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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키보드 워리어, 리셋 증후군 등 인터넷 테러리즘 진단

어그로, 악플러라 불리는 '키보드 워리어'는 익명성의 그늘 아래 숨어산다는 전통적 분석이 깨지고 있다. 자기현시욕과 인정욕구에 시달리는 10대 유저들이 온라인이라는 그늘을 떠나 오프라인으로 나온 탓이다. 점차 과격해지는 인터넷 속 테러리즘이 현실에서 펼쳐진다.


익명성을 내걸고 온라인을 누비던 악의적인 행동이 점차 오프라인까지 발을 넓히고 있다. 관심을 끌기 위해 분란성이 있는 글을 올리고 싸움을 붙이는 데서 끝나지 않게 된 것이다. 가족과 지인들까지 팔아 넘기며 때로는 패륜도 마다하지 않는다. ‘잠자는 여동생 팬티로 자위행위를 했다’, ‘추석 때 찍은 친척 여동생 사진 대방출’이란 식으로 관심을 유도하거나, 심지어 애완견과 수간하는 모습까지 올리기도 한다.


2013년 10월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할아버지를 발견한 손자가 숨진 할아버지 모습을 찍어 일베에 올리며 ‘화장실 가봤더니 할아버지 자살하셨다. 인증 ㅍㅌㅊ?(‘평타 쳐?’: ‘중간 정도 수준은 된다’는 뜻)’란 글을 올리기도 했다. 모든 행동이 '관심 끌기'와 '지위향상'이라는 목적을 위한 것이다.


온라인 어그로 악플러 테러리즘


▒ 오프라인으로 빠져나온 비뚤어진 자기현시욕


강원대 정신건강의학과 황준원 교수는 파괴적 성향의 네티즌을 "비뚤어진 인정 욕구"라고 했다. 대중들의 관심에 목말라 있는 집단은 긍정적 반응뿐만 아니라 부정적 반응까지 피학적으로 즐기는 성향을 갖는다는 것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다른 이들로부터 욕설이나 무시를 당해도 이를 기분 나빠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렇지 뭐' 식으로 체념하거나 오히려 그런 관심이라도 얻고 싶어서 일부러 욕먹을 짓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부정적 반응까지 즐기는 유저가 늘어나면서 글의 내용과 제목은 점점 수위가 높아져 간다. 거대한 커뮤니티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소리 높여 "나를 봐!"라고 외치는 셈이다. 자신만이 주목받길 원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니 어지간한 수위로는 변변한 관심조차 얻기 힘들다. 온라인 안에서 자극적인 소재를 찾기 힘들어 오프라인까지 빠져나오게 된 것이다.



▒ 인정욕구와 관심에 목마른 10대의 영웅심리


‘드디어 인생의 목표를 발견했다. 집 근처에 신은미 종북 콘서트 여는데, 신은미 폭사당했다고 들리면 나인줄 알아라.’ 


지난해 12월 9일. 고등학교 3학년 오모(19)군은 자신이 활동하던 애니메이션 커뮤니티 '네오아니메' 라는 사이트에 위와 같은 내용의 글을 게시했다. 다음날 오군은 재미교포 신은미의 토크 콘서트가 열리던 전북 익산의 신동성당에서 직접 재조한 폭탄을 터트렸다. 범행 직후 붙잡혀 구속된 오군은 지난 2월 4일 석방됐다. 죄가 무거워 소년재판이 아닌 형사재판을 통해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오군은 자신을 윤봉길 의사와 투영해 '구국의 결단'으로 포장했다. 극우 성향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 회원들은 오군을 '오열사'라며 추켜세웠다. 오군은 사건을 벌임으로써 그토록 원하던 관심 끌기에 성공했다. 오군은 범행을 저질렀음에도 만족한 듯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온라인 어그로 악플러 테러리즘


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후 인터넷에 구속 이야기를 적으며 인증사진을 올리는 행동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오군은 자신의 범행을 '종북세력 응징'이라 칭하고 오군을 옹호하는 이들도 오군의 행동을 '의거' 부른다. 오군과 옹호세력의 행동을 단순한 일탈로 보기에는 범행 전후 행동이 일회성 일탈행동이라 보기 어렵다.


수많은 사람들이 활동하는 인터넷 세상에서 인정과 관심을 받고 싶은 욕구와 다른사람이 우러러 봐주길 원하는 영웅심리가 뒤틀려 섞인 결과다. 수백만이 오가는 커뮤니티에서 주목을 받기위해 자극적인 내용과 제목을 찾고 논란을 일으켜 자신의 존재력을 과시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악담경쟁과 일탈경쟁이 벌어진다.


온라인 어그로 악플러 테러리즘


일베 회원들에 의해 가장 흔하게 패러디되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희화화가 대표적이다. 일베 회원들은 노 전 대통령을 소재로 다양한 패러디를 만들어 논란을 자초하곤 한다. 2013년 5월에는 홈플러스 경북 칠곡점 전자제품 매장의 컴퓨터 화면에 노 전 대통령을 비하할 목적으로 만든 합성사진이 게시됐다. 범인은 입점업체의 직원이었다.


범인의 인증샷이 올라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홈플러스 구미점의 매장에 전시된 노트북에 노 전 대통령과 코알라를 합성한 사진을 띄운 인증샷이 일베에 올라왔다. 조사 결과 범인은 고등학생으로 드러났다. 앞서 칠곡점 인증이 인기를 끌자 이를 모방한 것이다.



▒ 리셋 증후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시작하면 돼


이런 사람들의 한가지 공통점은 자기가 속한 커뮤니티의 성향에 철저히 자신을 동일화한다는 것이다. 커뮤니티 회원들이 지지하는 주장에 반론을 펼치면 ‘분탕질(갈등을 유발하는 행동)’로 매도당한다. 한 번 분탕주의자로 낙인 찍히면 활동 내내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닌다. 결국 커뮤니티에서 따돌림 당하고 퇴출당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신념을 버리거나 오히려 과장한다. 경쟁하듯 일탈의 수위를 높이는 이유다.


이런 점에 대해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의 분석이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특히 교수의 분석 중 눈에 띄는 부분은 그들이 현실과 사이버 공간에서 각각 다른 인격체로 살아간다는 점이다. 현실에선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생활을 하지만 온라인에선 다르다. 신념이 뚜렷하고 조직에서 인정받는 존재로 변신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하나의 계정이 정지당하면 다른 계정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얼마든지 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하는 현실보다 분명 매력적이다. 이런 심리를 분석한 용어가 ‘리셋증후군(Reset Syndrome)’이다.


온라인 어그로 악플러 테러리즘


리셋증후군은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신질환 상태를 말한다. 전개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계정을 새로 만들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게임의 캐릭터는 죽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되살아난다. 초기화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자신의 진짜 인격체와 자아를 혼동한다. 여러 개의 커뮤니티와 ID에 따라 수시로 인격을 변신하는 게 가능하다 보니 진짜 인격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긴 하지만 자존감이 부족하고 자기 정체성이나 목표가 흐릿한 것은 온라인이나 게임에 몰입된 청소년들의 일반적인 공통점이다.



▒ 문제는 청소년의 불안한 자기 정체성. 심층적인 처방 필요


지난 1월 IS에 가입하겠다며 집을 나가 터키에서 실종된 고등학생 김모군의 경우도 리셋증후군적 행동으로 보기에 충분한 여러 배경을 갖추었다. 외로움, 온라인, 여성혐오, 게임…. 특히 김군의 행동은 온라인이나 게임 상에서만 적용했던 자신의 세계관을 현실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기존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비단 김군뿐만 아니라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의 새로운 흐름이기도 하다.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의 광화문 단식농성장 앞에서 ‘폭식투쟁’ 퍼포먼스를 벌인 일베 회원들의 행동도 같은 사례로 볼 수 있다. 지난해 9월 16일 일베 회원 수십 명이 세월호 유가족들의 광화문광장 농성장 바로 옆에서 피자와 햄버거, 프라이드치킨 등을 먹으며 유가족들을 조롱했다. 대부분의 언론이 진보와 각을 세운 극우의 부활에 의미를 뒀지만 전문 가들은 그보다 ‘익명의 가면’을 벗고 온라인의 커뮤니티를 오프라인으로 확장했다는 점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일련의 흐름들이 과거와 다른 양상으로 오프라인에 진출하는 흐름을 보이기 때문이다. ‘키보드워리어(온라인에서 강한 척하는 악성 네티즌)’는 ‘익명’을 무기로 삼는다는 전통적 분석마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사회적 규범 사이에서 갈등할 때 그걸 바람직한 방법으로 해소 할 수 있도록 하는 조력자는 우리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돌출행동을 하는 이용자를 ‘외톨이’, ‘중독자’, ‘루저’로 낙인 찍고 따돌리는 10~20대들의 커뮤니티 문화를 우리 사회가 그대로 인용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사이트 폐쇄나 일부 사회 문제가 된 이용자를 사회적 패배자로 낙인 찍는 여론이 같은 처지의 이들을 더 깊은 음지로 숨어들게 만들고, 결국 극단적인 행동으로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게 될 위험성을 지적한다. 표창원 전 교수도 “사이트만 없앤다고 이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라며 “엄정한 법집행은 필요하지만 원인에 대한 처방은 보다 심층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