다. 주객의 자리를 바꿔버리는 것이다.


진궁


▒ 리더로서는 젬병인 팔랑귀 여포의 패착


진궁은 조조를 주군으로 섬겼지만 결국은 조조를 버린다. 자신의 도덕적 관점에서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주군을 스스로 버린 것이다. 왼쪽은 중국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조조. 오른쪽은 주군 조조를 버리는 진궁.

진궁은 조조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여포와 원술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판단한다. 원술도 여포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아들과 여포의 외동딸을 혼인시켜 진진지의(秦晉之誼·혼인으로 맺어진 가까운 사이)를 맺자고 청한다. 진궁은 다른 방해세력들이 나타나기 전에 빨리 딸을 원술에게로 보내라고 간하고, 여포는 이 말을 받아들여 딸을 보내려고 한다.


이때 원래 서주 사람으로 여포의 부하로 있으면서 뒤로는 유비를 섬기고 조조의 염탐꾼 노릇을 하는 진규와 진등 부자가 여포에게 농간을 부리자 팔랑귀인 여포는 딸을 도로 데려온다. 사실 조조와 유비가 가장 두려워하는 시나리오는 원술과 여포가 힘을 합치는 것이었다. 이들이 힘을 합쳤다면 중원의 판도는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여포는 이렇게 자기 기회를 발로 차버리고, 진궁의 말보다 박쥐같은 진규의 말만 믿다가 결국 조조와 유비의 공략을 받는다. 진궁은 진규와 진등 부자의 속셈을 꿰뚫고 여포에게 간하지만 여포는 오히려 진궁이 질투하고 있다며 야단을 친다. 그리고 결국은 진등에게 속아 서주와 소패 등을 다 빼앗기고, 하비로 도망쳐 들어간다.


조조가 하비성을 공격한다. 이때 진궁이 여포에게 말한다.


“조조의 군사는 먼 길을 오느라 지쳐 있어 오래 지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성 밖에 군영을 세우십시오. 저는 나머지 군사와 성을 지키겠습니다. 만약 조조가 장군을 공격하면 제가 반드시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그 배후를 칠 것이고, 반대로 조조의 군사가 성을 공격해오면 장군께서 그 뒤를 치십시오. 열흘도 못 가서 조조의 군중에 양식이 떨어질 것이니, 그때를 기다려 휘몰아친다면 단번에 깨뜨릴 수 있습니다. 이같이 앞뒤에서 몰아치는 기각지세(掎角之勢)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포는 이 말을 듣지 않고 지키기로 한다. 하비에는 양식이 풍부했고, 지키기에 좋은 성이었다. 게으른 여포는 고립무원의 성에서 고립을 자초한다. 이후에도 진궁은 몇 차례에 걸쳐 계책을 올린다. 그러나 진궁의 계책은 채택되지 않는다.


그리고 끝내 수하 장수들인 후성·송헌·위속 등이 배반함으로써 여포는 생포되고, 하비성은 함락된다. 주군이 잡힌 마당이니 진궁도 무사할 수 없다. 진궁은 다시 조조 앞에 선다. 다음은 조조와 진궁 사이의 대화다.


“진공대! 그대가 나를 버리고 가더니 예서 이런 꼴로 만나는구려. 기분이 어떤가?”


진궁은 태연하게 대답한다.


“내가 너를 버린 것은 네 마음이 바르지 않았기 때문이며, 예서 이리 만난 것은 내 운이 다했기 때문이다.”


“내가 바르지 못했다면서 너는 여포 같은 자를 섬겼단 말이냐?”


“여포는 비록 지혜는 없고 단순하나 너처럼 간사하고 음험하지 않다.”


“너의 지혜와 재주로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주군을 잘 못 택한 것이 아니냐?”


“나는 꾀를 낼 뿐, 채택하여 실행하는 것은 주군이다. 만약 내 말대로만 했더라면 이리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으니 어찌하겠는가.”


회유


▒ 조조의 회유를 거절하고 참형을 자청하다


진궁은 ‘신하의 처세’에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진궁은 주군을 능력과 힘으로 판단한 게 아니라 선악(善惡)의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주군을 버렸다. 여기서부터 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조조는 진궁에게 살려주겠노라고 회유한다. 그러나 진궁은 이를 거절하고 스스로 참형을 자청하여 목숨을 잃는다. 조조는 진궁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고, 그의 노모와 자식들을 거두어 잘 보살펴준다.


진궁은 조조와의 악연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만한 인재가 아니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진궁은 ‘신하의 처세’에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진궁의 말은 마지막 순간 조조에게 “내가 너를 버린 것은 네 마음이 바르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이다. 그는 주군을 능력과 힘으로 판단한 게 아니라 선악(善惡)의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했다. 여기서부터 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주군 또는 상사에 대한 도덕적이고 감정적 환멸과 혐오감 때문에 자신을 파괴하는 길로 몰아넣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자리를 내던지고 혐오하는 상사와 작별을 고하면서 말한다.


“그는 옳지 않기에 나는 그런 자와 함께 일할 수 없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옳고 그름은 하늘이 판단하는 문제이지 신하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나의 도덕적 가치를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조직 생활을 위태롭게 하는 행동은 없다. 그 도덕적 문제가 비리나 사리사욕으로 조직을 위태롭게 하는 문제라면 물론 대항해야 한다. 그건 조직을 위태롭게 하고 궁극적으로 나의 실리를 해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라 개인적인 호오와 신념의 문제라면 상관해선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른데, 어느 누가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부합할 수 있겠는가?


또 대개 이렇게 조직에서 도덕 운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시각이 편협하여 섣부르고 어설픈 정의감에 불타는 경우가 많다. 정의감만큼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없다.


주군과 신하의 관계에선 서로 맞는지 맞지 않은지, 조직에(궁극적으로는 나를 포함한 조직원들) 이익이 되는지 되지 않는지, 그가 조직을 번영시킬 힘과 능력이 있는지만 가리면 된다. 조조처럼 능력 있는 리더라면 자신과 성향이 맞지 않더라도 자신이 그 상황을 통제하고, 대략 잘 맞추어가며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상황을 만들어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가 주군을 미워할 뿐, 주군이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게 승산이 있다. 그러므로 감정을 잘 숨기고 실리를 챙기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주군이 나를 미워해 역 시너지를 내면 그때는 눈에 안 띄는 게 좋다. 이때 되도록 쿨하게 헤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미움받았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을 눈치 채게 해서도 안 되고, 내가 주군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해서도 안 된다. 헤어지되 충분한 감사의 인사를 하고 나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능력 있는 주군이나 상사에겐 그들이 힘이 빠져 죽는 순간까지 발톱을 보여선 안 된다.’


▒ 분노가 눈앞을 가리면 잘못된 선택을 하게된다


조직 인간관계에선 감정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최상이다.


사실 조직에서 주군의 경우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의 실리와 직결되므로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옳든 그르든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가 악한 인간이라면 하느님이 알아서 벌을 주실 것이다. 상대에게 감정을 갖게 되면, 그런 감정이 전이된다. 나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다 증오와 환멸의 단계에 이르면 분노하게 되고, 복수를 꿈꾸게 된다. 그런데 이럴 경우 그 칼날은 바로 자신의 목을 노리는 경우가 많다.


조직에서 살아남고 승리하기 위해선 남을 미워하는 데 쏟을 만한 에너지와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을 미워하는 데 에너지를 분산하는 사이 자신의 목표를 향해 에너지를 집중한 적은 저만큼 앞서 나간다.


‘세상에 조조처럼 옳지 않은 놈, 악인은 저렇게 잘 나가는데, 선량하게 살고자 노력했던 내가 패배하다니. 이렇게 불공평할 데가~’


진궁은 이렇게 한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직에서의 성패는 착하게 살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목표에 얼마나 집중하고 성과를 냈느냐에 따라 갈린다.


또 분노가 눈앞을 가리면 잇따라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진궁이 조조에 대한 혐오감으로 여포를 선택한 것처럼…. 진궁이 연주가 비어 있는 사이 조조를 몰아내려는 조급한 마음만 먹지 않았다면 똑똑한 그에게 여포의 못미더운 구석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러면 여포를 새 주군으로 선택해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선택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주군은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전(前) 주군에 대한 환멸과 복수심을 가슴에 품은 채 다른 주군을 찾는 것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아버리고 자신을 속이며 행동에서 오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신하는 주군과 같은 조직 목표를 가지고 함께 힘을 합쳐 추구할 뿐이다. 주군이 조직 목표에 충실하지 않을 때,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서 조직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을 때는 죽기 살기로 바로 잡거나 아니면 그의 곁을 떠나야 한다. 조직의 목표를 잃으면 다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선(善)하게 살라고 강권하고, 이를 따르지 않는다고 원망해서는 안 된다.


이건 내 말만이 아니다. 마키아벨리 선생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문제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는 실태를 허술히 보아 넘긴다면 자기를 보존하기는커녕 눈 깜짝할 새에 파멸을 초래하게 된다”며 “무슨 일에서나 선(善)을 내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좋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파멸을 면치 못한다”(제15장)고 했다.


주군을 지옥 불에서 구하고 천당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지 말라. 그건 신하의 의무가 아니다. 또 주군과 천당에서 같이 만나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