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평창 동계 올림픽에 함께 출전하면서 북한 응원단과 함께 예술공연단을 보내 축하공연을 했다. 북한은 모란봉악단, 청봉악단, 삼지연 관현악단 등 다수의 예술단을 운영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예술을 순수예술이 아니라 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음악은 사회주의 혁명적 수단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음악정치'는 김일성 시대부터 3대에 걸쳐 이어져 왔다. 형식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지도자 우상화를 강조하고 북한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기 위한 내용은 변함없다.

 

북한 삼지연관현악단

▎2018 평창겨울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는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의 첫 공연이 2월 8일 강릉아트센터 사임당홀에서 열렸다.
 

"좋은 노래는 대포나 비행기보다 더 위력한 무기이다.”

 

김정은(34)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즐겨 하는 말이다. 여기에 그는 “예술의 힘은 핵폭탄보다도 더 위력 있다”고 보태기도 한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언급한 음악·예술에 대한 생각이다. 많은 독재자가 음악을 순수예술이 아닌 지배 수단으로 활용했듯이 김정은도 마찬가지다.

 

북한에서 음악은 정치의 한 부분이다. 정치가 없는 음악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고 본다. 그래서 음악은 노동당의 사상과 의도, 노선과 정책을 반영하고 노동당의 대변자로서 역할하고 있다. 북한 음악의 목적은 정치와 인민의 교양에 있다.

 

김일성 생일 축하공연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지난해 4월 열린 김일성 주석 생일(태양절) 경축 열병식 참가자들을 위한 축하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 사진:노동신문

 

김정은의 ‘음악정치’는 2012년 집권과 함께 시작됐다. 그해 7월 하이힐과 미니스커트 차림의 파격적인 의상을 입은 여성 예술인만으로 모란봉악단을 창단했다. 모란봉은 평양시 모란봉구역에 있는 언덕(96m)의 이름이다. 모란봉악단은 파격적인 의상에 팝송을 번안해 부르는 등 이전 예술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대내외에 충격을 줬다. 단장은 평창겨울올림픽 맞아 삼지연관현악단을 이끌고 강릉(2월 8일), 서울(2월 11일) 공연으로 화제를 모았던 현송월이다. 현송월은 2005년 ‘준마처녀(일 잘하는 여성)’를 불러 북한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가수 출신이다.

 

김정은은 ‘모란봉악단’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좋아했다는 평양시 모란봉구역에 있는 언덕인 모란봉에서 이름을 따왔다. 김정은은 모란봉악단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그는 “모란봉악단의 기본 사명은 우리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 있는 무기가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정은은 음악을 ‘무기’에 자주 비유하곤 했다.

 

강릉을 방문한 북한 예술단원들


▎강릉을 방문한 북한 예술단원들. 굽 높은 부츠를 신고, 검은색 털모자를 쓰고, 선홍색 외투를 입었다.

 

‘총대와 음악’을 결합한 선군시대

 

김정은은 2015년 7월 음악정치의 연장선상에서 모란봉악단에 이어 청봉악단을 만들었다. 청봉은 김일성이 1930년대 항일빨치산 활동을 했던 백두산 동남부에 있는 혁명성지다. 모란봉악단과 청봉악단의 차이점은 다루는 악기에서 나타난다. 모란봉악단은 전자 바이올린과 일렉트릭 기타, 전자 비올라, 전자 첼로, 신시사이저 등으로 구성했다. 반면 청봉악단은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에 색소폰, 트럼펫 같은 금관악기를 위주로 구성했다. 청봉악단은 창단 직후인 2015년 8월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당에서 공훈국가합창단과 합동공연을 했다. 이들의 일부는 강릉과 서울에서 공연한 삼지연관현악단의 멤버로 한국을 찾았다.

 

김정은의 음악정치는 김일성·김정일에 이어 3대째 내려오고 있다. 북한에서 ‘음악정치’라는 용어는 2000년 2월 7일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열린 인민무력성 집회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조명록(1928~2010) 총정치국장을 비롯한 인민군 고위 장성들은 토론에서 “지금 그 어느 시대에도 있어 보지 못한 우리 식의 독특한 음악정치가 펼쳐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아울러 “노래로 온갖 시련과 난관을 이겨내자”고 외쳤다. 그 이후 북한은 음악정치를 “타고난 예술적 재능을 바탕으로 ‘총대와 음악’을 결합한 선군시대의 독특한 정치방식”이라고 선전했다. ‘선군’은 김정일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는 선군에 음악정치를 결부시켰다. 김정일은 “음악정치의 핵심으로 조선인민군 소속 공훈국가합창단을 내세운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정일 시대에 음악정치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지만 그 뿌리는 김일성 시대에 시작됐다. 김일성은 “혁명적인 노래는 총칼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도 적의 심장을 뚫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일성의 이런 생각을 예술단으로 구체화한 사람이 김정일이다. 그는 1969년 9월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되면서 북한 최초의 예술단인 만수대예술단을 만들었다. 김정일이 우수한 창작가, 연주가들을 선발해 조직했으며 ‘만수대예술단’이라는 이름은 김일성이 직접 지었다. 그래서인지 김일성은 만수대예술단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은 당시 문화예술 부문에서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주력했다. 유일사상체계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노동당의 통일과 단결을 공고히 하면서 당 전체를 김일성의 혁명사상과 주체사상으로 일색화하는 것이다. 김정일이 만수대예술단을 창단한 것은 순수예술보다 다른 복선이 깔려 있었다. 그 무렵 그는 이복동생 김평일과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김평일의 어머니인 김성애가 1960년대 후반 조선민주여성동맹 위원장이 되면서 치맛바람이 거세졌다. 1966년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이 문화대혁명을 주도하자 덩달아 북한 내에서는 김성애가 권력 정면에 등장했다. 북한 권력층은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를 중국의 장칭처럼 신봉하며 그녀의 아들인 김평일을 노골적으로 후계자로 점찍고 있었다. 김일성도 그쪽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북한 삼지연관현악단

 

▎2018 평창겨울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는 북한 삼지연관현악단 공연이 2월 11일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렸다.

 

북한 후계구도 향배 결정한 1971년 '피바다' 공연

 

김정일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반전을 노려 김일성과 원로들의 환심을 얻으려고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평양 남산 고급중학교(한국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영화·연극·음악 등에 관심과 식견이 많았던 김정일은 혁명가극으로 승부를 걸었다. 혁명가극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기초해 혁명적인 주제를 독창적인 표현방법으로 만든 가극이다. 음악·무용·연극 등의 요소가 종합돼 있다는 점에서 오페라와 비슷하다. 하지만 사상계몽과 선전선동이 주목적이기 때문에 예술성보다 무대나 등장인물의 규모를 중시하는 점에서 북한 특유의 종합무대 공연이다. 김정일은 사실상 총감독을 맡아 북한 5대 혁명 가극을 제작했다. 5대 혁명가극은 [피바다] [당의 참된 딸] [밀림아 이야기하라] [꽃파는 처녀] [금강산의 노래] 등을 말한다. 혁명가극은 한 작품에 보통 200명 이상의 배우가 등장하며 김일성의 우상화와 반제국주의 혁명성을 고양시켰다.

 

김일성은 1971년 7월 [피바다]의 첫 공연을 김정일과 함께 감상하고 “사상성과 예술성이 완벽하게 결합된 주체적이며 혁명적인 우리 식의 가극을 창조했다”며 매우 흡족해했다. 사상성과 예술성은 김일성이 음악을 만들 때 강조한 교시였다. 혁명가극의 효시인 [피바다]는 북간도 지방에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에게 남편을 잃은 최순녀가 자식들을 항일투사로 훌륭히 키우고 자신도 항일투사가 된다는 내용이다.

 

김정일은 자신의 장점인 문화예술 분야에서 성과를 내 김일성의 눈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원로들은 [피바다]를 보면서 그 내용에 공감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북한에서 선전 선동부 부부장을 지냈던 박병엽(사망)씨는 “1972년 2~3월에 김정일이 주도한 ‘혁명가극 총결산 모임’이 있었다. 공연 레퍼토리에는 [피바다] [꽃파는 처녀] 등이 포함됐다. 공연을 관람한 김일성과 그 추종자들은 옛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원로들의 감탄을 자아낸 혁명가극은 김정일에 대한 항일빨치산 1세들의 신뢰를 높여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정창현, [곁에서 본 김정일]) 김정일은 혁명가극 제작을 통해 김일성과 그의 동료인 항일빨치산 원로들부터 후계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예술을 권력 획득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이처럼 선전선동부의 경험은 김정일에게 사회주의 국가의 통치자에게 절실히 필요한 ‘감성독재’의 자질과 영도의 방법을 깨우쳐 준 중요한 경력이 됐다.

 

삼지연관현악단 공연을 관람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

 

▎2월 11일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의 공연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관람하고 있다.
 

김정일이 선전선동부 부부장에 오른 것은 27세 때다. 평창겨울올림픽에 김정은의 특사로 참석한 김정일의 딸 김여정도 2년 전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됐다. 미국 정부에 따르면 그는 1989년생으로 올해 29세다. 아버지와 딸이 같은 나이에 북한의 사상교양, 영화, 예술, 신문, 출판 등의 분야를 통제하는 선전선동부의 실세가 됐던 것이다.

 

김정일이 창단했던 만수대예술단은 내년이면 벌써 쉰 살이 된다. 대동강 기슭에 자리 잡은 동평양대극장이 이들의 주요 무대다. 5대 혁명가극의 하나인 [꽃파는 처녀]는 만수대예술단의 대표 작이다. [꽃파는 처녀]는 1930년대 초를 시대적 배경으로 악독한 지주와 일제 경찰에게 억눌려 살던 주인공 꽃분이 일가의 생활을 통해 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만수대예술단은 1973년 일본을 방문해 북한 처음으로 해외 공연을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때의 성과를 인정받아 북한의 최고 훈장인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만수대예술단은 지금까지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에서 1000여 차례 공연을 했다.

 


평양 만수대예술단


▎최승희 원작의 부채춤을 추고 있는 평양 만수대예술단. 지금까지 영국· 프랑스·이탈리아 등에서 1000여 차례 공연을 했다.
 

만수대예술단에서 만난 고용희

 

만수대예술단은 김정일에게 각별한 인연이 있다. 그곳에서 부인이자 김정은·김여정 남매의 어머니 고용희를 만났다. 북송 재일동포 출신인 고용희는 1962년 아버지 고경택을 따라 북한으로 갔다. 당시 열 살이었다. 그는 함경북도 화성군에 살다가 평양음악무용대학(현 김원균평양음악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재학 중이던 1971년 만수대예술단에 입단했다. 특이한 점은 입단하자마자 가극 [조국의 진달래]의 주연을 맡았다. 재일동포 출신이 만수대 예술단에 들어간다든지 그것도 주역을 맡는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김정일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용희는 김정일이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김정일은 “무용수는 인물이 아름답고 키가 크고 목이 길고 허리가 가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조건에 고용희는 딱 맞았다.

 

고용희는 만수대예술단에서 승승장구해 1973년 7월 자신이 태어난 일본 공연에 참가했다. 9월까지 계속된 일본 공연에서 고용희는 가극 [조국의 진달래] [목동과 처녀] 등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일본 공연을 마친 만수대예술단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공연실’을 설치했다. 이 공연실은 나중에 ‘기쁨조’로 불리게 되는 그룹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 기쁨조라는 말이 있는지 불확실하다. 주로 공연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기쁨조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공연실은 김정일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만수대예술단에서 일부를 공연조·희극조·합주조 등 3개 조로 나눠 구성했고 모두 여성만으로 채웠다. 고용희가 소속된 공연조는 김정일의 비밀파티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춤을 춘다든지, 측근들의 옆에 앉아 술을 따랐다. 김정일의 옆에는 고용희가 고정 파트너로 1975년부터 앉았다. 이듬해 동거를 시작했고 1977년부터 파티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고용희는 1981년 장남 김정철을 낳았다.

 

김정일은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한 2009년 1월 이후 삼지연악단과 은하수관현악단을 창단했다. 김정은의 등장에 맞춰 북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삼지연악단은 바이올린·첼로·트럼펫 등 관현악기에 피아노·색소폰 등으로 구성했다. 분홍색 의상이 트레이드마크다.



▎일제에 저항하는 혁명가극의 효시로 불리는 [피바다] 공연 장면.
 

음악 요소를 대담하게 혁신한 김정은

 

은하수관현악단은 김정은에게 특별한 예술단이다. 김정일이 만수대예술단에서 부인 고용희를 만났듯이 김정은은 은하수관현악단에서 부인 이설주를 만났다. 이설주는 함경북도 청진 출생으로 평양에 있는 북한판 예체능 특목고 금성학원을 졸업했다. 인민보안성 협주단의 대표 가수로 있다가 김정은의 눈에 띄어 은하수관현악단에 합류했다. 여기서 그는 현송월을 만나 친자매 이상을 지냈다. 김정은은 아버지와 달리 눈이 크고 오동통한 귀여운 스타일을 좋아했다. 이설주가 그런 타입이었다.

 

김정은은 할아버지·아버지의 ‘음악정치’ 가운데 본질인 정치적 의미를 계승하고 있다. 지도자 우상화를 강조하고 북한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는 수단으로 오랫동안 이용해온 음악의 특성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모란봉악단에서 보았듯이 형식은 할아버지·아버지에서 탈피하고 있다. 김정일은 전통의상을 고집하면서 가사를 리듬보다 중시하는 북한 음악을 지향했다. 가사는 북한 음악에서 노래의 생명이다. 좋은 가사는 사상 계급적 특색이 올바르게 반영된 가사, 당대 사회의 인민 생활의 본질을 반영한 내용이어야 한다.

 

반면 김정은은 첫 작품인 모란봉악단에서 보여 줬듯이 모든 음악 요소를 기성 관례에서 벗어나 대담하게 혁신했다. 김정은은 모란봉악단을 지도하면서 “새것, 새것, 또 새것”을 강조했다. 전영선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는 모란봉악단의 의미를 “북한 내에서 전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분석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발행하는 월간지 [조국]도 2014년 7월호에서 “모란봉악단은 낡은 사고방식을 극복하고 모든 분야에서 보다 새로운 혁신을 창조하는 힘 있는 사상 정신적 원동력”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의 대표 악단

 

김정일, 김연자 평양 초청 배경

 

1991년 8월 장문의 ‘음악예술론’을 발표할 정도로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은 스포츠·과학에 관심이 더 많다. 그 사례로 김정일은 2001년과 2002년 연이어 한국 가수 김연자를 평양으로 초청했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이 김연자의 노래를 좋아해 자신도 듣고 싶었다”고 말하면서 공연을 관람했다. 김정일이 직접 관람하지 않았지만 이미자·조용필·최진희·윤도현 밴드 등도 평양을 찾았다. 특히 2008년 2월에는 로린 마젤(1930~2014)이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이 역사적인 평양공연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정은은 달랐다. 2년마다 열리는 ‘4월의 봄 친선 예술축전’에 여러 나라 예술인들이 평양에 오지만 김정일이 김연자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처럼 본인이 좋아하는 해외 가수를 초청하지 않았다. 또한 뉴욕 필하모닉 등 미국 오케스트라도 초청하지 않았다. 반면에 그는 2013년 미국 프로농구(NBA) 스타였던 데니스 로드맨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로드맨은 지금까지 북한을 다섯 번이나 방문해 김정은을 세 번 만났다. 김정은은 부인 이설주와 함께 평양체육관에서 NBA 출신 선수들의 경기를 관람하기도 했다.

 

이를 보면 김정은은 음악에 대한 열정은 아버지보다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영선 교수는 “김정은의 성향을 보면 모란봉악단의 창단을 스스로 지시했다기보다 2012년 정권 출범에 맞춰 참모들이 올린 기획 아이디어 가운데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 고수석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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