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영토분쟁이 다시금 국제사회의 떠오르는 문제가 되고 있다. 서로 맞닿아 있는 두 국가의 영토 분쟁은 그간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지만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은 채 참사를 불러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국경이 닿아 있는 나라 간의 분쟁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영토분쟁이다. 현재 가자지구를 피로 물들이고 있는 갈등이 그러하고 지난 2012년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 열도)분쟁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갈등이 그러했다.
“한 뼘의 땅도 넘보지 못하게 하겠다.”,“단 한 뼘의 영토도 양보할 수 없다.”각각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 열도)분쟁을 둘러싼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의 발언과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인 칼레드 메샬 하마스 지도자의 말이다. 이 두 사람의 발언은 서로 다른 것을 향하고 있지만 언뜻 바꿔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바로‘한 뼘의 땅’이란 비유다.
인류가 벌인 참혹한 전쟁의 역사도 한 뼘의 땅을 서로 차지하려던 작은 분쟁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이처럼 영토 수호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다지거나, 국토의 소중함을 일깨울 때 쓰는 관용구인 ‘한 뼘의 영토’가 실제로 존재한다. 한반도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중국 지린(吉林)성의 조선족자치주에 그런 곳이 있다.
지린성 훈춘(琿春)시 중심가에서 차를 대절해 40~50분쯤 달리면, 도로를 중심으로 왼쪽은 러시아, 오른쪽은 북한 땅으로 국경이 나누어진다. 좁은 도로의 양쪽으로는 철조망이 쳐져 있다. 왼쪽 철조망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선이었다. 아무런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함부로 넘나들 수 없는 국경선임에는 틀림이 없다.
오른쪽 철조망 너머로 덤불이 우거진 강기슭에는 두만강 푸른 물이 굽이져 흐른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두만강의 물길은 북한과 중국의 영토를 가르며 동쪽으로 흘러간다. 북·중 국경선은 두만강의 중심을 따라 그어졌지만 그건 지도상의 표시일 뿐, 실제로는 강변에 쳐진 철조망이 국경선 노릇을 하고 있었다. 북·중·러 세 나라 접경지대의 국경선 모양은 이처럼 기묘했다. 양쪽 철조망 사이에 뚫린 한 뼘의 도로, 정확하게는 폭 8m가량의 도로가 러시아와 북한 영토 사이에 뾰족하게 삐져나온 채 “여기는 중국 땅”이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한 뼘의 땅’은 줄잡아 1㎞가량 계속 이어졌다. 차량 두 대가 겨우 지나칠 수 있을 만한 이 포장도로는 1983년에 개통된 것이라고 했다. 이 도로가 생기기 전에 두만강 물이 범람하는 여름철엔 통행이 불가능했던 곳이다. 인근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러시아 땅으로 우회해 다녔다고 한다.
자동차를 계속 달리니 국경선이 이 도로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중국 영토가 한 뼘의 도로에서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막힌 곳이 나타난다. 그곳이 바로 중국과 러시아, 북한 세 나라의 영토가 만나는 꼭지점이다. 하지만 실제론 3국의 접점에 다다르기 전에 사람과 차량통행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 중국 쪽에서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는 한계점엔 ‘토자비(土字牌)’가 세워져 있다. 흙토(土) 자를 새겨 그렇게 불린다는 토자비 부근에는 중국 국경경비대의 막사와 초소가 있고, 2012년에 완공된 62m 높이의 육중한 전망대 룽후커(龍虎閣)가 강변에 우뚝 서있다.
전망대에 올라가 보니 두만강을 가로질러 북한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철교인 조러친선대교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생전인 2011년 러시아를 방문할 때 이 다리를 건넜다. 이 전망대에 올라서면 날씨가 좋은 날엔 두만강 물이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까지 육안으로 보인다고 한다.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전망대에서 동해까지의 거리는 20㎞ 남짓이다. 중국 쪽에서 바라볼 때 조러친선대교는 북한-중국-러시아 세 나라의 영토가 맞닿은 3국 접점을 지난 곳에 있다. 다시 말해 북한과 러시아 영토 사이로 뾰족하게 파고든 중국 영토가 이 다리에 못 미친 지점에서 끝난다는 의미다.
두만강은 발원지에서부터 줄곧 북한과 중국 사이의 국경선역할을 하다 동해로 흘러들기 15㎞ 전부터 북한과 러시아와의 국경선으로 바뀐다. 중국 입장에선, 자국 영토가 동해를 지척에 두고 더 뻗어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동해로 나가는 길이 봉쇄돼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넓은 땅덩어리를 품은 중국이지만 한 뼘은커녕 단 1㎜조차도 동해와 접하는 곳이 없다. 그러니 중국땅에서 동해로 나아가는 건 러시아나 북한 땅을 거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두만강 하구는 입지조건으로 볼 때 대단한 요충지라 할 수 있다.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방, 러시아 연해주가 맞닿아 있는 곳으로 한국의 부산과는 750㎞, 일본 니가타(新潟)와는 850㎞ 거리에 있다. 중국이 말하는 출해권(出海權)은 바로 이 두만강 하구를 통해 동해로, 더 나아가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권리를 말한다.
이 출해권이야말로 중국이 오래도록 갈망해온 꿈이다. 시진핑(習近平) 주석 체제가 출범한 이후, ‘중국의 꿈(中國夢)’이 새로운 정치구호로 등장했다. 중국의 꿈이 구체적으로 뭘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설명된 바는 없지만, 중국이 화려했던 과거의 영화를 회복하고 세계질서의 중심 국가로 우뚝 서는 것이라고 국제사회는 이해하고 있다.
중국의 동해 진출이 성사되면, 몽골-극동 러시아-중국 동북지방-한반도-일본으로 이어지는 환동해 경제권이 출현하고, 중국은 그 중심국가로 부상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동해를 통한 출해권은 중국의 꿈을 실현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관건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중국의 출해권을 가로막는 현재의 국경선은 언제 그어진 것일까? 중국은 애초부터 동해와 인연이 없었던 것일까? 중국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중국 역사학계의 보고에 따르면 당나라 때에는 이 일대를 통한 중국과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으며, 두만강 하구에서 동해를 건너 일본을 오간 출항기록이 여러 차례 있다. 19세기 이전에는 연해주까지 중국 영토 혹은 활동 영역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직접 동해로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출해권 ‘획득’이 아닌 출해권‘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과거에 누렸던 출해권을 상실한 계기를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와 연관짓고 있다.
중국의 출해권 회복에 대한 갈망을 실물로 보여주는 증거물을 현장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훈춘에서 국경지대인 팡촨으로 들어서 차를 달리다 보면 토자비 약간 못 미치는 곳의 도로변 언덕에 거대한 석상이 서 있다. 석상의 주인공은 청나라말기의 관리 우다청이다. 하단에는“한 뼘의 국토에도 온 마음을 쏟는다(一寸國土盡寸心)”는 뜻의 글귀가 쓰인 팻말이 있다. 이 석상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시기, 한 때나마 중국이 출해권을 누리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우다청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19세기 중반의 청나라는 말 그대로 이빨 빠진 사자였다. 쇠할 대로 쇠한 청나라는 자신의 영토를 지킬 힘조차 없었다. 서구 열강은 이 빠진 사자가 지배하던 강토를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했다. 제정 러시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1858년 러시아는 제2차 아편전쟁에 휘말린 청나라에 불평등 조약인 아이훈(愛琿) 조약 체결을 강요해 성사시켰다. 이 조약에 따라 청은 헤이룽장(黑龍江) 이북의 60만㎢를 러시아에 내줬다.
우수리강 동쪽에서 동해 연안에 이르는 연해주 지역도 러시아와 청의 공동관리 아래 놓이게 됐다. 러시아는 2년 뒤인 1860년 청과 베이징조약을 맺어, 그때까지 공동관리구역이던 연해주 40만㎢를 독차지했다. 당시 연해주에는 조선인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었지만 조선 정부는 국경선을 새로 긋는 이 조약에서 배제됐다. 그 이후 청과 러시아는 국경선을 명확하게 표시하기 위해 연해주 일대 8곳에 경계비를 세웠다.
그중 가장 동쪽에 있는 게 바로 토자비다. 이로써 청나라의 영토는 동해로 나가는 출구를 상실하고 말았다.
우다청이 등장하는 시기는 베이징 조약으로부터 26년이 지난 1886년이다. 러시아와의 감계(勘界)협상 대표로 임명된 그는 토자비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우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체결된 문서가 바로 훈춘동계약(琿春東界約)이다. 그리하여 중국의 영토가 10리 더 동쪽으로 뻗어가게 됐다.
출해권에 관한 조항은 이 조약 본문이 아닌 부건(附件)에 명기됐다. 우다청은 중국 선박이 두만강을 통해 동해까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두만강 하구가 러시아의 관할이긴 하지만, 중국 선박이 러시아의 방해를 받지 않고 통항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해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 낸 것이다. 이로써 중국은 두만강을 거쳐 동해로 나아가는 출해권을 확보하게 됐다.
석상 주변에 있는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훈춘동계약으로 헤이딩즈(黑頂子)를 되찾고 두만강 항해권을 쟁취했다. 이는 아편전쟁 이후 중국 영토가 손상을 받지 않고 오히려 잃었던 땅을 수복한 유일한 사례다. 이는 모두 우다청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우다청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지만 실은 한반도와도 인연이 깊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청군 500명을 이끌고 조선에 부임해 온 적이 있고 1894년 청일전쟁 때에도 압록강변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는 서예와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작품과 저술을 남겼다.
아무튼 우다청의 노력으로 중국은 자유롭게 동해로 드나들 수 있었다. 1929년의 기록에 따르면 훈춘의 두만강변 부두를 통해 연간 1500척의 배가 동해로 나가 각 항구를 왕래했다. 멀게는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상하이(上海)까지 기선이 왕래했다. 어민들은 동해로 나가 어로활동을 했다. 1910년 두만강 변에 건설된 훈춘항은 어항과 무역항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중국의 동해 출해권은 우다청의 담판 이후 50여 년만인 1938년에 완전히 차단된다. 장고봉(張鼓峰)사건이라 불리는 소련과 일본 간의 국경분쟁에 따른 결과였다. 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지 않을 만큼 잊혀진 사건이지만, 양국 군인 2만2천 명이 참전했고 5500여 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1938년 당시의 훈춘은 스탈린이 통치하던 소련과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 그리고 일제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국경을 접하는 곳이었다. 앞서 말한 우다청 석상과 토자비의 중간쯤에 있는 장고봉은 해발 155m에 지나지 않는 야트막한 야산이지만, 정상에서 보면 하산 일대와 포시에트만의 해군기지, 한·만 국경철도와 두만강 너머 한반도까지 관측할 수 있어 군사적으로 요긴한 곳이었다.
한반도를 강점한 뒤 연해주 침략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1938년 7월 31일 자정을 기해 함북 경흥군에 있던 조선 주둔 일본군 19사단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장고봉을 향해 포격을 퍼부으며 진격해 작전 개시 세 시간 만에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이후 일본은 막대한 희생과 출혈을 감내해야 했다. 반격에 나선 소련의 원동방면군은 탱크 250대와 전투기 250대를 동원해 일본군의 후방을 차단하고 장고봉을 점령한 일본군을 고립시켰다. 소련군은 장고봉은 물론 두만강 건너의 나진·경흥·아오지까지 융단폭격을 가했다. 파상 공세를 견디다 못한 일본은 결국 장고봉에서 물러났다. 전투 개시 13일 만에 일본과 소련은 장고봉을 가르는 능선을 만주국과 소련의 국경선으로 정하는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지금도 장고봉은 중국과 러시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장고봉 바로 아래 도로변에 있는 기념관에 가면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물들을 볼 수 있다. 이 기념관은 장고봉 일대에서 발견된 탄환과 폭탄 파편 등을 류충즈(劉叢志) 관장 개인이 수집해 2005년에 세운 것이다. 기념관 벽면을 가득 메운 당시 사진을 보면, 전투로 인해 피난을 가거나 소개되는 주민들이 모두 한복 차림이어서 두만강을 건너온 한인들이 이 마을을 개척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고봉이란 지명 역시 우리 전통악기 장구를 닮았다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장고봉 사건은 소련과 일본이 벌인 전투이지만, 그 결과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나라는 중국이다. 장고봉 사건 이후 러시아와 일본이 군사 안보상의 이유로 그때까지 허용되던 중국 선박의 동해 통항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북한과 러시아가 두만강 하구를 차지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우다청 담판 이후 50여 년간 누렸던 중국의 출해권이 장고봉 사건 이후 76년째 봉쇄 상태에 있는 것이다. 장고봉 기념관 앞에 있는 큼직한 돌비석에 ‘開邊通海’(개변통해: 변경을 개척해 바다로 나아간다)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중국인들이 왜 장고봉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사재를 털어 기념관을 연 류 관장은 “학생은 물론 성인들에게도 애국심을 길러주는 교육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있다”고 말했다.
그 사이 중국이 두만강을 통해 동해 바다로 나간 일이 한차례 있었다. 1990년 5월 중국 정부는 당시 소련의 양해와 북한의 묵인 아래 평촨에서 과학탐사선을 띄워 두만강을 따라 동해로 나아가는 시운항을 했다. 탐사선 출항의 목적은 두만강 통항이 정식으로 재개될 경우에 대비한 지질 자료를 축적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성대한 출해(出海) 행사를 개최했다.
하지만 두만강을 통한 출해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하류를 가로지르는 조러친선대교의 교각이 높이 9m 이상의 대형선박 통행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두만강 하류 지역은 퇴적물이 많아 강의 수심도 얕다. 이 때문에 설령 두만강 통항이 재개된다 해도, 운항이 가능한 배는 50~300t급으로 제한돼 그 효과는 미미할 수밖에 없다. 1920년대 훈춘항이 무역항으로 번성했을 때와는 전혀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나온 중국의 대안이 바로 ‘차항출해(借港出海)’ 전략이다. 굳이 그 옛날처럼 훈춘에 항구를 건설하지 않고도 인접한 북한이나 러시아의 항구를 빌려 동해로 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이는 1990년대부터 논의가 무성한 두만강 하구 개발구상과도 맞물려 있다.
중국은 본격적으로 항구를 빌리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물 중의 하나가 러시아의 자루비노 항구다. 훈춘에서 육로로 연결되는 자루비노를 사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2000년대에 훈춘-자루비노-속초간 육해상 복합항로가 개통됐다.
하지만 중국이 훨씬 더 공을 들이는항구는 북한의 나진항이다. 자연 조건이나 입지 조건 등 항구로서의 경쟁력이 월등하기 때문이다. 나진항은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의 접안이 가능하고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훈춘에서 나진항까지 육로로 이동한 뒤 동해로 나가면 동북아의 중심 항구인 부산을 비롯,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급속히 개발되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일본의 니가타항까지 뱃길을 열 수 있다.
3국 접경지점인 팡촨에서 훈춘 시내 쪽으로 나오는 길목인 취안허(圈河)는 바로 이 차항출해 전략이 실천되고 있는 현장이다. 취안허 세관 앞 광장에 가보니 북한 쪽에서 화물을 싣고 넘어온 트럭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린성 번호판을 단 이 차량들에는 ‘??해운’이란 소속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바다와 접하지 못한 내륙지방인 지린성을 거점으로 한 해운회사가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은 뭘 의미하는가. 그건 바로 중국이 이미 나진항을 활용하는 단계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된다.
지린성 출신의 한 사업가가 들려준 이야기는 보다 더 구체적이다. “동북지방에서 석탄을 캐 상하이의 기업에 파는 데 예전에는 멀리 랴오닝성 다롄(大連)까지 육로로 실어 나른 뒤 배로 운송했다. 그런데 지금은 나진항을 통해 상하이로 보낸다. 형식적으로는 석탄을 북한에 수출하고, 북한은 다시 이를 상하이의 중국 기업에 수출하는 방식이다. 중간에 수수료가 발생해도 물류 비용이 적게 들다 보니 상하이의 구매자가 지불하는 가격은 더 내려갔다. 물론 운송 시간도 단축됐다.”
중국은 50년 동안 나진항 1호부두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 나아가 새로이 개발중인 5호부두와 6호부두의 사용권을 따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중국은 나진항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인프라 구축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3국 접경지점인 팡촨에서 훈춘 시내 쪽으로 나오는 길목인 취안허(圈河)에 있는 원정대교는 차항출해 전략의 산물이다. 중국은 취안허와 두만강 건너 북한의 원정리를 잇는 이 다리를 새로 놓고, 원정리에서 나진항으로 이어지는 종래의 비포장도로 53㎞의 확장과 포장공사를 최근 마무리했다. 북한 땅의 인프라 공사를 중국이 대신해준 것이다. 이에 따라 취안허 세관에서 40분이면 나진 항구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됐다. 이와 별도로 나진항으로 이어지는 철도와 고속도로 건설도 추진 중이다.
자국의 항구가 아닌 나진항을 빌려 중국 동북지방의 거점 항구로 삼으려는 전략은 2009년 발표된 ‘창지투 개발계획’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는 창춘(長春)과 지린(吉林), 투먼(圖門)으로 이어지는 산업 벨트를 구축해 동부 연안지방과 서부 대개발에 이은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삼는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또 훈춘지역에는 2016년까지 대규모의 동북아 변경무역센터를 건설키로 했다. 러시아 연해주, 나아가 한국과 일본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경제권역을 창출하고 여기서 중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이다. 이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름하는 관건의 하나가 바로 나진항의 안정적 활용이다. 때문에 창지투 개발계획은 북한의 나진-선봉 경제특구 개발계획과 연계되어 진행될 수밖에 없다. 중국과 북한은 2011년 6월 압록강 하구의 황금평 특구 착공식과 함께 훈춘-나선 간의 경제협력 착공식을 거행한 데 이어 지난해 11월 나진-선봉특구에 ‘조·중공동관리위원회’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당시 중국 언론은 “나진이 북한의 선천(深?)이 될 것”이란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사정이 중국의 뜻대로만 돌아가는 건 아니다. 중국의 나진항 활용은 원대한 구상에 비하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한 채 아직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중국 국내외의 공통된 평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협력 파트너가 북한이란 점에서 비롯되는 한계가 있다.
북한은 여전히 대외 개방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정하지 못한 상태인데다 중국의 대북 경제 진출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개방 경제로 나가 발전의 길에 들어선 중국의 동북3성이나 러시아의 연해주와 달리, 북한의 개방은 요원하고 더디기만 하다. 더구나 나선 특구개발을 비롯, 중국과의 협력을 주도해온 장성택이 처형된 이후 가뜩이나 더딘 진행속도에 또다시 브레이크가 걸린 형국이다.
자유무역항 개발과 함께 군사적 목적 우려도 북한의 핵개발에서 비롯된 지역 정세불안도 근본적인 제약요건이다. 핵개발·미사일 문제 등으로 인해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경제적 압박이 가해지고 있는 상황을 무시하고 중국이 나진항과 나선 특구 개발을 위해 대규모 자금을 쏟아붓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두만강을 사이에 둔 북중 간의 경제협력이 한때 반짝 활기를 띠다가도 북한 핵실험 등의 변수가 터지면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가버리곤 한 것을 여러 차례 경험해왔다.
중국의 동해 출해권은 상실-회복-상실의 굴곡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동해를 향한 출구를 획득하기 위한 중국의 전략이 꾸준하게 추진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나진 지역을 여러 차례 방문한 중국의 한 학자는 “바깥에서 보면 정세 변화에 따라 부침이 심한 것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저변에 깔린 중국의 기본방침에는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이 아편전쟁으로 잃은 홍콩을 100년 넘게 걸려 되찾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중국의 차항출해 전략이 두만강 하구 개발계획과 맞물려 작동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전문가들의 예측은 두 가지 방향으로 엇갈린다. 그중 하나의 빛깔은 찬란한 장밋빛이다. 한국, 일본과 동북3성, 연해주를 잇는 두만강 경제권이 탄생하고, 주변 국가들이 협력하며 골고루 혜택을 누리는 청사진이다.
김관웅 옌벤대 교수는 “두만강 항구를 자유무역항으로 개발하면 아시아의 홍콩, 싱가포르나 유럽의 암스테르담 못지 않은 항구가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두만강 하구는 황금의 삼각지대로 번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반도의 북동쪽 끝을 흐르는 두만강 하구에서, 남북한 혹은 통일 한국과 중국·러시아·일본 등의 역내 국가들이 자유롭게 교역하며 서로 번영을 구가하는 것은, 말처럼 쉽게 이뤄지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될 꿈이요 이상임에 틀림이 없다.
또 다른 예측은 더욱 현실적인 전망이지만 훨씬 어두운 빛깔이다. 두만강 하구 개발의 혜택을 중국이 독점하거나 배타적으로 누리는 구도다. 그렇게 되면 주변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긴장 요인이 된다. 중국의 동북 진흥계획과 북한의 나선 특구 개발이 연계 추진되고 중국 자본이 투입됨으로써 북한의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더 높아지면,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도 함께 커질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나진항은 군사적으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장기 사용권을 가진 중국이 한반도 유사시에 북한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려 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동해 진출전략을 바라보는 시선이 편치만은 않은 이유다.
동해 진출은 중국의 꿈이다. 그 꿈의 실현은 우리에겐 새로운 도전이 될 수 있다. G2로 부상한 중국이 한반도와 외부세계를 이어주는 통로인 동해로 진입해 들어오면 이 바다를 둘러싼 지형도와 기상도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