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 부자들의 약진에도 전통 부호들의 영향력은 여전히 공고해요. 국내 100대 기업 중 삼성과 현대차, LG, SK, 롯데 등 5대 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지난해에 비해 늘었어요. 다만 올해 50대 부자 조사에선 대내외 불확실성이 이어지면서 대기업 오너들 가운데서도 희비가 엇갈렸어요.

 

한자리에 모인 4대 그룹 오너가. 올 1월 열린 정부 신년합동인사회에 참석한 (오른쪽부터)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수석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올해 포브스가 발표한 전 세계 억만장자 리스트 1, 2위는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CEO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차지했다. 두 사람 모두 ICT 기술을 바탕으로 한 끊임없는 혁신으로 성공한 자수성가형 부자들이다. 빌 게이츠는 타고난 천재성으로 하버드대학 중퇴 후 MS-DOS를 개발해 PC 운영체제의 신기원을 열었다.

 

제프 베조스는 잘나가던 프로그래머 생활을 접고 친척들의 돈을 끌어모아 자기 집 창고에서 아마존닷컴을 창업했다. 두 사람 모두 제조 관리나 비용 절감 대신 기술과 혁신, 플랫폼 장악을 통해 이제껏 누구도 얻지 못한 부를 일궈냈다.

한국의 억만장자들은 어떨까.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5년째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변화의 물결도 거세다. 세계 최초로 바이오시밀러를 개발한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이 3년째 2위를 꿰차고 있고, 김정주 NXC 대표의 3위 자리도 굳건하다. 김범수 카카오 의장, 권혁빈 스마일게이트홀딩스 의장,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등 ICT 신흥 부자들이 당당히 톱 10을 차지한 것도 우리 사회 주력 산업의 틀이 서서히 재편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래도 한국은 여전히 제조와 수출 기반 경제다. 부족한 자원과 자본이라는 핸디캡을 노동력과 기술력으로 대체하며 국가 경제를 일궈왔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고속·고도 성장은 철저한 관(官) 주도의 계획 경제하에 이뤄질 수 있었다. 낮은 금리와 유치산업 보호, 해외자본 규제 같은 특혜 속에서 자동차, 철강, 조선, 화학, 전기·전자, 운송 같은 중후장대 기업들이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고, 이들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독특한 기업집단인 ‘재벌’을 만들어냈다.


삼성 오너家 자산가치·순위 상승세


올해 한국 부자 집계에서도 재벌 오너가의 영향력은 공고했다. 국내 100대 기업 중 삼성과 현대차, LG, SK, 롯데 등 5대 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지난해에 비해 늘었다. 다만 재벌 오너가의 전체적인 자산가치 감소와 개별 인물의 순위 하락 추세는 거스르기 어려운 흐름임이 확인됐다.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5대 그룹의 영향력은 올해도 변함없다. CEO스코어데일리가 매출액 기준으로 집계한 2020년 100대 기업을 보면 5대 그룹에 속한 계열사가 37개에 달한다. 재계 1위 삼성그룹이 10개사로 가장 많았고, 현대차그룹이 9개사, SK그룹 8개사, LG그룹 7개사, 롯데그룹 3개사 등이다. 삼성은 올 들어 삼성중공업과 삼성증권이 새로 100대 기업에 합류해 지난해에 비해 2개사가 늘며 세를 과시했다. 현대차도 현대트랜시스가 새로 합류하며 사이즈를 키웠다.

잘나가는 삼성그룹답게 이건희 회장을 필두로 한 오너가의 약진은 올해 조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대목 가운데 하나다. 이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삼성 사인방’의 자산가치가 모두 큰 폭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이 지난해에 이어 4위 자리를 지킨 가운데, 이 사장과 이 이사장도 지난해 대비 각각 5, 7계단씩 올라 나란히 16, 17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이들의 자산가치와 순위가 모두 감소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양상이다.

삼성 오너가의 선전은 그룹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의 주가 상승 덕이다. 외국인과 기관투자자의 매도세에 맞서 개인투자자들의 매수 행렬이 이어진 ‘동학개미운동’의 대표적 수혜주가 삼성전자였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개미들에게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초우량주라는 기대감을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종목이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코로나19 역풍 속에서도 반도체, 모바일 등 주력사업 부문에서 컨센서스를 뛰어넘는 실적을 올리며 투자자들의 믿음에 보답하고 있다. 다만 이 부회장의 경영승계와 관련한 불확실성 등 전형적인 오너 리스크는 앞으로 삼성이 풀어야 할 숙제로 지적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여동생인 최기원 SK행복나눔재단 이사장의 자산도 크게 늘었다. SK그룹은 주력사업 부문인 반도체와 에너지, 이차전지 등에서 견조한 성장세를 이어가는 가운데, 최근에는 SK바이오팜 상장 대박 등 바이오신약까지 사업 포트폴리오를 넓히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지주사인 SK 주가도 1년 사이 큰 폭으로 뛰어올랐다. 최 회장과 최 이사장은 SK 지분을 각각 18.4%, 6.9% 보유한 최대주주다.

한편 최 회장의 남동생인 최재원 수석부회장이 보유한 SK 지분은 166만 주로 지분율은 2.4%에 불과하다. 그룹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오너가 일원임에도 보유 지분이 적은 이유는 최 회장의 경영권 방어가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최 수석부회장은 과거 최종현 선대회장이 타계했을 때 자신의 상속분을 포기하고 최 회장에게 양보했다.

 

최 회장은 사석에서 “동생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말해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난 2018년에는 회장 취임 20년을 맞아 일가 친척들에게 자신의 SK 주식 329만 주를 증여하기도 했다. 당시 최 회장은 최 수석부회장에게 가장 많은 166만 주를 증여했다. 이전까지 최 수석부회장의 SK 지분은 전무했다.

지난해 7월에는 최 이사장이 오빠인 최 수석부회장에게 SK 보통주 29만6668주를 증여하기도 했다. 최 수석부회장은 한 달여 뒤인 8월 두 차례에 걸쳐 최 이사장에게서 증여받은 주식을 전량 매각했다. 이를 통해 최 수석부회장이 손에 쥔 현금은 약 580억원이다.


내우외환 시달리는 롯데家


롯데그룹 오너가의 부진도 눈에 띈다. 15년 전인 2005년 조사에서 범롯데가 오너 부자는 신동빈 당시 부회장과 신동주 당시 롯데알미늄 이사, 신격호 회장, 신춘호 농심 회장 등 4명이었다. 하지만 2019년 들어 신동빈 회장, 신동주 에스디제이 회장 두 명만 이름을 올렸고, 그나마 올 들어선 신동주 회장만 살아남았다.

5대 그룹 총수인 신동빈 회장이 부자 순위에서 50위권 밖으로 밀려난 것도 의외의 결과다. 신 회장은 지주사인 롯데지주와 롯데쇼핑 지분이 주요 자산이다. 특히 주력 계열사인 롯데쇼핑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중국 여행객 감소로 심각한 영업 타격을 맞은 상황이다. 지난해 7월 15일 14만원이었던 롯데쇼핑 주가는 올 7월 15일 기준 8만700원으로 42.4% 급락했다. 보유 지분을 기준으로 단순 계산해도 1년 사이 날아간 자산가치만 6700억원 이상이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형제간 경영권 분쟁에서는 사실상 신동빈 회장이 승기를 잡은 모양새다. 신동주 회장은 지난 6월 24일 일본롯데홀딩스 주주총회에서 신동빈 회장 해임안이 무산되자 관련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신동주 회장은 경영권 분쟁 이후 지금까지 수차례에 걸쳐 신동빈 회장 해임안을 강행했지만 한 번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동주 회장은 “신동빈 회장이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재판에서 유죄를 받고 구속되는 등 그룹의 브랜드와 평판, 가치 등을 크게 훼손했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즉, 준법 경영이 위협받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시선을 준법으로 돌리면 신동주 회장도 자유로울 수 없다. 민유성 전 산업은행장과 함께 ‘프로젝트 L’을 꾸민 사례가 대표적이다.

 

프로젝트 L은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 특허 취득 방해, 호텔롯데 상장 무산, 국적 논란 프레임 조성, 검찰 협조를 통한 신동빈 회장 구속 등이 주요 수단이었다. 목적을 위해 해사행위를 서슴지 않는 그가 준법을 논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 재계의 여론이다. 롯데지주와 중간지주 격인 호텔롯데의 대주주인 일본롯데홀딩스와 광윤사의 다른 주주들도 신동빈 회장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오너가 부자들 중 여성은 지난해와 같이 올해도 5명에 그쳤다. 이부진 사장(16위), 이서현 이사장(17위)이 순위 가장 상단에 이름을 올렸고, 최기원 이사장(21위)도 지난해보다 12계단이나 순위가 급등했다. 반면 범삼성가 중 이명희 신세계 회장만 자산가치(1조135억원)와 순위(42위)가 모두 지난해 대비 뒤로 밀렸다. 이화경 오리온그룹 부회장도 9652억원으로 1조원 자산이 무너졌고 순위도 3계단 하락해 47위를 기록했다.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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