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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금수저? 흙수저? '수저색깔론' 속의 청춘

지난해 12월, 한 서울대생이 5층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과학고를 조기졸업하고 ‘대통령 과학장학생’으로 서울대에 입학했으며, 최근 약학전문대학원에 지원해 발표를 기다리고 있던 그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은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


글 제목은 ‘제 유서를 퍼뜨려 주세요’였고, 그는 ‘고통스럽다’고 고백했다. 이 세상의 합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너무도 다르며, “금전두엽을 가지지도 못했으며,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수저 색깔”이었다고 토로한 것이다. ‘장래 희망은 정규직’이라는 말로 시작해 지난 한 해 들끓었던 ‘수저론’의 정점을 찍는 사건이었다.


수저계급론


금수저부터 흙수저까지 거론하며, 자기 자신을 자각하고 정의하려는 청춘들이 그 비극 속에서 다를 것 없는, 달라질 것 없을, 여전한 일상을 산다. 2000년대 초반 갓 20대가 된 이들을 기다린 건 ‘삼포세대’라는 낙인이었다. 생활에 쫓겨, 학자금 대출상환에 갇혀, 취업난에 시달리며, 청춘들이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는 것.


시절은 더욱더 수상해져서,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오포로, 꿈과 희망도 포기하는 칠포로, 2010년대 이후로는 ‘무엇이든’ 다 포기하는 엔(n)포세대로까지 이어져왔다. 엔포세대는 이제 나는 무슨 수저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모의 자산이 나의 현재를 만들고, 그 자산의 상속으로써만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수저론이다.


"힘 있는 자에 굴복하는 것이 이 사회의 합리"


누구는 금·은·동수저이며, 누구는 흙수저다. 지금 이곳이 지옥이라는 ‘헬(Hell)조선’, 그리고 ‘설국열차’와도 같은 이 지옥을 탈출해야만 한다는 ‘탈(脫)조선’이 유행한다. ‘저녁이 있는 삶’과 ‘내 아이를 낳아 제대로 키울 수 있는 삶’을 찾기 위해 엔포세대는, 그리고 스스로 흙수저라 믿는 청춘들은, 미용과 용접을 배워 이국(異國)으로 떠난다.


내가 아니라 나의 부모가 지닌 자산이 나를 ‘만든다’는 생각은 스스로의 미진한 성취 앞에서 무력해지고 만다.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논리에 굴복하는 것이 이 사회의 합리”라고 외친 A군의 마지막 목소리는 그래서 아프다.


수저론


분명 우리 사회에서 수저론은 실재하고, 금수저와 흙수저 사이의 간극도 커 보인다. 자산 20억 이상, 연소득 5천만원 이하 식의 통계적 분류가 아니라 비합리와 불공정으로 점철된 ‘불안’의 심정적 단계가 더 세밀한 듯하다. 저마다 꿈을 지녔다는 것 말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확신이 없는 일상이다.


모두가 노력하는 시대, 노력의 ‘인플레’가 일어난 사회에서 개개인이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떨어진다. 뛰어오르기 위한 발판의 유무가 새삼 아쉬워지고, “노력하는데 왜 안되지?”라는 질문에 나름의 해답을 갖지 못하면 뒤처지고 만다. 결국, 너와 내가 똑같이 도전하고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누구는 ‘안정적으로’ 실패하며, 또 누구는 ‘실패하면 끝이다’라고 느끼는 차이가 이 사회의 심리적 흙수저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꿈을 버리고 돈에 속박되긴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우 씨는 ‘꿈’을 이야기했다. 그래도 가수가 정말 되고 싶기 때문에, 아름다운 노랫말을 써내고 싶기 때문에, 꿈을 버리고 돈이나 생활에 속박되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암담한 기분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해요. 제 곁의 친구들 중에서도 정말 부유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격차가 심해요. 어쩌다 다같이 만나더라도 서로 씀씀이가 다르니까 어느 한쪽은 박탈감을 느끼기도 하죠. 어느 날엔 싸움이 붙어서, ‘가지고 태어난 게 내 잘못이야?’라는 등 고성이 오간 적도 있고요.”


수저색깔론


지혜 씨와 윤재 씨 커플은 뜻밖에도 ‘가치’에 대해 말했다.


“노력하지 않아서, 열심히 하지 않아서, 라는 기성세대의 비난과 지적은 거짓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비정규직이라 당연히 매일이 불안하지만,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어떤 가치, 그것의 우선순위를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내가 가진 것을 쓸 수 있고, 그래서 열심히 살 수 있다면 나의 가치는 충족되고 있다고 믿으려고요. 우스운 말이지만, 형편 좋은 자들이 누리는 소위 ‘벤츠’ 같은 것에 제 자신이 흥미가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죠.”


 행복이란 감히 말할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것


청춘들에게 꿈, 가치, 행복이란 감히 말할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것이란 인식. 아마도 그것이 ‘루저’와 ‘유리천장’이라는 단어를 만들었고, 삼포세대의 출발이었으며, 엔포세대의 결론이자 수저론의 기저였을 것이다. ‘시저지탄(匙箸之歎)’, 수저 색깔을 한탄한다는 신조어가 지난해의 키워드였고, 그만큼, 스스로의 절망에 함몰돼버린 2030세대 그리고 그것을 용기·노력·패기 부족이라는 개인의 무능으로 돌리는 기성세대의 비정한 방관 주의가 있었다.


유서에서 A군은 말했다. ‘다 잘될 거야’라는 식의 위로는 오히려 독이라고. 막연한 낙관이나 주입식 희망이 주는 고통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다만 우선은, 절망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무한 비교의 시대에, SNS에 게시된 정형화된 행복감이 아닌 자신이 긍정할 수 있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이런 말 또한 그저 그런 타협과 자기계발의 독려쯤으로 이해될 우려가 있을지 모르겠다. 계급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라는 현실에 분노하는 젊은 세대의 의지와 청년실업을 방조하는 사회 부조리를 개선하려는 기성세대의 성찰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우리, 절망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청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똑바로 서라"


여기, 20대가 끝나갈 무렵, 독일 뮌헨의 미술관에서 한 점의 그림을 만나 비로소 방황이 끝났다던 강상중의 고백을 덧대어 놓는다. <1500년의 자화상>이라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 앞에서, 그는 스물여덟에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고 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똑바로 서라.’


절망하지 않고, 허리를 바로 세워 꼿꼿이 서는 것.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같이 서 있다고 생각하면 더 나을지 모른다. 방과 방 사이, 얇은 합판을 사이에 두고 모두가 함께 울고 웃었던 것처럼. 타자와의 유대는 멀리 있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이 시대, 절망하지 않는 힘의 바탕이 되어줄 거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