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임원은 모든 직장인이 꿈꾸는 자리이지만 아무나 오를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해요. 높은 연봉에 누리는 혜택도 많아요.
그러나 그만큼 자리를 견뎌내야 하는 중압감도 커집니다. 스트레스도 상상을 초월해요. 화려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고독한 자리에요.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요?. 국내 대·중견·중소·벤처기업 임원 100명에게 ‘임원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어요. 자세히 알아봐요.
‘나도 이제 대한민국 1%의 ‘별이다’. 2년 전 박아무개 전무가 임원 승진 결과를 넌지시 알려주던 날, 나임원 상무의 머릿속엔 치열했던 23년 간의 직장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대기업 기준 임원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평균 22.7년).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 회사에 뼈를 묻겠노라며 한길 만을 보고 달렸다(임원의 38%는 이직 경험 없음). 1000명 가까운 입사 동기들은 그 사이 서너 명만 남았다(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신입사원이 1000명이 입사하는 경우 7.4명 만이 임원으로 승진하며 특히 대기업 임원 승진 비율은 0.47%). 같은 시기 승진 대상이었던 동기 녀석은 인사에서 물을 먹자 회사를 나가 고깃집을 차렸다.
3년 이내 퇴직 임원 많아
처음엔 좋기만 했다. 요샛말로 ‘흙수저’로 태어나 2억~3억원대 연봉이면 성공한 것 아닌가(설문 응답자 63.9%는 자신이 흙수저, 36.5%는 연봉 2억~3억원이라고 답함).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집도 한 채 샀고, 대출도 다 갚았다(임원의 주택 유형은 자가가 79.8%. 51%는 주택담보대출 없음).
회사가 제공하는 전망 좋은 ‘코너 오피스’와 중대형 차량은 편하기도 했고 폼도 났다(임원들은 연봉 외 가장 좋은 혜택으로 별도의 집무실과 차량을 꼽음). 동창회에 나가도 어깨가 쫙 펴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오늘 따라 ‘꽃길’만 같았던 임원의 자리가 ‘가시밭길’처럼 느껴진다. 맡아서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어그러져서다(43.9%가 ‘업무가 원활히 풀리면 더 행복할 것 같다’고 답함).
김아무개 부장을 크게 나무랐다. 지시하는 일마다 딴지만 걸고 결과물은 변변치 않아 답답하다(임원이 꼽은 가장 큰 스트레스 요소는 ‘부하 직원들이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을 때’ 임). 이러고 나가면 뒤에서 박아무개 과장과 내 욕을 하고 있을 게 뻔하다. 나도 부장 시절에는 직원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는데…. 문득 고요한 집무실이 외딴 섬처럼 느껴진다.
아니, 정신 차려야지. 어떻게든 성과를 내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도 실적 덕분이다(88%는 임원이 되기 위한 요소로 ‘업무 성과’를 꼽음). 가뜩이나 요새 회사 분위기는 뒤숭숭하다. 오너 3세가 경영을 맡으면서 지난해 연말 나이 많은 선배 임원들이 우수수 잘려 나갔다(CXO 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임원 숫자는 2014년 이후 감소).
임원 3년차도 이제는 안전하지 않다(CXO연구소에 따르면 1~3년 사이에 퇴직하는 임원 비율이 39.7%로 가장 많음). 나도 결국은 비정규직에 불과하다. 임원은 ‘임시 직원’의 준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여겨진다. 임원 3년차에 옷을 벗게 되면 만년 부장으로 정년을 맞는 것보다 손해 보는 장사다. 힘을 내야 한다.
상념에 빠져 회의를 끝내고 나니 어느덧 퇴근 시간이다(임원의 69%는 매일 1~2번의 회의에 참석). 사실 퇴근 시간이랄 것도 없다. 어차피 ‘칼퇴’는 없으니까. 야근과 주말 출근은 일상이다.
안 하면 오히려 불안하다(임원들은 평균 주 2일 야근, 월 1.8일 주말 출근). 야근이 없는 날은 어김 없이 저녁 약속이 있다. 말이 저녁이지 술자리다(임원의 일주일 평균 음주횟수는 2.9회). 이러다 정말 탈 나지 싶다.
뱃살은 자꾸 나오는데 체중은 오히려 줄어드는 게 불안하다(임원의 66%는 승진 후 건강 악화를 경험). 요즘엔 주말마다 나가는 골프 때문인지 어깨도 시큰시큰하다(여가시간 활동에 대해 가족과의 시간 다음으로 골프를 친다는 응답이 많음).
의사는 쉬어야 낫는다고 하는데, 말이야 쉽지 이미 잡은 약속을 어쩌겠나. 이번 주말도 진통제로 버텨야 한다.
‘일과 삶의 균형’은 사치
자정 가까운 시간 집으로 향하는 차 안. 문득 얼굴 보기 힘든 딸내미가 생각난다. 카톡을 보내 안부를 묻는다(임원 73.1%는 자녀와의 대화 주 1시간 미만). 답장은 없다.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겠지. 아이들과 여유 있게 보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이번 겨울에도 아내와 아이들만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임원 47.5%는 일주일 미만의 연차휴가 사용). 며칠 전엔 아내가 첫째 아이 유학 얘기를 꺼냈다. 교육비야 회사에서 웬만큼 내준다. 그러나 그것도 회사에 남아 있을 때 얘기다. 그래, 둘째 대학 갈 때까지는 버텨야 할 텐데….
언젠간 퇴직할 테고 그 이후는 막막하다(퇴직 이후에 대해 32.7%가 ‘계획 없다’고 답함). 그래도 일단은 하루하루를 버티는 게 중요하다. 드라마 [미생]에서 ‘회사는 전쟁터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일도 전쟁터의 ‘별’로 남고 싶다.
이코노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