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손보험 하나씩은 가지고 계시죠? 우리나라에 실손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사람들만 3800만 명이라고 해요. 하지만 보험료가 아깝지 않을 만큼의 의료비 혜택을 보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해요. 보험료 청구가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너무 작은 보험료의 경우 손품드는 시간이 더 아깝기 때문이죠.
3800만 명. 2019년 6월 기준 제2의 건강보험이라 불리는 ‘실손의료보험’에 가입한 국민의 숫자다. 실손의료보험은 보험 가입자가 질병이나 상해로 입원 또는 통원 치료 시 의료비로 실제 부담한 금액을 보장해주는 건강보험이다. 실제 손실을 보장한다 해서 줄여서 실손보험이라 불린다. 환자가 병·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무는 병원비 중 국민건강보험으로는 보장받을 수 없는 환자 본인 부담금 중 90%까지 보장해준다.
그러나 실손보험에 가입한 3800만 명 모두가 자신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는 건 아니다. 2018년 12월 금융위원회와 보건복지부가 공동 의뢰한 한국갤럽 조사 결과, 실손보험 가입자의 ‘보험금 미청구’ 비율은 47.5%에 달했다. 이 가운데 70%가 ‘미청구 금액은 5만원 이하’라고 답했다.
보험금을 청구하지 않은 이유로는 ‘금액이 적어서(73.3%)’라고 응답한 이들이 가장 많았다. 이어 ‘병원을 방문하는 것이 귀찮고 시간이 없어서(44.0%)’, ‘증빙서류를 보내는 것이 귀찮아서(30.7%)’, ‘증빙서류 발급 비용이 부담스러워서(24.0%)’라는 응답(복수응답)이 뒤따랐다.
현재 실손보험 가입자가 보험금을 청구하려면 의료기관에 직접 방문해 필요 서류를 발급받고, 이를 팩스, 이메일,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등으로 보험사에 제출해야 한다. 이 때문에 한국갤럽의 조사처럼 진료금액이 적은 경우엔 아예 청구하지 않는 사례가 많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20대 국회에서도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보험계약자, 피보험자 등이 요양기관에 진료비 계산서 등의 서류를 보험회사에 전자적 형태로 전송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도록 하고, 보험회사는 요양기관의 서류 전송 업무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 위탁할 수 있도록 하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또 심평원 대신에 전문중계기관에 위탁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도 발의된 상태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가 제도 개선을 권고한 이래로 11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제도 도입을 놓고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뒤엉킨 현실 때문이다.
일단 보험업계는 신용길 생명보험협회장과 김용덕 손해보험협회장이 나란히 올해 추진 과제 중 하나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서비스를 내세웠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청구 절차 관련 민원이 지속해서 들어오고 있고, 보험사 내부에서도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며 “기술적인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고객이 좀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본질은 의료계·보험사 간의 밥그릇 쟁탈전?
보험업계는 사업비 절감 측면에서도 이를 반긴다는 입장이다. 보험사는 보험 가입자로부터 종이 문서를 받아 전산으로 새로 입력하고 보관하는 업무가 늘면서 업무효율이 떨어지고 있다. 단순 작업을 처리하는 노동자를 지속해서 고용해야 한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청구화가 시행되면 청구서류를 처리하기 위한 인건비 등 사업비 절감 효과도 있을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이는 보험업계에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얼핏 보면 보험사에게 유리한 제도일 수 있지만, 실제로 청구 간소화가 이뤄지면 지급해야 할 보험금이 불어난다. 실제로 보험업계 관계자는 “미청구 보험금의 규모는 추산조차 할 수 없다. 손해율이 올라가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의료계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거대 실손보험사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와 대한병원협회는 “실손보험회사는 진료비 심사 결과에 대한 이의 제기 등을 통해 의료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실손보험 가입자의 진료비 내역과 질병 정보에 접근할 법적 근거를 갖는다”면서 “이를 근거로 관련 질병 정보를 축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험업계가 질병정보를 의료 상업화 수단으로 활용할 것이라는 우려다.
의협·병협은 또한 “공적인 보험심사를 하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실손보험 청구업무 위탁을 하게 되면 자동차보험 선례에서 보듯 결국 심사까지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라며 “결국 이번 법률안은 국민의 편의라는 명목으로 의료기관에 청구를 대행하게 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보험금 지급률을 낮춰 실손보험사들의 배만 불릴 수 있다”고 반대 의사를 명확히 했다.
의료계에서는 궁극적으로 실손보험 손해율을 낮추겠다는 보험업계의 계산이 작용하고 있다고도 의심한다. 대한개원내과의사회는 “점점 커지는 실손보험 손해율을 줄이기 위한 보험사들의 생존 전략”이라고 경계한다.
손해율은 보험료 수입에서 보험금 지급액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지난해 실손보험 손해율은 130%에 달하고, 실손보험 연간 적자 규모가 1조7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업계는 추정한다. 업계에서 보는 적정 손해율은 76~78% 수준. 이처럼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자 30개 보험사 중 11개사는 실손보험에서 손을 떼기도 했다.
손해보험사 중 AIG(2016년 4월)·ACE(2013년 4월)·악사(2012년 4월)가 실손보험 판매를 중단했다. 생명보험사에서는 DB(2019년 3월)·KB(2018년 6월)·DGB(2018년 5월)·KDB(2018년 1월)·푸본현대(2017년 8월)·AIA(2013년 6월)·오렌지라이프(2012년 12월)·라이나(2011년 7월)가 실손보험을 판매하지 않는다.
반면, 보험업계는 의료계의 과잉진료가 손해율 상승을 가져왔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지금은 보험사가 비급여 청구의 실제 진료내역서를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현재 관행에 따르면 질병코드와 비용 등만 공개될 뿐 세부 치료 내역은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꼭 필요하지 않은 영양제 주사를 의료진의 권유에 따라 맞고서 실비보험에 청구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 보험사 관계자는 주장한다. 이 관계자는 “간소화 법안이 통과되면 보험사가 비급여 청구의 진료내역서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과잉진료가 일정 부분 감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복지부 지침으로 병원에서 보험사로 송부 가능해질까
이처럼 이익 당사자들의 논란이 분분한 가운데 정부는 10년 논쟁에 마침표를 찍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 공·사보험정책협의체 회의에 참석한 손병두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현재 국회 계류 중인 보험업법 개정안의 신속한 통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현재 의료계를 중심으로, 해당 법안에 대해 우려가 큰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중계기관이 서류전송 이외 목적으로 정보를 활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의료계의 우려를 최소화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 복지부와 함께 의료계를 지속 설득하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주무부처 중 하나인 보건복지부도 걸림돌 해소에 적극 나서는 모양새다. 그동안 청구 간소화 논의는 늘 의료법이라는 장벽에 막혀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의료법 21조는 “진료기록은 제3자에게 제공이 금지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병원은 보험사에 진료기록을 전송하는 데 난색을 보였다.
이에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0월, ‘진료기록 열람 및 사본 발급 업무 지침’을 발표했다. ‘환자 본인이 진료기록 사본 발급을 요청하는 경우에 환자는 제3자에게 송부할 것을 요청할 수 있으며, 의료기관은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환자의 요청에 응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환자가 자신의 의무기록 전송에 동의해도 의료법 제21조를 내세워 의무기록 전송 요구에 응하지 않던 의료기관의 관행에 제동을 거는 조치인 셈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제3자’에 보험회사도 포함되느냐는 질문에 “제3자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보건복지부는 “의료기관이 직접 진료기록 사본을 보내줘도 의료법 위반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는 지침”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 관계자는 “해당 지침이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라며 “현 시스템상에서는 여전히 환자가 직접 와서 진료기록 사본 송부 요청을 해야만 제3자(보험사)에게 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복지부 지침에 대해 조용운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해당 지침으로 인해 의료계가 의료법을 내세우며 청구 간소화를 반대할 법적 근거는 사라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라고 설명했다.
대형병원은 이미 청구 간소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진료비를 수납한 고객이 병원에 비치된 키오스크를 통해 본인 확인 절차 진행 후 진료 이력을 선택해 가입한 보험사에 바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때 실손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인 진료비 영수증과 세부 내역서, 처방전이 보험사로 곧바로 전달돼 보험금 청구가 이루어진다. 접수된 서류에 대해 해당 보험사가 지급 심사를 마치면 가입자는 입력한 계좌로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
대형병원들은 병원 앱을 통한 보험금 청구도 지원하고 있다. 앱 안의 ‘실손보험청구’ 메뉴를 통해 본인인증을 거쳐 자동으로 보험금이 청구되는 것이다. 이 같은 서비스는 병원과 의료IT 기업, 보험사와의 협업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한 병원 관계자는 “대형병원에서는 실손보험 관련 서류 발급으로만 하루에 A4 500장이 들어 있는 종이 박스 2개를 사용한다”고 밝힌다. 매일 종이 1000장이 소모되고 있는 것이다. 간소화 절차를 확립하면 수작업에 의존하던 병원 내원무과 업무도 대폭 간소화하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비급여 정보 공개 우려? 보험중계센터 통하면 문제 해결”
의료IT 업계 관계자는 “병원 입장에서는 보험금 관련 서류를 발급하는 행정 업무 자체가 부담이 큰 편”이라며 “대형병원은 청구 간소화에 관심을 보이는 편”이라고 말한다. 이 관계자는 “현재 거론되고 있는 청구 간소화 제도에 병원들이 몸을 사리는 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비급여 정보가 넘어가는 사태를 경계하기 때문”이라며 “심평원이 아닌 민간업체에 전달되는 정보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덜할 것”이라고 밝혔다.
고객이 실손보험금을 청구할 때 비급여 치료가 발생했다면 진료비 세부내역서를 보험사에 제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비급여 정보가 심평원이나 보험사에 흘러갈 경우 병원 경영 정보가 공개되는 데다 수가 산정에도 불리할 것이라는 인식이 의료계에 깔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불어민주당 고용진 의원이 국회에 제출한 법안의 경우 의료기관과 심평원 간에 구축된 전산망을 통해 보험사에 관련 자료를 전송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의료계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지난해 10월 조용운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보험중계센터를 통한 청구 간소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실손보험 피보험자가 의료기관에 증빙서류 전자전송을 요청하면 증빙서류를 보험중계센터로 전송하고, 보험중계센터는 증빙서류를 확인한 후 보험회사로 전송하는 체계다.
피보험자임을 재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표준화된 서류만 전송한다. 보험중계센터는 증빙서류 확인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의료계가 우려하는 ‘심사 평가’ 업무는 피할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조 위원은 “보험중계센터가 운영될 경우 이해당사자에게 발생하는 여러 우려를 해소하면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청구 간소화 시스템 구축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진작에 도입됐어야 할 시스템이라고 지적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인슈어테크(Insurtech, 보험과 기술을 합친 용어)가 일상화된다. 병원에서 클릭 한 번이면 해결될 일을 수십, 수백 명이 보험금 청구에 동원되고 있다. 국가적으로 많은 인력과 자원이 낭비되는 것이다. 청구 간소화가 시행되면 무엇보다 소비자, 더 나아가 국민의 금전적·시간적·정신적 권익 보호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의료계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
10년 넘게 논의만 이뤄지고 있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의 혜택을 국민이 받기까지는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1월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의 관련 법안 논의가 불발에 그친 이후 법안심사소위 자체가 열리지 않았다. 모든 작업이 중단된 상태다.
2월 마지막 임시국회에서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해당 개정안은 빛을 보지 못한 채 자동으로 폐기된다. 결국, 오는 5월 30일부터 임기를 시작하는 21대 국회에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는 것이 바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제도라고 하겠다.
허인회 월간중앙 기자 heo.inho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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