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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대신 한국인들이 창업하기 좋은 이곳은?

한국인들이 창업하기 좋은 곳으로 미국 LA가 떠오르고 있다. 미국에서 세번째로 창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으로 스타트업 생태계가 성장하는 곳이다. 이커머스, 문화 콘텐트의 중심지이자 무역도시인 LA는 한인창업가의 성공스토리가 탄생하는가 하면 유니콘 기업도 배출하고 있다. 또한, 한인타운은 그들이 힘들고 외로울 때 도움을 주는 기반이 된다. LA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창업가와 투자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LA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창업가와 투자자

▎ 2월 3일(현지시간) LA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창업가와 투자자를 만나 LA 창업 생태계 이야기를 들었다. (왼쪽부터) 윤형식 뮤직쉐이크 대표, 백양희 라엘 COO, 아네스 안 라엘 대표, 존 남 스트롱벤처스 대표.
 

창업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스타트업 하면 떠오르는 미국 지역’을 물으면 대부분 ‘실리콘밸리’라고 대답할 것이다. 실리콘밸리는 자본과 인재, 커뮤니티가 가장 잘 갖춰진 스타트업 천국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엔지니어라면 누구나 일해보고 싶은 구글·테슬라·애플·우버 같은 ICT 분야를 이끌어가는 글로벌 기업도 많다. 이런 환경 덕분에 수많은 창업가가 실리콘밸리에서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스타트업)을 꿈꾸며 도전하고 있다. 다만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창업가는 그리 많지 않다.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한국인 엔지니어는 “경쟁이 치열한 탓인지, 성과를 내고 있는 한국인 창업가가 그리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실리콘밸리 대신 한인 창업가들의 도전이 이어지는 곳이 있다. 한인타운이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다. 이곳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액셀러레이터 앰플리파이(Amplify)가 2월 15일(현지 시간) 발표한 ‘2018 Los Angeles Tech Secne’ 자료를 보면 2017년 LA를 기반으로 설립된 스타트업이 376곳이고, 2016년 상장이나 인수합병 등으로 엑시트(자본 회수)에 성공한 스타트업도 80곳에 이른다. 페이스북이 20억 달러에 인수한 오큘러스(oculus), 애플이 30억 달러에 인수한 비츠 바이 닥터드레(beats.by dr.dre), 상장으로 240억 달러를 모은 스냅챗(snapchat)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인 창업가들의 성공 스토리도 나오고 있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한인 창업가로 꼽히는 브라이언 리는 배우 제시카 알바와 함께 친환경 유아용품을 파는 ‘어니스트 컴퍼니(The Honest Company)’를 공동 창업해 또다시 주목받았다. 2010년대 초반 LA 한인타운에서 직원 1명과 함께 시작해 2014년 코스닥 상장에 성공한 모바일 액세서리 제조 기업 슈피겐코리아 김대영 대표의 성공 스토리도 유명하다.

 

이렇게 LA는 한인 창업가들에게 좋은 도전의 장이 되고 있다. 한인 창업가들에게 LA는 어떤 도시이고, 어떤 매력이 있는 곳인지 알아보기 위해 LA에서 활동하는 창업가와 투자가를 만났다. 2월 3일(현지시간) LA 다운타운에 있는 벤처캐피털 스트롱벤처스 사무실에 창업가와 투자자 4명이 모였다. 2016년 7월 유기농 여성용품을 제조 판매하는 라엘(Rael)을 창업한 아네스 안 대표와 백양희 COO(최고운영책임자), 2005년 한국에서 창업한 후 2009년부터 미국 시장에 도전한 뮤직쉐이크 윤형식 대표, 한인 창업가 전문 투자 벤처캐피털 스트롱벤처스의 존 남 대표다. 이들은 “LA는 한인 창업가들이 활동하기 좋은 도시다. 힘들고 어려울 때 위로를 받을 수 있는 한인 커뮤니티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LA 다운타운에서 진행됐던 ‘Ktown Startups’ 행사

▎지난해 7월 LA 다운타운에서 진행됐던 ‘Ktown Startups’ 행사 모습. 당시 200여 명의 스타트업 관계자가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Bam Ventures의 Rich Jun 대표와 LA의 대표적인 창업가 David Yeom Hollar 대표가 패널로 참여했다. / 사진:스트롱벤처스

 

LA, 창업 활발한 미국 도시 3위에 올라

 

여러 자료를 보면 LA 스타트업 생태계가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윤형식: 2005년 한국에서 뮤직쉐이크를 창업한 후 본격적으로 미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지 10년 정도 됐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와 비교해보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처음 LA에 왔을 때는 투자사도 없고 한인 창업가도 별로 없었다. 혼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다른 창업가와 폭넓게 교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존 남: 미국에서 창업이 활발한 지역 순위를 따지면 실리콘밸리, 뉴욕 다음이 LA다. 주로 이커머스, 콘텐트, 게임 분야 스타트업이 많다. 기업가치 1조원이 넘는 유니콘도 많이 나오고 있다. 게임 쪽에서 성과가 많이 나온다. 리그 오브 레전드(LOL)를 출시한 라이엇 게임즈, 스타크래프트의 블리자드 등이 LA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한인 창업가는 얼마나 되나.

 

존 남: 내가 가장 잘 알 것 같다.(웃음) 스트롱벤처스는 2012년 설립했는데, 한인 창업가에게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우리 사무실이 있는 부근에만 50여 곳의 한인 스타트업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인 창업가가 설립한 스타트업이 LA에 100여 곳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안다.

 

스트롱벤처스는 스페인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존 남 대표와 배기홍 대표가 2012년 설립한 벤처캐피털이다. 배 대표는 한국 지사에서 활동하고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 학사를 딴 후 동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존 남 대표는 Comerica Bank와 US Bancorp 등에서 경력을 쌓았고, 실리콘밸리로 옮겨서 인터넷 전화 벤처기업 다이얼패드에서 국제사업개발 및 제품기획 매니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스트롱벤처스는 한인 창업가 전문 투자 VC로 이름을 알려나가고 있다. 라엘을 포함해 스낵피버(한국과자 이커머스 스타트업)·RushOrder(LA 중심의 음식배달 앱)·Morning Recovery(숙취해소 음료 브랜드)·Jubilee Media(디지털 미디어 창작스튜디오) 등 14곳의 한국인 창업가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설립 후 지금까지 180억 원 정도의 펀드를 운영 중이다. 지난해 9월 넥슨 지주사 NXC가 912억원에 인수한 가상화폐 거래소 코빗의 초기 투자사다.

 

 

라엘이 출시한 유기농 여성 용품들

▎ 라엘이 출시한 유기농 여성 용품들. 특히 유기농 생리대는 출시하자마자 아마존 유기농 생리대 카테고리에서 1위를 차지했다. / 사진:라엘


이커머스·콘텐트 분야 스타트업이 중심

 

LA는 어떤 장점이 있나.

 

아네스 안: LA는 이커머스(전자상거래)의 중심지다. 라엘은 유기농 여성 생리대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아마존이 큰 힘이 됐다. 아마존은 고객 맞춤 서비스를 장점으로 내세운다. 배송도 빨라야 하고 24시간 고객의 질문에 답변해야만 계속 상위 랭크에 올라갈 수 있다. LA는 이런 점에서 사업하기 좋은 곳이다.

 

백양희: 이커머스 사업을 하다 보니 현지에 있는 게 중요하다고 느낀다. 라엘 같은 이커머스 스타트업은 마케팅 비용이 부족하다. 사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아마존을 잘 이용해야 한다.

 

존 남: 안 대표 말대로 LA는 무역의 중심지다. 뉴욕이 패션 디자인의 중심지라면 LA는 패션 제조 센터라고 할 수 있다. LA는 수입 도매 시장의 가장 큰 도시다. 이런 이유로 이커머스 스타트업이 많다. 제시카 알바가 창업한 어니스트 컴퍼니, 회비를 내면 면도기를 정기적으로 배송해주는 ‘달라 쉐이브 클럽’ 같은 유명한 이커머스 스타트업이 LA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

 

윤형식: 한마디 덧붙이면 LA는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디어와 문화의 중심 도시다. 엔지니어도 풍부하다. 실리콘밸리에 스탠퍼드대학이 있다면 LA에는 UCLA·Caltech·UCI 같은 대학이 있어 좋은 엔지니어를 배출하고 있다.

 

존 남: LA는 세계의 문화 수도다. 글로벌 문화 콘텐트가 여기에서 다 만들어진다. 콘텐트 관련 비즈니스를 하려면 LA를 택하는 게 좋다. LA에서 문화 콘텐트 비즈니스에 성공하면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다.

 

백양희: 영화나 콘텐트 회사가 LA에서 마케팅을 하는 이유다. 셀럽(유명인사)과 협업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존 남: 한인타운이 있다는 것이 또 다른 장점이다. 스타트업 창업가는 어려운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한다. 외롭기 마련이다. 힘들 때 먹고 싶은 음식이나 어려움을 함께 나눌 한국인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 LA는 그런 면에서 한국인 창업가가 일하기 좋은 도시다.

 

아네스 안: 남 대표 말에 공감한다. 내가 만일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했으면 정말 외로웠을 것 같다.(웃음) 한국인이 없는 곳에서 살다가 LA로 오니까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아네스 안 CEO, 백양희 COO, 원빈나 CPO가 공동 창업한 ‘라엘’은 유기농 여성 생리대 및 용품을 판매하는 이커머스 스타트업이다. 주력 상품인 유기농 생리대는 미국 텍사스산 유기농 면을 이용했다. 미국 FDA인증과 국제전문인증기관인 스위스 SGS사에서 무독성인증을 받아 안전성도 인정받았다. 2017년 6월 제품을 출시했고, 출시하자마자 아마존 유기농 생리대 카테고리에서 1위를 차지했다. 공동 창업자들의 이력도 독특하다. 안 대표는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후 10여 년 동안 여성 라이프 전문 기자로 일했다. 서울대 경영학과와 하버드 MBA 출신의 백양희 COO는 디즈니 영화사 배급팀 디렉터 출신이다. 안 대표의 요청으로 라엘의 마케팅 전략과 배급 등의 자문을 해주다 합류하게 됐다. 백 COO는 “마케팅 하나 없이 아마존에서 성과를 올린 것은 그만큼 여성들이 이 제품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라엘 제품은 미국 시장뿐 아니라, 유럽 및 아시아 시장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얼마 전 티몬과 손잡고 한국에 진출했다.


한국인 유학생 창업 도전 적어 아쉬워


LA의 단점도 있을 것 같다.

 

존 남: 한인 창업가 중심으로 투자를 하고 있는데, 분야가 한정적이라고 느낀다. 이커머스나 콘텐트 분야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테크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싶은데 찾기가 어렵다. 이곳에 유학을 온 한국인 공학도들은 졸업하면 나사나 테슬라 같은 큰 기업으로 가버린다. 엔지니어링 능력이 있는 한인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창업에 도전했으면 한다.

 

백양희: LA 지역이 광범위하다는 게 단점이다(캘리포니아주에서 LA는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다. 미국 전체에서 뉴욕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다). 뉴욕에 있을 때는 길을 가다가 동기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LA에는 기업들이 다양한 곳에 흩어져 있어서 불편하다. 기업 미팅을 하려면 보통 1시간 정도 운전을 해서 가야 하는 게 힘든 점이다.

 

문화 콘텐트나 이커머스 분야의 한국 스타트업도 LA 시장에 도전하면 어떤가.

 

존 남: 솔직하게 권유하기 쉽지 않다. 통계를 봐도 한국 스타트업이 미국에서 성공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우리도 한국인 창업가에게 투자를 결정할 때 기준이 있다. 이곳에서 오래 생활했거나 이곳에서 태어난 1.5세대 한국인 창업가 위주로 투자한다. 이곳의 문화를 잘 알고 있어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양희: 영어만 잘한다고 LA에서 창업해 성공하는 게 아니다. 네트워크가 중요하다. LA의 문화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인재와 손잡는 게 좋다.

 

아네스 안: 나도 이 말에 공감한다. 내가 만일 한국에 있었다면 유기농 여성 생리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 제품이 이곳 제품보다 좋으니까. 미국에서 오래 생활했기 때문에 틈새시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윤형식: 나는 한국에서 창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온 케이스다. 원래 미국 지사장이 있었는데, 일을 그만둔 후에 내가 이쪽으로 넘어왔다. 현재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뮤직쉐이크를 운영하고 있다. 나 혼자 온 것은 운영비를 아끼려는 측면이 크다.(웃음) 초창기에는 컨퍼런스콜(전화회의)이나 이메일 등으로 일을 처리하는 게 어려웠는데, 10여 년 정도 지속되니까 이제 한국 직원들도 익숙해졌다. 오랜 시간 적응하고 준비한 덕분에 미국과 한국 사무실을 원활하게 운영하게 됐다.

 

윤형식 대표는 한국에서 유명한 음악 엔지니어였다. 음반기획사 프로듀서, 음향 장비 개발사, 인터넷 방송국장, 가수 개인 스튜디오 엔지니어 등으로서 경력을 쌓고 2005년 뮤직쉐이크를 설립했다. 뮤직쉐이크는 미리 준비된 악기 연주, 음향과 리듬 등을 이용해 사용자가 직접 곡을 만들 수 있는 서비스다. 삼성전자·넥슨·넥스트벤처 등 여러 VC로부터 60억원 투자를 유치해 미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2009년에는 ‘대한민국 콘텐츠 어워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윤 대표는 2009년부터 미국 시장을 노크했다. 그의 본격적인 성공은 2010년 유튜브 플랫폼을 만나면서부터다. 유튜브에는 뮤직쉐이크가 제공한 1만5000여 곡이 있다. 사용자들은 저작권 걱정 없이 이 곡들을 사용한다. 윤 대표는 “유튜브에서 사용된 뮤직쉐이크 곡의 사용료를 받는 게 우리의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밝혔다. 2010년부터 현재까지 유튜브에서 뮤직쉐이크의 곡이 55억 건이나 사용됐다. 윤 대표가 도전하는 다음 시장은 매장 음악 분야다. 현재 일본에서 이 비즈니스 모델을 시험 중이다.

 

ⓒ 로스앤젤레스(미국) 최영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