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에틸렌을 ‘산업의 쌀’이라 불러요. 합성수지와 합섬원료, 합성고무 등 다양한 원자재를 생산하는 기초 원료이기 때문이에요. 한국은 이미 글로벌 에틸렌 생산량 4위에 오른 소재·화학산업 강국이에요. ‘소부장’으로 대표되는 기초산업의 경쟁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국가 경쟁력을 가늠할 핵심 전략산업이지요.
전자제품과 자동차만 한국의 산업 경쟁력을 대표하는 건 아니다. 화학산업은 우리 산업을 이끌어가는 또 다른 주역이다. 일반 소비재에 비해 주목을 덜 받을 뿐, 이미 한국 화학산업은 2018년 기준 글로벌 7위로 평가받는다. 각국 정부가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는 소재 산업인지라, 세계 7위라는 숫자가 갖는 함의는 더 클 수밖에 없다.
손욱의 대화 열두 번째 순서에선 노기호 전 LG화학 사장을 만났다. LG화학은 과거 ‘동동구리무’에서 시작해 국내 최고의 화학업체로 성장했다. 한국 화학산업 발전사에서 LG화학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노 전 사장은 LG화학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전문경영인(CEO) 자리에 오르기까지 한국 화학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30년 넘는 세월을 오롯이 ‘LG맨’이자 ‘화학맨’으로 살아온 그가 우리 화학산업 발전을 위한 고언을 쏟아놓았다.
손욱: 대한민국 화학·소재 산업의 역사는 LG화학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자회사는 광고나 홍보를 많이 하니 일반에 잘 알려졌지만 화학은 그렇지 않죠. 노 사장님은 대표적인 기술경영가(CTO)이자 기획 전문가이십니다. 현재 LG화학이 주도하는 이차전지 사업의 기초를 만드신 분이죠.
노기호: 1973년 8월에 옛 락희화학공업사에 입사했습니다. 처음에는 부산 동래공장에서 일하다 서울 본사에서 기획 일을 맡았죠. 대학원 2년을 마치고 입사해 동기들보다 연차가 조금 낮은 편입니다. 대학·대학원에서도 화학공업을 전공했고,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 LG화학이니 제 인생의 역사가 곧 LG화학의 역사가 된 셈입니다. 사실 입사할 당시만 해도 LG화학은 화학업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초라한 수준이었어요. 지금은 국내 1등을 넘어 글로벌 기업이 됐죠.
손욱: 사업 초기 이야기를 하시니, 예전 동동구리무 시절이 떠오릅니다.
노기호: LG화학 창립이 1947년입니다. 제 나이와 같죠. 그때 동동구리무를 만들었어요. 리어카에 드럼통을 싣고 북을 치고 다니니 동동, 크림의 일본식 발음인 구리무가 합쳐져서 동동구리무가 된 거죠. 그러다 화장품을 담을 용기가 필요해졌고, 이를 베이클라이트로 만들었어요. 소재 사업의 시작입니다.
그러다 잘 깨지지 않는 튼튼한 용기를 만들려고 플라스틱 제조에 뛰어들었습니다. 이후 다양한 플라스틱 소재로 확대했고, 원료인 폴리에틸렌, PVC 등을 제조했죠. 나중엔 더 상위 원료 생산을 위해 NCC(Naphtha Cracking Center, 납사를 분해해 석유화학 기초 원료인 에틸렌, 프로필렌 등을 생산하는 설비) 사업에 진출했습니다. 동동구리무에서 시작해 완전한 화학산업의 수직 계열화를 완성한 거죠.
2018년 기준 국내 에틸렌 생산량이 850만 톤입니다. 에틸렌은 화학을 넘어 ‘산업의 쌀’로 불리는 소재예요. 전 세계에서 1억6000만 톤이 생산되는데, 한국은 미국, 중국,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네 번째입니다. 한국 석유화학의 세계적인 위치가 4위라고 보는 배경이죠. 화학산업 전체로 보면 세계 7위 규모입니다. 우리 산업에서 화학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 거죠.
손욱: 얼마 전 유진영 LG화학기술연구원장이 은퇴했다는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LG는 10년 넘게 CTO가 연구와 경영을 총괄하는 문화가 잘 자리 잡혀 있죠. 훌륭한 인재를 뽑아서 10년 이상 맡기며 기회를 주는 게 LG의 특징이자 경쟁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장기 전략이 가능하고 임직원 간 신뢰관계를 만드는 뿌리죠.
노기호: LG화학은 74년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적자가 나지 않은 기업입니다. 그런 회사가 드물죠. 현역에서 물러난 후 2010년에 경영학박사를 땄는데, 논문 내용이 LG화학의 전략과 변화입니다. LG화학이란 기업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사례를 분석한 논문이죠. 기업의 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전략, 관리, 기업문화가 LG화학의 남다른 경쟁력을 이끌어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째, 얼리버드 전략입니다. LG화학은 자동차용 리튬폴리머 배터리, LCD TV용 편광필름같이 최초의 제품을 개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어요. 물론 편광필름은 일본이 먼저 개발했지만, 기술 도입은 완전히 틀어막았죠. 초기에 ‘뉴투코리아’를 목표로 했다면, 기술 경쟁력을 갖춰갈수록 ‘뉴투글로벌’을 지향했습니다.
얼리버드 전략으로 성공한 LG화학
손욱: 인재 관리 등 조직문화도 LG의 강점으로 꼽힙니다.
노기호: LG는 과거부터 한 번 고용하면 끝까지 간다, 또 실패를 용인한다는 문화가 강하게 자리 잡은 기업입니다. 그러다 보니 구성원들의 충성심, 즉 로열티가 강하죠. 더욱이 LG화학은 그룹에서 가장 먼저 생긴 회사라 직원들의 자부심이 무척 강합니다. 형제애로 표현할 만큼 끈끈함도 강하죠.
요즘 기준으로 보면 보수적일지 모르지만, CEO여도 입사 기수가 앞선 선배에겐 사석에서 깍듯이 대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새로운 비즈니스에 과감히 도전하는 혁신 지향 전략, 끈끈한 공동체 의식, 변화에 대한 적응력. 이 세 가지가 LG화학의 성공 요인이죠. 손 회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삼성이 거의 유일하게 따라잡지 못한 LG의 사업 영역이 바로 화학이죠.
손욱: 말씀대로 기업문화와 사업적 전략이 잘 자리 잡힌 회사와 그렇지 못한 곳의 차이가 큰 것 같습니다. 특히 소재 산업은 국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이죠. 정부가 우리 소재산업을 소중히 여기고 업계 발전을 도우면 일본과 충분히 어깨를 겨룰 소재강국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노기호: 석유화학 등 중후장대 산업에선 이미 일본을 제쳤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던 스미토모, 미쓰비시 같은 기업들이 모두 쪼그라들었죠. 현재 국내에서 NCC를 운용 중인 곳은 6개사인데, 신·증설 움직임도 무척 활발합니다. 에쓰오일,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같은 정유업체도 NCC에 뛰어들고 있죠.
2023년이면 에틸렌 생산 규모가 1500만 톤에 달할 거라 전망됩니다. 현재 에틸렌 생산 1위는 LG화학인데, 롯데케미칼이 미국에서 셰일가스를 기반으로 한 에틸렌 생산공장을 완공하면 LG화학을 뛰어넘으리라 예상됩니다. 이차전지 등 사업 다각화를 추구해온 LG화학과 석유화학 한 우물만 파온 롯데케미칼의 경쟁이 치열하죠. 과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는 아직까지 물음표입니다.
다만 양사의 경쟁이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전체 경쟁력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죠. 글로벌 기업들도 사업 다각화나 M&A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듀퐁과 다우케미칼 합병이 대표적이죠. 과감하고 선제적인 구조조정, 고부가가치 사업 전환 등 석유화학 업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거셉니다. 최후의 빛을 누가 볼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죠.
손욱: 해외 비즈니스 개척, 특히 중국 시장에 많은 투자를 단행하셨습니다.
노기호: CEO로 일하며 해외 사업 강화를 강하게 추진했습니다. 중국 사업에 특별히 많은 공을 들였죠. 다른 산업이 중국을 값싼 노동력을 활용한 생산기지로 활용하고, 거기서 나온 제품을 선진국에 수출하는 전략을 펴는 데 비해, LG화학은 중국에 직접 들어가 내수 시장을 공략하는 전략을 취했어요. 중국을 우리의 제2 내수 시장으로 만든다는 전략이죠.
실제로 중국에 합성수지 제품,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가공제품 등을 엄청나게 팔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기초 석유화학 분야에서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으니까요. 물론 우즈베키스탄이나 호주에서 설비 투자에 나섰다가 철수한 적도 있습니다.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새로운 사업 기회를 끊임없이 찾아야만 하는 게 CEO의 역할입니다.
손욱: 1970년대만 하더라로 화공과는 반에서 1등 하는 친구들이 선망하던 학과였어요. 의대보다 경쟁률이 높았죠. 결국은 소재가 세상을 흔들 수 있는 힘 아니겠습니까.
노기호: 맞습니다. 화학산업은 절대 망하지 않는 산업입니다. 모든 연관 산업에 기초소재를 제공하기 때문이죠. 다른 산업이 잘되면 소재 산업 또한 함께 올라타 호황을 맞게 됩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LG화학이 LCD 편광판 사업을 중국 화학·소재 기업에 1조3000억원에 매각한다고 하더군요.
한때는 편광판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잡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한 끝에 세계 1위가 됐습니다. LCD TV가 글로벌 히트를 치며 관련 사업이 엄청난 이익을 봤죠. 그러다 LCD가 하향화하면서 상황이 바뀐 거예요. 전자나 가전은 경우에 따라 망하는 제품이 있지만 화학은 소재를 공급하는 업종이라 전혀 다릅니다.
손욱: 일본이 과거 엔고 시대에도 살아남은 것도 화학 기술을 바탕으로 한 소재산업 덕분입니다. 그들의 소재·부품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 수준의 경쟁력을 가진 화학·소재 산업이 자리 잡으면 나라의 근간과 기초가 탄탄해집니다.
요즘 말하는 소부장 산업 육성 정도가 아니라 국가의 핵심 산업정책을 화학·소재 분야에 두어야 해요. 대한민국의 역사를 만드는 일이라 여기고 지속적으로 관심과 투자를 쏟아부어야만 합니다. 그간 우리는 겉모습만 화려한 전자에만 너무 매달려왔어요. ‘소부장을 살리자’는 말이 캐치프레이즈에 그쳐선 안 됩니다.
노기호: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온 산업을 휩쓸고 있지만, 화학은 모든 산업에 소재를 공급하는 기반산업입니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라 해서 소재를 외면해선 안 되죠. IT나 소프트웨어의 경쟁력 확보도 중요하지만, 바탕을 이루는 소재를 화학산업에서 공급한다는 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현직에 있을 때 편광판과 이차전지 등 일본의 기술을 들여오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어요. 하지만 절대로 전수해주지 않더군요. 결국 독자 개발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LG화학과 삼성SDI가 힘을 얻었고, 자동차전지 분야에선 이미 일본을 넘어서게 됐습니다.
손욱: 1995년 말 삼성SDI 사장으로 가니 니켈수소전지에만 매달려 있더군요. 당시 소니는 이미 리튬이온전지로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엔지니어들을 설득해 리튬이온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삼성은 리튬전지 양산 기술, 즉 제조기술이 없었어요. 반면 LG화학에는 제조 전문가가 많았죠. 삼성이 LG와 버금가는 실력을 갖춘 데는 행운도 따랐습니다.
마침 소니에서 리튬 배터리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부장급 4명이 회사 처우에 불만을 품고 그만뒀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거죠. 그중 세 사람을 삼성으로 모셔와 현장에 투입했습니다. 후방산업 격인 삼성전자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삼성SDI의 배터리 사업도 힘을 키울 수 있었죠. 현재는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시장이 크게 열리고 있는데, LG와 삼성의 차이가 꽤 벌어져 있어요. 노 사장님의 공이 크다는 생각입니다.
노기호: 이차전지 개발을 시작할 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자체 개발해서 간신히 일본 제품과 버금가게 만들었어도, 가격은 더 싸게 팔아야 했죠. 그러면 일본이 우리보다 싼 가격에 들어오면서도 품질은 더 고급화하는 겁니다. 우리가 1300밀리암페어(mA)를 내놓으면 일본이 바로 1500mA를 내놓는 식이었죠. 우리가 다시 기를 쓰고 품질을 높여 놓으면 일본이 또다시 따라잡는 게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여러 시련을 이겨내며 현재 자동차 배터리 시장의 강자가 될 수 있었죠.
손욱: 결국 본격적인 전기차 시대가 오면 배터리를 가진 자가 더 갑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노기호: 내연기관 자동차가 전기차 등 친환경차에 자리를 내주는 건 분명합니다. 다만 요즘은 전문 업종이라는 개념이 점점 옅어지면서 뭐든지 융합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IT와 BT, NT가 다 합쳐지는 시대니까요. LG도 직접 자동차를 제조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어요.
중요한 건 이차전지를 제조하는 데서 끝내는 게 아니라 배터리 생태계를 확고하게 갖춰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동차 제조사들과 파트너십을 맺어야 하는 이유죠. LG화학도 처음 전기차 배터리를 만들 때 미국에 연구소를 지어서 자동차 빅 3(포드·크라이슬러·GM)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함께 연구했습니다. 그렇게 미국 시장에 들어간 거죠. 배터리 연구소를 만든 게 제품 출시 10년 전인 1999년입니다.
대기업 출신 은퇴자들 적극 활용해야
손욱: LG화학에서 오랜 기간 기술총괄을 맡으셨습니다. 소재·화학은 정말 멀리 내다보고 넓고 깊게 봐야 하죠. 관련 인재를 잘 키워서 융합의 틀, 즉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예전처럼 중후장대에 돈을 쏟아부으면 제품이 나온다는 생각으로는 소재 산업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워요. 산업 생태계를 만들고 인재를 양성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절실한 타이밍입니다.
노기호: 발기인으로 참여한 CEO지식나눔이 올해로 딱 출범 10년을 맞았습니다. 삼성과 LG 등에서 퇴임한 CEO들이 주축이 됐죠.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젊은 사람들에게 전수하자는 목표로 지금도 열심히 활동 중입니다. 10년 전 발기인 19명, 회원 31명으로 출발했는데, 현재는 회원이 125명으로 늘었습니다.
회원 다양성 확보를 위해 창업, 벤처, 여성 CEO로 확대한 결과죠. 최근에는 한국장학재단 등과 함께 대학생 멘토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 경영자문 활동도 이어가고 있죠. 불행하게도 재정적 여유는 없는 상황이에요. 회원들이 강사료를 다 기부하고 있죠.
손욱: 일본엔 예로부터 ‘마찌고바(길거리 작은 공장)’가 많습니다. 공장 사장 10명 정도가 한 달에 한 번 모이는데, 그때마다 선생님을 한 분 꼭 모시더군요. 일본능률협회 전문가나 마쓰시타 같은 대기업의 품질본부장 출신들입니다. 일종의 학습회죠. 한 달간 겪은 사업상 어려움이나 문제점을 밥을 먹으면서 선생님께 물어보는 겁니다.
그러면 “다음 주에 자네 공장에 가서 봐준다”고 하는 식이죠. 이렇게 끈끈한 학습회가 전국에 조직돼서 돌아갑니다. 1~2인이 일하는 영세기업 사장과 대기업 사장이 거의 비슷한 수준의 경영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숨은 배경이에요. 한국에도 이런 제도를 도입해보자고 정부부처를 설득했는데 “좋은 방안이다”는 말만 할 뿐 후속 실행이 없어요. 안타깝습니다.
노기호: 대기업에서 경영과 제조 노하우를 익힌 은퇴자가 상당히 많은데, 그들이 주로 하는 일이란 게 등산입니다. 정말 안타깝죠.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이들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사진 원동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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