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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대항해시대 인도양 무역거점, 인도 '디우(Diu)'섬

인도 디우(Diu)섬은 대항해시대 포루투갈이 점령했다가 1961년 인도령으로 반환된 섬이다. 450여년 긴 세월동안 인도양 무역거점으로 번영을 누렸던 곳... 지금은 옛 성당과 성채들만이 포루트갈 색깔을 고스란히 담은 채 남아았다.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함께 대항해시대 양대 열강이었다. 그런 포르투갈이 인도양에 영향을 투사할 교두보로 키워온 섬이 바로 디우 섬이다. 때문에 1961년 인도공화국의 디우 수복은 제국들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기도 했다.

 

디우 섬의 중앙광장. 회색 속살이 군데군데 드러난 기념탑과 폐점한 지 오래된 이슬람 상점들이 눈에 띈다. 식민제국의 영화는 간데 없고 좌판을 깔고 소매하는 상인들만 남았다.

 

인도 서부 구자라트주 아마다바드(Ahmadabad)에서 비행기를 타고 뭄바이 공항을 거쳐 다시 에어인디아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로 갈아탔다. 육로로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이내 디우(Diu) 섬이 보인다. 물안개 속에 가늘고 긴 섬이 형체를 드러낸다. 섬 북단이 긴 다리로 구자라트 본토와 연결돼 있다. 섬은 긴 모래톱으로 형성됐다. 왼쪽으로 아라비아 해의 거친 파도가 포말을 일구면서 모래톱에서 으깨진다. 오른쪽으로는 연이어지는 소금밭이다. 디우는 구자라트 본토를 마주보는 동서 11, 남북 3의 디우 섬과 본토의 2개 지구로 이뤄져 있다.

 

 

구자라트에 면한 섬 북부는 습지와 염전으로 가득하며 남부해안은 석회암 절벽과 동굴, 모래사장이 있다. 섬사람들은 어업·관광업·술과 소금판매 등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대추야자 나무가 듬성듬성 서있는 가운데 핑크빛, 연초록빛 따위의 파스텔톤 살림집이 예쁘게 서있다. 인도 같지가 않다. 포르투갈에서 익히 보았던 색깔들이 섬을 인도와는 분리된 이질적인 곳으로 만들어낸다. 디우 공항 자체가 연분홍빛이다. 디우는 인도-포르투갈(Indo-Portuguese) 건축술의 현장이기도 하다.

 

켐베이 만 길목 양쪽에 포진한 디우

 

힌두식으로 붉게 칠해진 가운데 가톨릭 조각이 새겨져 있는 잠빠문의 모습. 섬 문명다운 자유분방한 기풍을 대변하는 듯하다.

 

영국령 인도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포르투갈령 인도가 1961년까지 지속됐다는 사실은 조금 놀랍게 다가온다. 중국 대륙에 마카오가 있었다면, 인도 대륙에는 디우와 다만(Daman), 고아(Goa) 세 도시가 있었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인도상륙 이래로 포르투갈은 450여 년의 세월 동안 인도 해안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었다.

 

디우는 다만, 고아와 더불어 1961년 포르투갈에서 간신히벗어나서 인도령으로 편입됐다. 인도 군대가 무력으로 수복했다. 포르투갈은 1974년까지 이곳의 인도 합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식민제국의 집착이 그만큼 강했다. 포르투갈 지배기에 다만과 디우는 고아 주에 속했지만, 지금은 다만과 디우 연방직할지(Union Territory of Daman & Diu)’로 독립했다. 연방직할지는 주()에 상당하는 행정자치권을 가진다.

 

포르투갈은 유독 디우와 다만에 집착했다. 두 요새가 켐베이 만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켐베이 만 안쪽에는 인도 직물공업의 오랜 중심지였던 수라트(Surat)과 아마다바드가 있었다. 포르투갈은 켐베이 만 양쪽에 식민도시를 포진시키고 자체 무역기지이자 군사적 요새로 키워냈다. 역사적으로도 아라비아해 인도양의 무역로에 중요한 항구였다.

 

포르투갈은 1531년 이 섬을 손에 넣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535년 구자라트 술탄 바하두르(Bahadur)와 무굴 황제 후마윤(Humayun) 사이의 싸움을 틈타 마침내 이 섬을 장악했다. 포르투갈과 무굴족의 압박에 지친 바하두르는 포르투갈에게 디우를 주면서 평화협정을 맺는다. 그러나 협정은 곧 무시됐고 바하두르의 강력한 이의제기에도 불구하고 디우섬과 본토의 일부가 포르투갈에게 넘어갔다. 이후 한 세기 동안 디우는 포르투갈의 중요한 무역중심지이자 해군기지로 기능했다.

 

17세기 차세대 해양강국인 네덜란드와 영국이 등장하면서 디우는 전략적 가치를 잃어갔다. 그러나 포르투갈에는 아니었다. 1961년 인도로 편입될 때까지 빈약한 무역으로 고립된 포르투갈에 디우는 소중한 인도양 전초기지였다. 덕분에 인도의 다른 포르투갈 식민지와 달리 포르투갈 식민도시 계획을 원래의 특성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멈춰버린 포르투갈의 시계

 

육중한 성벽에서 디우 섬의 전략적인 가치를 가늠할 수 있다. 바닷물이 흐르는 해자를 사이에 두고 보이는 포르투갈 요새.

 

도심으로 들어가는 잠빠문(Zampa Gateway)은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져 힌두 느낌이 난다. 사자·천사·성직자 조각이 문 위에 올라있으며 이들도 모두 붉은색을 뒤집어쓴 상태다. 문 바로 안쪽에는 1702년에 만들어진 성상이 있는 자그마한 예배당이 있다. 흰색 타일을 붙이고 파랑·노랑·빨강 등 화사한 타일기둥을 세운 특이한 구조다. 성당 바로 옆에 술집이 붙어있는 풍경도 인상적이다. 술을 공개적으로 금지하는 힌두사회에서 디우 섬은 그만큼 알코올 문화에 너그럽다는 반증일 것이다.

 

골목에는 어김없이 소들이 어슬렁거린다. 소 등이 혹부리처럼 튀어나왔다. 거리는 빈곤 그 자체다. 곳곳에서 손을 내미는 아낙이나 소녀들을 만나게 된다. 물이 귀한 섬인 데다가 수도 시설이 불비해 머리에 물동이를 얹은 여인들을 자주 만난다. 곳곳에 힌두사원이 즐비하다. 잠빠문 안쪽의 골목이 대체로 원주민이 모여 사는 동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빠문을 벗어난 외곽에는 이슬람 공동묘지도 있다.

 

바닷가의 포르투갈 요새로 이어지는 포트로드(Fort road)가 시작되는 지점에 섰다. 1906년 포르투갈 정부가 건립한 기념문이 바다를 향하고 있다. 200여 평 되는 중심광장에는 백색의 기념탑이 하나 서 있고 이슬람풍 건축의 상가가 둘러싸고 있다. 상점 안에는 소소한 옷가지, 신발 등을 팔고 있다. 광장에 면한 남루한 2층집들은 레스토랑과 호텔로 쓰이는데 영업을 멈춘 지 오래다. 시간이 멈추어진 광장. 포르투갈이 철수한 1961년 이래로 시간은 그 정도에서 멈췄다. ‘호텔 모잠비크 바란 간판이 보인다. 모잠비크 호텔에 머물던 포르투갈인이 테킬라 한잔을 마셨을 것 같은 그런 간판이 아직도 남아 있다.

 

시장의 낮은 담벼락은 각색 타일로 장식돼 있는데, 문득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타일벽이 떠오른다. 타일벽은 해변도로로 길게 이어진다. 이층집으로 된 허름한 레스토랑 몇 개가 해변을 바라보며 손님을 끈다. ‘PORTUGUESE FOOD PLAZA’란 간판에서 멈춘 시계지만 여전히 째깍거림을 느낀다. 꽃나무로 치장된 순교기념공원 건너편에 관광센터 건물이 있다. 마당에 오래된 포르투갈 대포가 예쁜 은빛으로 포장돼 있다. 경찰서 마당에도 포문을 가져다 놨는데 포신을 빨갛게 칠해놓았다. 여기 사람들은 무기를 장난감이나 예술품으로 만드는 데 소질이 있다.

 

도심건물들의 색채가 현란하다. 디우 시내는 낡아빠질 데로 낡았지만 전형적인 유럽 도심과 비슷하다. 미로 같은 좁은 골목과 밝은 색 건물이 도심을 채운다. 빤지와띠(Panchwati)에서는 나가르 세트 하벨리(Nagar Sheth Haveli) 같은 멋스런 건물도 볼 수 있다. 대체로 초록·파랑·빨강·노랑 등을 과감하게 원색 그대로 노출시켰다. 단아한 집들은 은은한 파스텔 톤의 하늘색에 짙은 블루라인을 넣어서 침착하게 포르투갈의 색조를 재현하고 있다. 디우고등중학교로 무작정 들어갔더니 학교건물 역시 특유의 블루라인으로 청량감을 더해준다.

 

1가량 떨어진 작은 암초 위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교도소를 지었다. ‘포르띰 도 마르(For-tim-de-Mar)’는 바다 위에 있는 배 모양 건물이다. 건물 바깥으로 나가면 그대로 바다인지라 탈출이 불가능하다. 제국의 통치에는 감옥이 필수다. 감옥의 크기가 손바닥만한 것으로 미뤄 크나큼 반란과 투옥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는 등대를 세워서 뱃길 안내를 맡고 있으며 해안에서는 이따금 관광선이 한 바퀴 돌고 간다.

 

알폰스 드 알부르크의 최후

 

성문 근처에는 포르투갈 시인 보카주(Manuel Bocage)가 살던 18세기 저택도 남아 있다. 디우 성채에 등대가 올라있는 것처럼 모띠에도 등대가 자리 잡았다. 정상에서 보면 건너편에 다만 시가지가 굽어 보이고 강 하구에 선착장이 있어 배들이 번잡하게 오간다. 1603년에 건립된 봄지저스 대성당(Church of Bom Jesus)은 장중하면서도 화려한 문, 정교한 실내장식 덕분에 인도의 이베리아로 불리기도 한다. 화려한 문과 기둥장식을 둘러싸고 겹으로 건축물을 축조해 독특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봄 성당에서 바라보자면 바로 건너편에 나니 다만(Nani Daman) 요새가 자리 잡고 있다. 강 하구의 양 어귀에 성을 배치해 협공하는 형식이다. 나니 다만의 성문은 매우 독특하다. 아치형 문루 위에 가톨릭 성상이 좌정하는데 문 좌우에 벽사신장(壁邪神將) 같은 장군 두 명을 독특하게 배치했다.

 

1535년 알폰스 드 알부르크(Alfonso de albuerque)28척의 선단을 이끌고 인도에 처음 무혈입성했다. 427년 뒤인 1961년 같은 이름의 포르투갈 함선이 인도함선과 조우했다. 인도 공군기까지 동원된 전투에서 포르투갈은 패퇴했고, 마침내 디우는 인도령으로 되돌아갔다. 제국이 무너지는 세기적 사건이 켐베이 만 길목의 디우 섬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로부터 훨씬 뒤인 1999, 마카오 중국반환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공식적으로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