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공허감 달래주는 소꿉친구들이죠” 가파르게 상승하는 키덜트 시장, 경제 규모가 1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현실에 염증 느끼는 ‘애어른’들의 레트로형 취미는 디지털 시대의 새 문화현상으로 평가됩니다. 키덜트 문화에 대해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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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침체 속에서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는 ‘핫 아이템’이 있다. ‘어른장난감’ 시장이다. 레고·건담로봇 같은 조립형 완구와 만화영화 캐릭터, 드론을 즐기는 30~40대 ‘키덜트’족이 소비 주체다. 키덜트는 어린이를 뜻하는 ‘키드(Kid)’와 어른인 ‘어덜트(Adult)’의 합성어다. 우리말로 치면 ‘애어른’쯤 될까. 아이들 같은 감성과 취향을 가진 어른을 뜻하는 신조어다. 이들은 날로 각박해지는 현실 속 삶에 염증을 느껴 어린 시절의 향수를 좇는다. 장난감을 조립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정서적 안정을 찾는다. “밥은 굶어도 정신적 허기를 달래기 위해 주머니를 연다”는 키덜트들은 팍팍해진 디지털 시대의 문화현상이기도 하다.
레고 스튜디오, '브릭팜'
레고 마니아인 유병탁(43) 씨는 경기도 고양시 장항동의 공장형 오피스빌딩에 ‘브릭팜’이라는 레고 스튜디오를 운영한다. 월 100만원에 창고를 임대해 레고 동호인을 위한 공간으로 꾸몄다. 사무실 한편의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삼나무 장식장에는 레고 완성품을 보관한다. 이 장식장을 동호인들에게 임대해 월세의 일부를 충당한다.
유씨는 매주 수요일이면 동호인들과 함께 레고를 조립한다. ‘혼자 하면 취미지만 여럿이 모이면 문화가 된다’는 것이 유씨의 지론이다. 마침 30~40대 동호인 4명이 모여 레고 열차를 조립하고 있었다. 이들은 레일을 깔고 장난감 열차를 운행하며 페이스북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방송까지 했다.
“주변 눈치 안 보고 맘껏 레고를 조립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씨가 스튜디오를 연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다. 조립한 레고는 팔지도, 빌려주지도 않는다. 오직 함께 즐기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이들은 조립이 끝난 장난감 열차가 레일 위를 달리자 함박웃음을 짓는다. 중년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건담카페
‘건담’은 일본 만화영화의 주인공 로봇 이름이다. 1979년 일본 TV아사히 전파를 타며 폭발적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건담은 수많은 연작과 외전을 만들며 로봇 애니매이션의 신화가 됐다. 조립형 완구인 ‘건프라(건담 프라모델)’로 등장하면서 키덜트 시장의 대명사가 됐다. 특히 한국에서는 YG엔터테인먼트 양현석 대표를 비롯한 연예인들이 건프라 마니아로 알려지면서 가장 잘 팔리는 어른장난감이 됐다.
건담 프라모델이 인기를 끌면서 ‘건담카페’까지 등장했다. ‘CODE-G’라는 이름의 건담카페는 2014년 성남 1호점, 2016년 김포 2호점에 이어 가맹점을 늘려나갈 계획이다. 이 회사 강경민(36) 대표는 한때 건담 수집·조립 전문가로 활동했다. 강씨는 “가족이 모여 건담문화를 즐길 수 있는 복합공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카페를 창업했다”고 말했다. 카페에서는 정기적으로 건담 조립대회를 연다.
카페 내부 곳곳에는 유리 장식장에 건담 로봇이 예술품처럼 전시돼 있다. 커피·차 등 식·음료는 물론 건담 프라모델을 판매한다. 편하게 조립할 수 있는 작업공간도 마련돼 있다. 성남점에서는 프라모델에 도색까지 할 수 있도록 내부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갔다. 건담 로봇은 조립품 형태로 판매된다. 전문적으로 로봇을 조립하고 도색하는 이들을 ‘건담아티스트’라고 부른다.
크리디미미
키덜트시장은 남성고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일러문’, ‘웨딩피치’ 등 소녀 감성의 일본 만화영화 캐릭터 상품은 20~30대 여성이 주 고객이다. 이들은 만화영화 주인공의 인형과 장신구·옷·보석함·요술봉 등도 수집한다. 서울 홍익대 부근에 있는 ‘크리미디디’는 여성 키덜트들이 즐겨 찾는 캐릭터 전문점이다. 1990년생인 서다현 씨가 남자친구 홍도현 씨와 함께 창업했다.
“어린 시절 일본 애니매이션을 보고 자랐어요. 그때는 형편이 어려워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살 수 없었죠. 취업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난 뒤 캐릭터 상품을 하나둘씩 모으다가 결국 창업을 결심하게 됐어요.”
서씨는 일본 만화영화 캐릭터 제품 수집을 위해 일본을 자주 찾는다. 자신의 가게에서 파는 상품은 장난감이 아니라 재산가치가 있는 성인들의 ‘수집품’이라고 말했다.
“‘웨딩피치’ 천사의 보석함은 일본에서 1996년에 나왔어요. 당시 6만원 정도 했지만 지금은 250만원이 넘습니다.”
‘키덜트 열풍’에 유통업계도 발빠르게 대응한다. 신세계 이마트는 2015년부터 키덜트 전문매장인 ‘일렉트로마트’를 판교·하남스타필드·대구신세계백화점 등 전국 10곳에 열었다. 매장에 들어서면 ‘일렉트로맨’ 캐릭터가 망토를 날리며 서 있다. 기둥과 벽면도 온통 만화영화 캐릭터로 장식돼 있다. 마치 영화관에 온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숍인숍(Shop in shop)’ 형태인 이곳에는 남성고객을 타깃으로 하는 가전제품과 드론, 영화 캐릭터 인형, 건담 매장이 들어서 있다.
롯데마트는 토이저러스 매장에 ‘키덜트존’을 마련하고 그 수를 늘려 나가고 있다. ‘키덜트존’은 건담·스타워즈 등 인기 캐릭터 상품을 모은 ‘피규어존’과 드론, 무선조종 자동차 등을 모은 ‘드론/RC존’으로 구성된다. 다양한 체험공간도 마련돼 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전문가들은 키덜트 시장 규모를 1조원 안팎으로 추정한다. 판매량이 매년 가파른 상승세를 보인다. 옥션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키덜트 제품시장은 67% 성장했으며, 대표 상품인 피규어는 158%, 드론과 RC 상품은 160%, 건담 프라모델은 71%가 늘었다.
키덜트, 더 이상 유치하고 애 같다고 비하할 취미가 아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문화 컨텐츠의 주축을 차지하고 있고 국내 해외 할 것 없이 매니아층이 두터우며, 디자인부터 관련 산업까지 즐길거리가 많다. 다양한 키덜트의 세계, 함께 빠져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