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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해인강원 학인스님들의 하안거, 고요 속 궁극의 깨달음

사찰에선 행자와 강원(승가대학)생활을 중물 들이는 가장 중요한 시기라 말한다. 삼보사찰은 특히 이 시기의 초기교육을 중시하지만 그중에서도 해인사는 규율이 엄하고 상명하복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학년 치문반(緇門班)과 2학년 사집반(四集班)은 새벽 3시부터 밤 9시까지 분초를 다투는 생활을 이겨내야 한다. 강원 입학할 때 받은 전자시계를 심장처럼 지니고….

해인사 하안거




학인스님들은 하루 18시간 규율에 매여 생활한다. 신참 치문반은 꼭 해야 할 말 외에는 묵언해야 하고 컴퓨터 사용도 제한받는다. 공중전화를 할 때도 두 명이 같이 간다. 이부자리 정리부터 옷 입기, 공양, 예불, 울력(노동), 전화 받는 법, 방에 들어갈 때 말하는 법 등 500가지의 습의(習儀)를 익혀가야 한다. 


해인사 하안거


편히 지내려면 빨리 배워야 하지만 출가 연령이 높아지고 개인적인 습도 있어 쉬운 일이 아니다. 절의 습의를 익히기 싫어하면 타의에 의해 경책(警責:정신을 차리도록 꾸짖음)을 받을 수밖에 없다.

1, 2학년의 창불 연습 후엔 대방에서 법공양 습의를 한다. 법공양이란 하안거·동안거 때 가사장삼을 착용하고 어른 스님들을 위시하여 율원·선원스님까지 90여 명이 함께 하는 아침 발우공양을 말한다. 학인스님들이 가장 긴장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공양의식이 시작되기 전 착석하여 대기하는 시간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발우 받는 법부터 법공양 의식에는 절도가 있어야 한다.

법당에서 돌아오면 외등이 꺼지고 찰중스님의 죽비 3타에 학인스님들의 공부가 시작된다. 대방에서 경을 읽는 간경 시간이면 학인스님들의 수행공간은 경전을 읽는 우렁찬 소리로 열기를 띤다. 스님은 근기가 있어야 한다. 참고 기다리면 다 이루어진다. 포기만 안 하면 된다. 

매주 토요일과 수요일에 하는 축구와 등산도 체력관리를 위해 강제라면 강제지만 3, 4학년이 되면 자유선택이다. 상급반이 되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 때가 되면 누린다. 어차피 할 거면 철저히 즐겨야 한다.



해인사 강원의 엄격함은 학인들이 스님으로서의 위의와 품성을 갖추기를 요구한다. 학인들은 수행불교와 실천불교를 배우러 해인사에 온다. 

해인사 하안거


정혜 스님이 양동이 밥을 주걱으로 퍼서 발우에 담는 행위는 시중과는 확연히 다르게 액션이 크다. 왼팔의 긴 장삼을 오른손으로 고정시키고 발우를 받는 동작은 무술 같다. 전에 범패를 배운 적이 있어선지 찰중스님의 습의는 무용처럼 리듬감이 있다. 해인사 법공양이 의식이라는 걸 한눈에 보여준다. 안무가가 본다면 영감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정혜 스님은 말한다.

“해인사는 액션이다. 액션이 크다. 그건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찰중 소임을 맡고 있는 정혜 스님은 연락용 휴대폰을 받았다. 구형 휴대폰으로 어른스님의 전화가 걸려오면 찰중스님은 자리에 선 채로 “네 스님, 네 스님, 네 스님, 네 스님…” 큰소리로 답하고 서둘러 관음전을 나선다. 덧붙일 필요가 없다. 하겠다는 의지만 보인다. 하심(下心)을 가르치는 해인사가 아닌가.



1996년 생으로 사집반에서 가장 나이 어린 10대 정우(正佑) 스님은 어리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의젓하고 명석하다. 초등학교 때도 장래희망 직업란에 스님이라고 적을 만큼 남달랐다. 정우 스님은 초등학교 4, 5학년 때 학교에서 운영하는 영재교육에 통과되어 수학과 과학을 따로 배웠다. 중학교엔 수석으로 들어갔다. 입학할 때 학교에 가니 성적순으로 아이들을 자리에 앉혔다. 맨 앞에 앉은 사람과 맨 뒤에 앉은 사람의 마음 차이는? 자괴감을 갖지 않을까. 소년은 학교의 자리배정에 충격을 받았다.


해인사 하안거


공부가 인생의 전부인가? 왜 공부하는가? 왜라고 물으면서 한 단계씩 이유를 따져보았다. 가정을 갖고 재산을 모으고…. 평범한 인생 패턴이다. 조숙한 소년은 평범한 삶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학교도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았다. 과도한 경쟁이 혐오스러웠고 더 이상 시험을 보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생은 출가를 결심했다. 15세 때였다. 다른 아이들이 시험 성적과 왕따로 괴로워할 때 수행자라는 정신의 길을 가기로 일찍이 결정했다면 그의 비범함을 긍정해도 좋으리라.

사집반 정우 스님의 가장 큰 관심은 교육이다. 불전 중심의 전통교육에는 강원이란 이름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승가대학이라고 부른다면 한문 위주의 공부에서 예능까지 폭을 넓혔으면 좋겠다. 불교에 도 음악과 미술이 포함될 텐데 정서교육에 대한 욕구가 있다. 보수적인 강원교육은 자칫 나태해 질 수 있다고 본다. 시험문제도 심도 있게 다양성이 있으면 좋겠다.



용운 스님은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을 수없이 읽었다. 큰스님의 자취를 찾는 것도 공부다. 신라 때부터 원효, 의상 같은 스님은 시대를 선도하는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혜초 스님과 많은 승려는 법을 구하고자 인도로 갔다. 견문을 넓히면 진보가 따른다. 은사스님의 권유로 제대 후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오고 많이 느꼈지만 강원을 졸업하면 일본에 유학하고 싶다.

지난봄 강원에서 일본 사찰탐방을 할 때 사천왕사 부속학교에도 들렀다. 일본에서는 불교계가 직접 정규교육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포교하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이 좋은 불교가 왜 산중에만 있나? 

용운 스님은 이 화두를 출가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공부한 것만 가지고는 문자놀음이 되지 않을까. 대만은 불교를 국가적으로 부흥시켰다. 국민의 인성을 순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국의 성장주의, 물신주의에는 인성이 없다. 포교해서 변화시켜야 한다.

서양은 침략과 동시에 기독교를 전파하여 포교가 발달하지 않았는가. 한국불교의 실천에 대해 의문점을 가진 용운 스님은 강원에 와서 포교에 대한 생각이 확고해졌다. 해인강원에서 배운 것은 산중불교를 널리 알리는 것. 가시밭길이지만 참고 걸을 것이다. 수행자는 역경도 녹여내고 수행으로 삼아야 된다. 젊은 학인스님의 다부진 다짐이 한국 불교의 미래를 밝혀주는 것 같다.



가파른 층계 아래 비로탑과 석등이 있는 마당은 비어 있고 관음전 마루 앞의 미닫이문 창호지로 불빛이 비친다. 새벽 2시50분부터 하급반 학인스님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니 지금도 저 안에선 무언가 준비되고 있으리라. 생각과 때를 맞추어 갑자기 게송을 합창하는 소리가 도량에 울려 퍼졌다. 예불 때보다 더 큰 울림이었고 대중의 바리톤 음색이 장중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노사나불
천백억화신서가모니불 당래하생미륵존불”


해인사 하안거


발우공양 게송이었다. 하안거라 선원 율원까지 합쳐 90여 명의 스님이 대방에서 공양 전 반배하며 발우를 전하고 있을 것이다. 아름답다. 법당으로 울려오는 힘찬 게송을 들으며 해인사를 보호하듯 에워싸고 있는 산능선을 바라보노라니 여기가 천국이 아닌가! 

지붕 마루 위용 형태의 치미(용마루의 양 끝에 높게 부착하는 장식기와)는 여의주를 물고 무릉도원처럼 솟아있는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선들한 새벽 바람에 차랑한 풍경소리가 울리고 까악까악 까마귀가 우짖으며 법당 위로 날아간다. 지구 어느 곳에서 아침의 양식을 들면서 이토록 장엄하게 경배한단 말인가.

45분 좌선을 하고 15분간 휴식. 일어날 때도 자리에서 세 번 도는데 나머지 시간에 볼일을 보고 돌아와야 한다. 강원 하급반은 가장 늦게 나가므로 잘못 먹어서 설사라도 한다면 시간이 늦어진다. 두 번 늦어지면 선방과 강원에서 퇴방당한다. 추상같은 규율이라 스님에 따라 밤 11시에 나오는 죽공양을 소량만 취한다. 학인스님들은 전시처럼 초긴장해야 하고 졸음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극기 후에 자신감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