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조세현은 걸출한 스타들을 발굴해 낸 사진계의 마이더스에요. 인물사진의 대가인 그의 지금의 관심사는 바로 ‘어머니’의 얼굴이라고 해요.
사진작가 조세현(61)은 자신을 ‘찍사’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도장도 찍는 거고 인쇄도 찍는 건데, 빛을 찍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얼마나 좋으냐고 되묻는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법전 대신 카메라를 선택한 그의 관심은 사람이었다.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도, 잡지 화보를 찍을 때도, 그의 렌즈는 늘 얼굴을 향했고 눈빛을 낚아챘다. 사회에서 소외된 장애인, 입양아, 노숙인을 찍기 위해 한동안 낮은 곳으로 임했던 그의 카메라가 지금 찾고 있는 대상은 어머니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옛날 어머니의 얼굴이다.
그가 사진 인생 40년을 맞아 최근 책을 내놨다. 『조세현의 사진의 모험』(김영사)이다. 지금까지 사진가로서 살아온 삶, 사진에 대한 생각,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에 대한 사유가 촘촘하게 담겨 있다. 본인은 “사진이 얼마나 즐거운 놀이인지, 이 즐거운 놀이를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지속할 수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책을 출간한 계기라면.
그동안 사진을 찍고 전시도 하며 사람들을 가르치다 보니 책이 필요하게 됐다. 40년간 찍으면서 사진으로 다 보여주지 못한 얘기도 많았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평소 메모도 자주 하는 편인데, 머릿속에 잔뜩 들어 있던 부스러기들을 모아 정리해보았다.
글이 술술 읽힌다.
출판사 주문이, 시중에 있는 사진책은 테크닉 설명이거나 읽기 힘든 전문가용밖에 없으니 쉽고 재미있는 책을 만들어보자였다. 그런데 쉽게 쓴다는 게 참 어려운 것이더라. 원고도 여덟 번이나 교정했다. 특히 삼교에서 문장 틀을 확 바꿨다.
DSLR 보급 확대에 이어 스마트폰 덕분에 누구나 사진작가가 됐다.
사진이 흔한 시대다. 흔한 대신 좋은 사진을 찾기 힘들다. 필름 시절에는 한 장 한 장을 생각하고 또 고민하며 찍었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찍을 때마다 조금 깊이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사진을 사랑하는 일반인들이 내 책을 읽고 사진을 소중하게 여기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수전증이 있었다는 고백을 읽고 깜짝 놀랐다.
배우 고소영은 내가 데뷔시킨, 친동생같이 격의 없는 애인데 산토리나에서 촬영 도중 갑자기 내게 말했다. 손이 많이 떨린다고. 이제 사진 찍을 수 있겠느냐고.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고, 조심하고 신경 썼지만 계속 우울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흔들림 방지 시스템을 장착한 렌즈들이 출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동 포커스 기술도 점점 발전했다. 요즘엔 짐벌까지 나왔다. 덕분에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다. 일을 더 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알고 있다.
“‘눈빛’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냥 증명사진”
그를 사진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은 중학생 때 길거리에서 주운 필름 쪼가리였다. ‘콜라병을 처음 발견한 부시맨’의 호기심은 인화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졌고, 고교에 들어가자마자 가입한 사진반에서 본격 발아했다. 귀찮은 인화 작업을 자처한 ‘기술자’ 1학년생을 선배들은 기특해했다. 서울시교육청 주관 고교생 사진대회에서 선배들의 이름으로 낸(사실은 선배들이 가져간) 두 점과 자신의 작품이 나란히 1, 2, 3등을 차지하는 놀라운 일도 겪었다.
명동 뒷골목에서 우연히 발견한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라이프는 다큐 사진가라는 꿈을 심어주었다. 진로 상담을 위해 찾아간 중앙대 사진학과 사무실에서 만난 사람이 사진계의 전설 임응식 작가였다는 것도 돌이켜보면 우연이 아니었다. 법대 진학을 원했던 부모님은 사진학과 진학을 고집한 아들에게 4년간 지원을 완전히 끊었고, 그는 일하며 공부하며 악착같이 버텨냈다.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 과정도 흥미진진하다.
당시 실기 작품을 열 편 정도 냈는데, 고교생 수준이 아니라며 교수님이 부르셨다. 내 싸구려 목측식 카메라를 보고 정말 이걸로 찍었느냐, 어떻게 이렇게 찍었느냐 한참 문답을 주고받은 끝에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입학 후 학교 신문사 기자, 교지 편집장, 사진학과 회장 등을 지내며 사진전 기획 및 작품집 출판까지 사진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봤다.
졸업 후 바로 다큐 사진작가가 됐나?
처음엔 신문사에 들어갔다가 월간지로 옮겼다. 사회의 소외된 풍경에 관심을 기울였고, 소설가, 화가, 민주화운동 인사 등과도 인연을 쌓아갔다. 그러다가 여성지를 맡게 됐다. 당시 나에게 패션은 사치였고, 연출사진은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고로 펑크를 내게 된 선배를 대신해서 화보를 찍게 됐고, 기존과 달리 스트레이트하게 찍은 내 사진에 즉각 반응이 왔다. 매달 고정 지면이 맡겨졌고, 사장실 명령으로 표지도 담당하게 됐다.
패션 사진계에 화려하게 입문했다.
운이 좋았다. 당시 올림픽 전후로 엘르, 보그, 마리끌레르 같은 세계적인 패션 매거진이 한국에 진출했다. 한국 패션계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때였다. 광고 시장도 커지면서 스타 마케팅이 시작됐다. 거리에서 눈에 띄는 얼굴들을 찍어 데뷔시키면 스타가 됐다. 고소영을 비롯해 전지현, 김민희, 임수정, 이정재, 송승헌, 소지섭, 권상우 등이 내가 찾아낸 친구들이다.
인물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빛이라고 강조한다.
마음은 눈을 통해 전달된다. 인간의 정체성은 눈에 있다. 눈빛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지 않나. 그것을 잡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피사체와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냥 증명사진이 된다.
좋은 사진을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필수라고도 했다.
내가 사람을 좋아한다. 존경심이 있고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런 천성 덕분에 연예인들과도 친해진 것 같다. 단순히 사진을 잘 찍는다고 해서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소외계층을 계속 찍어온 것도 그런 맥락인가?
무의탁 복지시설의 신부님이었던 외삼촌의 전화가 시작이었다. 부랑자들의 가족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뒤 해외로 입양되는 아기들과 연예인을 같이 찍었고, 노숙인들에게 사진 찍는 법도 가르쳤다. 장애인올림픽에도 사진작가로 일곱 번이나 참여했다. 그들과 사회를 연결하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했다.
법정 스님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안다.
정말 감사하게도 스님이 내게 곁을 주셨다. 영혼을 찍는 작가가 되라는 주문과 함께. 그분이 영적으로 가장 빛나는 절정기에 송광사에서, 길상사에서 스님의 모습을 아주 많이 찍을 수 있었다. 돌아가시고 수많은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지만, 아직까지 공개할 생각은 없다. 언젠가 먼 훗날 사심 없이 스님의 모습을 보여드릴 때가 올 것이다. 그것도 내 책임이니까.
링컨은 “40세 이후 얼굴에 책임을 져라” 했는데 당신은 “66세 이후 얼굴에 책임을 져라”고 했다.
같은 얘기다. 링컨 시대는 40세였고 의학이 발달해 건강해진 지금은 60세다. 얼굴에는 모든 것이 기록돼 있다. 살아온 인생이 다 보인다.
포트레이트 갤러리에 대한 관심도 크다고 들었다.
서울시가 2022년 창동에 완성할 예정인데, 힘을 많이 보태려고 한다.
어머니 시리즈를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어머니는 ‘요즘 엄마들’이 아니다. 자기 몸 하나 돌보지 않고 가족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던, 주름이 사랑스러운 우리 어머니들이다. 그래서 시골 장터와 섬들을 돌아다니고 있다. 지금 찍지 않으면 아마 다 사라질 것 같다. 위안부 할머니들 사진도 같은 맥락이다. 4년 전 돌아가신 지춘자 할머니가 내게 엄청난 영향을 주셨다. 열두 분 정도 찍었는데, 다른 분도 찍을 생각이다.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다. ‘레퀴엠’을 만들 생각이다. 그 사진에는 원망만 있지 않다. 용서도 있고 화해도 있다.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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