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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대한민국 ‘최초 수제화’ 거리에 발길이 뚝 끊긴 이유

한국 수제화의 역사가 끊길 위험해 처했어요. 95년 역사의 염천교 수제화 거리가 위태로워요. 코로나19 때문에 월 판매량이 평년의 5분의 1 수준까지 떨어졌고, 중국산 공세에 한계 상황까지 몰렸어요. 50년 장인조차 한 달에 100만 원도 벌지 못하는 상황에서 뚜렷한 돌파구가 보이지 않아요.

 

구두 윗부분인 ‘갑피’를 50년 넘게 만들어 온 주형래(68)씨가 재봉틀 앞에서 작업하고 있다.

 

2019년 12월 중국 우한 시에서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다. 한국도 2020년 1월 8일 코로나19 첫 환자가 확인된 이후 6월 10일 기준 1만1902명이 감염돼 276명이 사망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월 30일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를 선포하고, 3월 11일에는 팬데믹을 선언했다.

강한 전염력을 지닌 코로나19는 지금까지도 치료제나 백신이 없어 이동 제한이나 거리 두기 등 개인 간 접촉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보다 사태가 훨씬 심각한 유럽과 미국 등에서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동이 제한 혹은 금지되면서 순식간에 경제가 얼어붙었다. 경기 순환이 멈추자 산업의 약한 고리부터 흔들린다.

서울역 인근 ‘염천교 수제화 거리’에서 35년간 자리를 지킨 여성화 전문 제조업체 ‘드봉제화’. 약 132㎡(40평)이나 되는 작업장에 직원은 사장 포함 3명뿐이다. 이곳의 김평수 대표는 “코로나가 덮친 뒤로는 거의 망한 상태나 마찬가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코로나 이전에도 국내 제화업체는 이미 중국산에 밀려 힘을 쓰지 못하는 사양산업이었다”고 김 대표는 덧붙였다.

드봉제화도 2016년 사장까지 9명이 함께 일한 게 마지막 호황이라면 호황이었다. 코로나 사태 직전에는 5명이 일했다. 하지만 코로나가 덮친 뒤로는 찾는 사람도 주문도 거의 사라졌다. 현재처럼 3명이 일하며 현상 유지라도 하려면 매달 최소 500켤레 이상은 만들어야 한다고 김 대표는 설명했다. 하지만 코로나 초기인 지난 3월에 200켤레, 4월 150켤레, 5월엔 120켤레 만든 게 고작이다. “(평년에도) 6~8월은 비수기라 더욱 걱정”이라고 김 대표는 말했다.


한때는 전국으로 구두 팔려나가

 

‘갑피’를 신발 바닥에 접합하는 ‘저부’ 작업을 하는 조광섭(66)씨의 손. 거친 손에 47년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주형래(68)씨는 디자인에 따라 원단 가죽에 패턴을 만들고, 재단한 뒤 재봉질해 구두 윗부분인 ‘갑피’를 만드는 일이 주 업무이다. 1969년 중학교 졸업 후부터 지금까지 50년 넘게 이 일을 하고 있다. 조광섭(66)씨는 주씨가 만든 갑피를 신발 바닥에 결합하는 ‘저부’ 작업을 맡고 있다. 주씨 못지않은 경력(47년)을 자랑한다.

이곳에서 만든 구두 가격은 종류에 따라 켤레 당 5만~8만원(도매가 기준). 한 켤레 만들 때마다 두 사람에게 각각 돌아가는 돈은 7000원 남짓이다. 5월 판매량(120켤레)을 기준으로 하면 고작 84만원을 번 셈이다. 두 사람은 “용돈 벌이 삼아 일한다”고 하지만, 그마저도 일감이 뚝 끊긴 상황이다.

주씨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만 해도 기술자는 산업전사라 불리며 기능 올림픽에도 출전하고 돈도 좀 만졌다”며 “지금은 대우도 벌이도 바닥 신세”라고 말했다. 주씨는 또 “일을 배우려는 젊은 사람도 없어 우리가 죽으면 한국에서 수제화는 영영 사라질 것”이라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염천교 수제화 거리는 1925년 일제 강점기 때 서울역 인근에 피혁 창고가 생기고 구두 상인들이 하나둘 모여 들면서 조성되기 시작됐다. 6·25전쟁 이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중고 군화를 수선해 팔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최대 황금기는 1970~1980년대로, 이곳에서 만든 구두가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이곳의 점포들은 도매를 전문으로 했으나 지금은 도매와 소매를 겸하고 있다. 한 세기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의 명소 염천교 수제화 거리는 황혼기에 접어든 걸까?

 

전성기 시절 염천교 거리는 수많은 구두 업체로부터 생산 의뢰를 받았다. 드봉제화에서 주문자 상표 생산(OEM)용으로 사용했던 상표틀.

 

김평수 드봉제화 대표가 직접 가죽 원단을 자르고 있다.

 

드봉제화 창고에 쌓여 있는 가죽 원단. 양가죽은 인도·파키스탄 등지에서 수입한다.

 

완성된 하이힐. 뒷받침 가죽에 달린 액세서리 등 디테일이 눈에 띈다.

 

3명만 남은 드봉제화 직원들. 왼쪽부터 주형래씨(갑피 담당) 조광섭씨(저부 담당) 김평수 대표.

 

조광섭씨가 저부 작업을 하고 있다.

 

완성된 구두와 함께 갑피 등 중간 재료가 작업대 위에 정리돼 있다.

 

사진·글 신인섭 선임기자 shin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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