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소를 통한 가상화폐 거래를 금지하는 법안을 준비 중이다.”
박상기(65) 법무부 장관의 말 한마디가 몰고 온 파장은 상상 이상이었다. 1월 11일 오전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박 장관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의 발언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가상화폐’란 용어도 정확하지 않다. ‘가상 증표(證票)’ 정도로 부르는 게 정확하지 않나 생각한다”는 부연이 뒤따랐다. ‘크립토 커런시(crypto currency)’, 암호화된 통화(화폐)로 번역 통용되는 가상통화를 ‘실체 없는 딱지’로 규정한 것이다.
정부 내 ‘가상통화 관계기관 합동 태스크포스(TF)’의 주관부처인 법무부 장관의 인식이란 점에서 파급력이 남달랐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정부 발표에 따라 시장이 요동친 적은 있었지만 거래소 폐쇄란 극약 처방을 공식화한 것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crypto currency)는 일제히 폭락했다. 박 장관의 발언으로 한때 암호화폐 시가총액의 100조원이 증발했다. 암호화폐 거래소의 지분을 가진 코스닥 상장기업들도 가격 제한폭(-30%)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런 와중에도 “지금이 매수 적기”라며 ‘이삭줍기’에 나선 이들도 있다. 불과 하루 만에 대부분의 암호화폐 시세가 회복되면서 결과적으로 폭락장에 매수한 이들은 하락폭 수준의 이익을 봤다. 투기를 잡겠다던 장관의 말 한마디에 투기세력만 이익을 본 셈이 됐다. “정부가 시세 조종 세력의 몸통”이란 비아냥이 나온 이유다.
시장의 불만은 청와대로 향했다. 지난해 12월 28일에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온 ‘가상화폐 규제 반대’ 국민청원은 박 장관의 발언 이후 서명자가 급증했다. 1월 16일 현재 20만3000여 명이 참여했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올라온 암호화폐 관련 청원은 5138건에 달한다. 대부분 박 장관의 발언에 대한 반발이다.
청와대는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방침에 따라 20만 명 이상 추천한 청원에 대해 정부와 청와대 관계자가 직접 답변을 해왔다. 청원기간을 2주가량 앞두고 20만 명을 돌파하자 정부는 생각보다 여론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국무총리실은 1월 15일 내놓은 가상통화 정부 입장에서 “거래소 폐쇄는 장기 대책이며, 투자는 자기 책임”이라고 톤을 누그러뜨렸다. 다만 가상통화 실명제를 계속 진행하고, 시세조작·자금세탁·탈세 등 불법 행위는 엄단하겠다고 했다. 거래소 폐쇄는 앞으로 범정부 차원에서 충분한 협의와 의견 조율을 거쳐 결정하겠다고 유보했다. 박 장관의 신념에 찬 발언이 정부로선 ‘설화(舌禍)’로 돌아온 셈이 됐다.
‘다단계 수사의 달인’ 법무부 정책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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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암호화폐 시장 과열에 대응하기 시작한 건 지난해 7월부터다. 9월 초에는 가상통화 합동 TF를 꾸렸다. 국무조정실·기획재정부·법무부·금융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방송통신위원회·국세청·경찰청이 참여했다. 처음에는 금융위원회가 TF를 주관했다. TF는 첫 회의에서 암호화폐 거래 실명제를 도입하고, 유사수신이나 다단계 사기 등 불법행위를 단속한다는 방침을 내놨다.
정부의 규체 대책이 나오자 암호화폐 시장은 오히려 상승했다. 암호화폐의 제도권 편입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 탓이다. 정부 발표 직전 450만원 선이던 비트코인 가격은 발표 직후 5%가량 올랐다.
계속되는 정부의 경고 사인에도 불구하고 시장 과열이 계속됐다. 비트코인 가격은 한때 1비트코인 당 2500만원 대까지 치솟았다. 11월 28~29일 이낙연 국무총리와 금융위원회가 ‘유사수신행위 등 규제법’을 개정해 암호화폐 거래소를 유사수신업체를 유사수신업체로 규정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자 다시 한 번 비트코인 가격은 20% 가까이 급등했다. 국내 시세는 한때 달러 기준 해외 거래소 시세보다 최고 50%대까지 웃돈이 붙었다. 이른바 ‘김치 프리미엄’이다.
‘시장 달래기’가 통하지 않자 정부는 날 선 칼을 빼 들었다. 칼자루를 쥔 이는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아니라 박 법무부 장관이었다. 정부의 암호화폐 정책 기조는 이때부터 강경 모드로 선회했다. 합법적인 틀 안에서 개인의 자율적 거래를 허용하던 것에서 ‘암호화폐 거래는 도박’이란 원칙이 만들어진 게 이때부터다. TF 안에서 가장 극단적인 강경론에 있던 부처가 법무부였다.
그 이유는 법무부와 검찰의 본질에서 찾을 수 있다. 법무부와 검찰은 법치(法治)를 수호하는 게 기본 임무다. 이들이 사회 현상의 적부(適否)을 따지는 기준은 법률이다. 제아무리 혁신적인 기술도 법률가 입장에선 법적 근거가 없거나 현행법에 저촉된다면 불법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새로운 기술이나 사회 현상의 가치와 미래성을 평가하는 건 법무부의 업무 영역이 아니다.
게다가 법학자 출신인 박 장관은 형사법에 조예가 깊다. 한국형사정책학회와 형사법학회 회장,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을 지냈다. ‘불법행위는 처벌한다’는 형법의 대전제에 누구보다 익숙하다. 그가 암호화폐를 가상통화도 아닌 ‘가상 증표’라고 평가절하한 데에는 이런 법률가적 사고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DJ정부 ‘카드대란’, 참여정부 ‘바다이야기’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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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의 강력한 규제 방침을 지지하는 여론도 상당하다. 암호화폐 시장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거품(버블)이란 것이다. 현 정부의 강경한 입장이 과거 진보 정권 때 불어닥친 투기열풍에 대한 초동대응 실패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첫 번째 트라우마는 김대중 정부의 ‘신용카드 대란’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신용카드 규제를 크게 완화했다. 1999년 5월에는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한도를 폐지했고, 이듬해에는 신용카드 영수증 복권제도를 시행했다.
점유율 경쟁에 나선 신용카드사들은 개인 신용도를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카드를 발급했다. 1990년 1000만 장이었던 신용카드 수는 2002년 1억 장을 돌파했다. 경제활동인구 1명 당 4.6장 꼴이었다. 신용카드 사용액도 1998년 63조6000억원에서 2002년 622조9000억 원으로 10배 가까이 급등했다.
하지만 2002년부터 연체율이 급등하기 시작해 1년 만에 연체율 14%를 기록했고, 개인 파산이 줄이었다. 2004년에는 361만 명의 신용불량자가 양산됐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부가 규제를 강화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2002년 증시는 40% 하락했고, 신용등급 강등으로 카드사의 부실이 가속화했다. 외환은행의 경우 카드사 부실이 론스타 매각의 원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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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노무현 정부 때의 ‘바다이야기 사태’다. 2004년에 출시된 사행성 게임기 바다이야기는 파친코 게임과 유사한 중독성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상품권을 환전소에서 현금화할 수 있어서 도박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정부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은 뒤였다. 2006년 재산을 탕진하고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하면서 정부는 이를 불법화해 대대적인 단속에 나섰다.
“주가 조작한다고 주식 시장 문 닫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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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화폐 관련 업계와 전문가들도 일정 수준의 규제 필요성에 공감한다. 투기심리 과열로 인한 부정적 여론이 기술 발전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17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형주(56) 한국블록체인산업진흥협회 이사장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암호화폐 투기에 대한 정부의 제어는 필요하다”면서 “다만 전 세계가 연결돼 있어 자칫 무분별한 규제가 이뤄지면 국내 기업에 역차별로 작용해 글로벌사들이 블록체인 기술 수요를 다 먹어버릴 수 있다”고 말했다.그럼에도 정부가 섣불리 규제 위주 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대한 문제 인식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특히 “블록체인 기술과 암호화폐는 다르다”는 박 장관과 정부 관계자들의 시각에 IT 업계 관계자는 “블록체인 기술을 전혀 모르는 소리”라며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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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암호화폐인 비트코인은 원조라는 상징성과 인지도 때문에 암호화폐계의 기축통화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 대형 암호화폐 거래소의 한 관계자는 “비트코인의 가치 상승은 총량이 2100만 개로 한정된 희소성과 채굴 난이도 상승에 따른 채굴비용의 증가 때문이다. 일부 시세조종이 없지 않지만 이는 작전세력이 개입할 때의 일시적인 현상일 뿐 지속적인 상승 기조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또 다른 거래소 관계자는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리플 등 메이저 코인의 경우 거래 규모가 워낙 커서 어지간한 자금력으로는 시세를 조작하는 게 불가능하다. 마이너 코인의 경우는 종종 시세조작 등 부정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주가를 조종하는 세력이 있다고 해서 주식 시장 전체를 폐쇄하지 않듯이 불법행위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면 될 일이다”고 말했다.
의욕 앞서 규제부터… 부작용 검토 뒷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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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당국이 적극 개입하는 시점은 허용치를 넘어선 불법행위가 발생했을 때라야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된다. 주식 시장에서 공매도와 선물·옵션거래는 허용하면서 유사수신과 시세조종을 단속하는 것과 같다.
박성준 동국대 블록체인연구센터장은 “블록체인은 4차 산업혁명을 추동할 핵심적 기술 중 하나고, 현재로선 그 기술이 가장 잘 반영된 형태가 암호화폐”라며 “블록체인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가상화폐의 문제점을 숨기려 한다는 인식은 암호화폐를 불법과 합법의 잣대로 해석해 자의적으로 내린 결론이다”고 말했다.
규제 일변도의 정부 정책이 의욕은 넘치되, 전문성 부족의 산물이라는 지적도 있다. 교육부가 지난 연말에 발표한 유치원·어린이집의 방과 후 영어수업 금지 정책도 그 중 하나다. 한 달 보육료가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까지 하는 영어유치원이나 유아 영어학원은 그대로 두고 수업료가 10만원도 채 되지 않아 주로 서민들이 이용해온 방과후수업 금지에 학부모들의 반발이 거셌다. 정부는 하루 만에 꼬리를 내렸다.
강남 집값을 잡겠다며 정부가 다주택자 규제 방안을 내놓은 뒤 강남 집값은 오히려 급등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12월 정부 규제 이후 강남권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8억669만원으로 1년 전보다 1억원가량 올랐다. 강북권과 격차는 3억1579만원까지 벌어졌다.
다주택자가 세금 부담을 못 이겨 강남 부동산을 처분할 것이란 기대는 빗나갔다. 부동산업계에선 “강남과 지방의 아파트 보유자들이 가치 상승이 둔한 지방의 아파트를 처분하면서 지방의 집값은 내려가고, 강남권 아파트는 품귀 현상이 빚어지는 것”이라며 “강력한 규제가 문제 해결의 능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