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파사쥬는 '현세적이며 장수욕을 숨기지 않고, 과거를 음미하면서 살아가는 새로운 공간'이다. 또한 이는 어제의 기억과 전통을 오늘로 연결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인생 최전성기에 나의 마주할 만한 최고의 사색 공간으로 함께 만나보자.
신발과 의자. 빈센트 반 고흐가 생전에 가장 열심히 그린 그림 중 하나다. 소재로서만이 아니라 고흐 스스로가 겪었던 37년간 험난한 인생의 주제로서 느껴지는 그림이 헤진 신발과 무너질듯한 의자다. 고흐를 제외할 경우, 신발과 의자를 그림의 단일 소재나 주제로 묘사한 화가는 극히 드물다.
신발은 험한 인생을 함께하는 여정(旅情)의 필수 도구이자 증거다. 실제 고흐는 고향 네덜란드에서 파리까지의 수백㎞를 도보로 여행한 적도 있다. 의자는 고난과 시련을 동반한, 먼 길을 걸어간 뒤에야 비로서 안착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휴식처다. 비록 장식 하나 없는 싸구려 목재의자지만, 몸을 기대면서 육체와 영혼을 추스를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다. 고흐 인생 자체가 신발이었다고 할 때 고흐가 그린 꿈이 의자였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런 고흐에게 생애 마지막 순간 주목했던 최대의 관심사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황금색으로 물들어가는 밀밭의 내일이다. 자신의 창문 바깥쪽을 가득 메운 넓은 밀밭과 노랗게 물들어가는 밀알의 변화가 고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유일한 관심사였다. 하루하루 변해가는 밀밭의 노란색이 내일은 또 얼마나 신비하고도 성스럽게 나타날지? 거대한 들판을 캠퍼스로 한, 신이 창조해내는 자연의 변화만이 고흐를 초조하게 만든 최대 관심사였다. 돈·명예·권력·여자와 같은 속세의 가치와 전혀 무관한, 밀밭을 수놓는 신비한 변화만이 고흐 생애 마지막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까마귀로 뒤덮인 밀밭의 풍경은 자살로 끝나는 생애 최후 순간에 그려진, 삶의 마지막 때 주목했던 세상에 대한 기록이자 증언이다.
‘과연 어떤 것이 생애 마지막, 가장 관심 있게 느껴질 것인가?’
밀밭과 고흐에 관한 얘기를 알고 난 뒤부터 생긴 자문자답형 습관이다.
꿀과 향, 100년 전 인류가 가장 신성시하던 상품
비교적 죽음과는 거리가 먼 필자 입장에서 본다면 한마디로 답을 내리기는 어려울 듯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변해갈 수도 있다. 그러나 큰 윤곽은 잡힌다. 오래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 기억에 깊이 저장되고 속세를 넘어선 세상 전체를 범주로 한 부분, 유사 이래 인류 전체와 신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영역, 크고 넓은 것보다 작고 보잘것없지만 길게 이어질 수 있는 세계…. 그런 범주 속의 세상이 필자의 마지막 순간에 한층 더 주목할 부분이 되지 않을까 미리 예상해본다.
꿀과 향은 필자 스스로 내린, 현재를 기준으로 한, 자문자답의 결과물이다. 길면 1만 일, 짧으면 6000일 정도 남은 인생이지만, 꿀과 향은 필자가 규정한 범주 속의 속성에 알맞은 소재이자 주제라 판단된다. 고흐가 옆자리에 앉아 있다면 밀밭과 밀알의 변화에 대한 그의 정열에 열심히 귀 기울일 것이다. 더불어 필자가 소중히 여기는 꿀과 향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맛보고 느끼라고 권할 것이다.
신이 선물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하나로 압축한 꿀, 아름다운 인생을 향유하는 인간이 바치는 신을 향한 성스러운 의식의 결정체로서의 향이다.
꿀과 향은 외국 여행에 나설 때 필자가 가장 먼저 찾는 관심 영역에 들어간다. 꿀과 향은 다양하고 섬세하며 복잡하다. 맛이나 냄새도 천차만별이지만, 만들어진 곳이나 만드는 과정, 만드는 사람들과 지역에 따라 다르다. 세속적 의미가 아닌, 고유의 의미와 가치라는 측면에서 보면 넓고도 깊은 영역의 세계다.
꿀과 향은 100년 전 인류가 가장 신성시하던, 특별한 상품이기도 하다. 보통사람들과 거리가 먼, 종교 지도자나 왕과 같은 특별한 신분들만이 즐기던 물건이다. 꿀은 삶의 기쁨을 더해주는 기호품으로도 활용되지만, 보양식이자 예방 약제로서 통하기도 했다.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면서 설탕까지 넣은 다디단 대량생산 상품도 나타나지만, 꿀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냄새만으로도 진짜 여부, 아니 자연산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향의 경우 불교나 가톨릭에서 보듯, 신전에서 사용되는 성스러운 도구로 통했다. 기원전 3500년 이집트 파라오 신전의 벽화를 봐도 사원 내 향은 제사장이 가진 특권 중 하나였다. 향수는 자연산인 향에다 알코올과 화학적 성분을 가미해 대중적으로 만들어진 인공제품이다. 배보다 배꼽이 큰 격으로, 향을 원료로 해서 만들어진 향수의 가격이 한층 더 비싸다.
세상에는 브랜드에 약한 사람이 많다. 100년 전에는 향수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가격이나 유명인 애용품으로서의 향수가 아니라 자연에서 찾고 캐내는 생활 속의 향이다. 필자가 가장 아끼는 예맨산 머스크(Musk)향은 1년 내내 애용할 만큼 진액이지만, 현지에서 구입한 가격은 2달러 정도에 그친다. 예수가 태어난 날 동방박사 3명 중 2명이 향을 들고 성모 마리아를 찾았다. 향은 신을 위한 제단의 결정체인 동시에, 인간으로부터 악을 떨치게 만드는 방패 같은 역할도 했다.
‘과연 어떤 것이 생애 최전성기에, 가장 관심 있게 느껴질 것인가?’
꿀과 향을 가까이하던 중 갖게 된 또 다른 의문이다. 꿀과 향이 생애 마지막만이 아닌, 최전성기의 관심 영역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애 최전성기의 관심사라고 한다면, 대략 40대, 50대 중년기 영역에 들어갈 듯하다. 청년기에 접했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무한정 동경이 아니라, 한번쯤 세상을 경험한 뒤 스스로 판단을 내리면서 가치를 재음미하는 시기다. 어제의 경험을 통해,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것이 눈앞에 나타나도 어느 정도 판단이 설 수 있는 때다. 고집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마치 땅속에서 막 건져 올린 고대 도자기를 다루는 자세로 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파리에 있는 지붕 덮인 골목길
삶과 세상에 대한 필요로서의 ‘욕(欲)’도 빼놓을 수 없다. 뭔가 만들어나가고 키우고 세우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다. 새삼스럽게, 돈에 대한 욕구도 생긴다. 브랜드 가방과 큰 아파트를 사기 위한 돈이 아니라,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기반으로서의 돈이다. 장수에 대한 욕구도 생긴다. 오래 살아서 세상에 널린 가치와 의미를 깊고도 넓게 느끼고 싶다는 이성적 본능에 따른 것이다. 물론, 본능적 본능에 충실해 인생 막판까지 가서 스스로를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맙게도 신은 갱년기라는 제2의 육체를 선물했다. 신체가 달라지면서 거기에 맞춰야 하는 것이 갱년기 이후의 삶이다. 삶의 나침반을 20대 청년기에 맞춰 영원히 젊어지려는 사람들도 많다. 보톡스도 쓰고 자식뻘 띠동갑 상대와 재혼도 하지만, 뭔가 어색하고 추하게까지 느껴진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로부터 느껴지는 성숙미가 없다. 세상을 보면, 죽을 때까지 성숙미와 무관한 사람들이 판을 치는 듯하다. 자세히 보자. 어딘가에서 찾아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생애 최전성기의 관심사’의 대상으로 필자가 모두에게 권하는 구체적인 장소가 하나 있다. 굳이 성숙기에 들어선 세대가 아니라 해도 의미를 발견해낼 수 있는, 최전성기 삶의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서의 무대다. 한번 주어진 인생인 만큼 그 누구도 헛되게 보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1초를 아끼며 즐겁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생애 최전성기의 특징 중 하나일 것이다. 그 같은 시간대에 접어든 사람, 그 같은 삶의 영역에 들어선 세대들에게 필자가 제안하고 싶은 세계다. 현세적이며 장수욕을 숨기지 않고, 오늘만이 아니라 어제도 느끼면서 살아가려는 개개인을 위한 새로운 공간이다. 프랑스 파리 곳곳에 거짓말처럼 숨어 있는 파사쥬(Passage)가 주인공이다. 프랑스어로 ‘Passages couverts de Paris’ 즉 파리에 있는 지붕 덮인 골목길이란 의미의 공간이 바로 파사쥬다.
파사쥬는 관광객들의 눈에 띄지 않는 비밀스러운 곳에 숨어 있다. 물론 굳이 찾으려면 쉽게 발견할 수는 있다. 그러나 눈앞에 미녀가 어른거리는데 미녀 뒤의 풍경을 즐기려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파리는 어린이 장난감처럼 신기하고 신비스러운 곳이다. 먹고 보고 느낄 것도 넘친다. 파사쥬는 그 같은 눈으로 보면 찾기 어려운 곳이다. 골목길이 그러하듯 도로나 큰 건물, 큰 기념관과 무관한 곳이다. 파사쥬는 길어야 150m 길이에 불과하다. 짧으면 20m짜리도 있다. 파리 지리에 익숙하지 않는 한 숨은 골목길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골목길 파사쥬를 생애 최전성기와 연결시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한 번이라도 돌아다녀본다면 필자의 제안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듯하다. 고흐의 인생 최전성기가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파리에 머무는 동안의 기억은 그중 하나일 것이다. 파사쥬도 그가 경험했던 인생 최전성기의 추억 중 하나라고 믿는다.
파사쥬는 오늘보다는 어제가 존재하는 곳이다. 내일은 극히 드물다. 오늘이나 내일은 파사쥬를 나가는 순간, 도로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파사쥬로 들어가는 순간 낯익은 어제가 나타난다. 일본 브랜드 가운데 무지(MUJI)라는 상품이 있다. 프랑스에도 진출해 있지만, 전체적으로 회색 계통의 심플한 상품이다. 가격도 적당하지만 디자인에 특화한 깜찍한 제품이다.
무지의 글로벌 성공신화를 다룬 책이 최근 일본에서 발간됐다. 핵심은 간단하다. ‘모두가 상상하는 디자인이나 용도보다 조금 앞선 상태에서 물건을 출시할 것’이란 게 경영스타일이라고 한다. 뒤처지는 것은 물론, 너무 앞서가도 안 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적당한 선에서 상상이 가면서 머리를 탁 치면서 즐길 수 있는 상품이다. 파사쥬는 그러한 과거의 무지 브랜드 스타일의 공간이다. 19세기나 그 이전의 오래된 어제가 아닌, 머릿속에 기억된 흑백필름을 발굴해낼 수 있는 추억의 현장이다.
파리지엥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주거지
파사쥬는 보행자 천국 골목길이다. 자동차는 물론 바퀴 달린 도구의 출입을 불허한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곳이다. 천정은 투명한 유리로 연결돼 있다. 해가 중천에 뜰 때는 태양빛을 즐길 수 있다. 따라서 파사쥬 천정 쪽을 보면 장식용 식물들이 엄청나게 진열돼 있다. 뚜껑이 닫힌 골몰길이란 점에서 실내와 같은 아늑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파사쥬 밖 도로와 달리 소음이나 먼지도 없다. 오늘과 내일은 바쁘고 어수선하다. 어제는 조용하고 안정돼 있다. 파사쥬의 핵심은 1층 가게들이다. 일부는 2층 위를 서로 연결해 주거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파리지엥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주거지 중 하나가 파사쥬 내 2층 주거지다.
파사쥬가 유리로 연결됐다는 것은 파사쥬의 출생과 관련된 키워드이기도 하다. 파사쥬가 처음 등장한 것은 1791년이다. 프랑스혁명 2년 뒤로 현재는 큰 건물로 대치된 파사쥬 훼이도(Passage Feydeau)다. 이후 1850년대까지 무려 150개의 크고 작은 파사쥬가 등장한다.
파사쥬의 기원은 종적(縱的) 통행로 정비와 관련이 있다. 유럽의 대도시는 로마 이래 고대도시에서 출발한다. 로마에서 보듯 고대도시는 일직선으로 ‘뻥’ 뚫린, 횡적 도로에 주력할 뿐이다. 직선으로 이어진 큰길을 하나 닦을 뿐, 큰길을 이어주는 종적 통로에는 무심하다. 횡적 도로는 마차들로 인해 사람들의 안전한 보행을 가로막았다. 파사쥬는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면서 파리에 등장한다. 단순한 통로 개념이 아닌, 상업지대로서의 종적 연결고리다. 프랑스 혁명은 만인 대(對) 만인의 평등으로 발전된다. 때마침 프랑스의 식민지가 확장되면서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된다. 사람과 물건이 넘치면서 장사에 눈뜨기 시작한다.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왕실에서 일하던 장인들도 밖으로 쫓겨나면서, 물건의 질이나 양도 급상승한다.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곳에 물건을 팔자는 발상이 일기 시작한다. 손님을 끌 최대의 아이디어는 바로 유리다. 당시 유리는 고급제품으로 인식됐다. 왕이나 귀족의 전유물이던 유리가 보통 사람들에게 전달된 시기가 파사쥬 출생기와 겹친다. 더불어 고급제로 인식되던 대리석을 바닥에 깐다. 예술적 감각을 불어넣은 모자이크형 대리석이 혁명 후 파리지엥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흰 대리석인 만큼 바닥이 더러워지기 쉽다. 파사쥬 조합을 통해 입구나 출구에서부터 신발 바닥을 깨끗이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파사쥬 바닥도 부지런히 청소한다.
청결은 파사쥬가 갖고 있는 이미지 중 하나다. 맥도널드 햄버거가 일상화된 것이 1960년대다. 맛이 아니라, 청결로 승부를 낸 것이 당시 맥도널드의 비즈니스 전략이다. 햄버거 제조는 물론, 바닥·화장실·천정 모두 청결한 곳이란 광고를 막 탄생한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내보낸다. 청결은 상품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끌어올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다. 19세기 파사쥬는 청결의 대명사다. 유리·대리석과 더불어 막 등장한 가스등도 파사쥬의 명물로 떠오른다. 밤에도 쉽게 물건을 사고 즐길 수 있는 실내공간으로 떠오른다. 서로가 경쟁하는 가운데 내부 장식도 한층 더 화려하게 변해간다.
백화점이 프랑스에서 탄생한 까닭은
hotel chopin
고급제인 유리 대리석, 신식 문명의 상징인 가스등 덕분에 손님들이 넘치게 된다. 비나 바람도 피해주고 겨울에는 따뜻하기까지 한 공간이 파사쥬를 통해 파리지엥에게 선보인 것이다. 필자는 노천카페에 대해 별로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 19세기나 20세기 초라면 모르겠지만, 21세기 노천카페는 자동차 소음과 매연 그리고 먼지로 범벅이 돼 있다.
노천은 아니지만, 골목길카페는 필자가 즐기는 곳이다. 매연·소음에서 해방된,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 파사쥬 카페다. 골목길 장사가 그러하듯 판매상품은 다양하다. 의식주에 관련된 모든 것이 파사쥬에서 접할 수 있다. 작은 카페에서부터 와인·치즈·빵·의류·구두·서점·예술장식품, 심지어 사우나·호텔·극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품과 엔터테인먼트가 파사쥬 안으로 빨려 든다. 필자가 즐기는 꿀과 향도 파사쥬 안의 메뉴 중 하나다.
역사적으로 보면, 파사쥬는 백화점의 전신에 해당되는 집단 상업지대에 해당된다. 백화점의 기원은 1838년, 파리에서 시작된다. 프랑스가 백화점 탄생지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파사쥬를 건물 하나에 통째로 옮긴 것이 백화점이다.
파사쥬는 파리에 갈 때마다 들르는 고정 방문지다. 의도적으로 찾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접한 뒤 그대로 빨려 들어갈 때도 많다. 유리로 덮인 전통 골목길을 기준으로 할 때, 현재 파리에는 20여 개 정도의 파사쥬가 있다. 1850년대 시작된, 하우스만(Haussmann) 파리 도시계획으로 인해 150여 개 대부분이 사라진다. 보통 파리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근대적 도시계획의 첫 희생양이 된다. 넓은 도로와 높은 건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파사쥬가 사라진다. 당시 도시계획 범주 밖이었거나, 20세기 후반 들어 개축 복원된 20여 개의 파사쥬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백화점 골목길이 21세기 파사쥬이기는 하지만, 자세히 보면 각각의 개성이 남다르다. 뭔가 특화된, 특성화된 캐릭터로서의 파사쥬다. 필자가 가장 아끼는 파사쥬는 파리 제2지구에 있는 비비엔누(Vivienne)다. 파리 제2지구에 1823년 들어선 파사쥬에 들어섰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바로 옆에 붙은 유서 깊은 곳이다. 다른 파사쥬 대부분이 그러하듯 역사적 유물로 지정된 곳이다. 규모는 비교적 긴 길이인 176m에 달한다.
파사쥬가 갖는 예술미는 필자가 비비엔누에 애정을 갖는 가장 큰 이유다. 대리석 하나, 천정의 벽화, 중간의 아치형 장식이나 샹들리에, 가게의 장식수준이 최고급 예술수준이다. 벽에 그려진 나폴리 스타일의 그림은 섬세하고도 깊다. 파는 물건도 대단하지만, 파사쥬 자체가 너무도 아름답다. 카페·구두집·레스토랑·수예품·과자·판화·장식품을 파는 가게로 이뤄져 있지만, 하이라이트는 역시 고서점이다. 비비엔누는 중간 부분에서 90도 꺾어지는 구도다. 장식품이나 대리석의 모자이크도 확 변하지만, 중간에 위치한 고서점이 눈에 띈다. 프랑스어를 몰라도 서점에 들어가 100년 이상 된 책을 보는 것만으로 부자가 된 느낌이다.
파리 제 2지구에 위치한 파사쥬 파노라마스(Panoramas)도 유서 깊은 곳이다. 1800년에 세워진 유형문화재로 길이도 133m에 달하는 대형 파사쥬다. 파리의 우표나 동전, 화폐 수집가들의 성지인 산 마르크(Rue Saint Marc)거리를 따라 이어져 있다. 원래 개인 저택을 연결한 파사쥬로, 파노라마스란 이름은 입구에 걸린 초대형 파리시 풍경화에서 유래됐다. 19세기 중엽 캐리커처 초상화 화가로 유명한 장피에르 당탕(Jean Pierre Dantan)이 정치인 상대로 한 작품 전시로 인기를 끌면서 이후 ‘뮤제 당탕(Muse Dantan)’으로 불리기도 한다.
동심의 현장이자 흑백시대 추억의 무대
내부는 바깥쪽 거리처럼 동전·화폐·우표와 같은 계통의 가게가 대부분이다. 작은 가위, 다림질 도구도 상품으로 나와 있다. 뭔가 하나를 깊이 파고 관련 물건들을 상품화해서 비즈니스로 연결하는 것은 프랑스인과 일본인의 공통된 캐릭터다. 파노라마스는 프랑스인 특유의 마니아 캐릭터를 절감할 수 있는 역사 탐험의 현장이다.
파리 제 2지구에 위치한 파사쥬 푸랑스(Princes)는 어린이와 함께 파리를 찾는 사람, 동심세계를 다시 한번 느끼거나 연구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는 곳이다. 장난감이나 어린이 기호품을 주로 파는 파사쥬다. 푸랑스와의 접점은 전혀 우연히 이뤄졌다. 근처 레스토랑에 점심을 예약했지만, 길을 헤매던 중 얼떨결에 통과했다. 파리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은 시간에 철저하다. 워낙 손님이 많기에, 20분 정도 늦어지면 예약이 취소된다. 이미 늦어진 김에 점심은 길에서 해결하고, 푸랑스를 둘러보기로 했다.
유럽 장난감 가게는 어른들을 위한 서점에 해당된다. 직접 확인했지만, 작은 베니스 안에서만도 장난감 가게가 10개는 된다. 언제부턴가 한국에서는 ‘장난감=지능상승 도구’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전부는 아닐 듯하다. 유럽인들은 어린이에게 어울리는 추억, 스토리텔링의 흔적으로서 장난감을 대한다. 어릴 때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아톰 캐릭터나 바퀴 달린 자동차에 대한 기억은 50대인 필자의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성인이 돼서 갖는 벤츠 자동차 이상의 가치와 기억 그리고 추억이 어릴 때 놀던 장난감 자동차 속에 배어 있다. 파사쥬 푸랑스는 그 같은 동심의 현장이자 흑백시대 추억의 무대다.
입구는 레고(Lego) 가게에서 시작된다. 안으로 들어서면 디즈니랜드의 인기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캐릭터들이 들어서 있다. 대략 세계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상품들이지만, 파고 들수록 프랑스만의 특별한 동심을 발견해낼 수 있다. 15유로짜리 인형의 경우, 직접 옷을 바늘로 기워서 입히는 식이다. 옷도 준비된 염료를 통해 새로운 색상으로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재료와 기본 도구는 제공하지만,인형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어린이에게 맡겨진다. 자세히 보니까 20유로짜리의 깜찍한 어린이용 미싱기도 팔고 있다. 미국 어린이의 경우 매년 돌아오는 할로윈데이에 맞춰 10달러 내외의 의상을 구입한다. 할로윈데이 의상은 ‘메이드 인 차이나’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한 번 입고 버리는 일용품이기도 하다.
푸랑스에서 만난 할로윈데이 의상은 어떨까? 재료·색상·디자인을 스스로 선택하는 구도다. 스스로 만들어 입고, 일회성이 아닌 1년, 2년 뒤에도 입을 수 있는, 나만의 패션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준다. 인형 옷만이 아닌 10세 미만의 장난감도 DIY시대다. 플라스틱 제품도 있지만, 보통 다섯 배는 비싼 나무로 만든 친환경 소재가 대부분이다. 역사(驛舍)의 경우, 한꺼번에 왕창 사는 것이 아니라, 목재로 된 열차·신호기·역무원과 같은 상품들을 하나씩 수집해나가면서 전체로 나아간다.
두 세대 전 장난감을 통해 되돌아보는 인생의 의미
어린이의 머리가 아닌, 기능성과 인내심을 기르는데 주목하는 것이 파사쥬 푸랑스에서 만난 프랑스 장난감의 특징이다. 당연하지만, 푸랑스는 어린이들로 붐빈다. 가족들과 함께 들른 어린이들이지만, 의외로 할아버지·할머니 커플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주로 한 세대 이전의 장난감을 파는 가게다. 손자를 위한 것이 아닌, 추억이 배인 한 세대, 두 세대 전 장난감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되돌아본다. 필자의 ‘뻔한’ 상상력이지만, 오래된 장난감을 파는 가게 앞에서 만난, 60년 전 애인에 관한 얘기는 어떨까?
파리 제 9지구에 있는 쥬프로와(Jouffroy)는 20여 개 파사쥬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사람들이 붐비는 몽마르트르 대로(Boulevard Montmarte)에 있고, 파리에서 탄생된 밀랍인형 전용 전시관 그레방(Grevin) 안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유명인 밀랍인형을 보면서 쥬프로와에 자연스럽게 밀려드는 셈이다. 1845년 세워진 파사쥬로 길이도 140m에 달한다. 바닥 대리석이 밟기 미안할 정도로 고가에다 예술적이다. 가게는 서점·수예·카페·의류·그림·레스토랑 등 다양하다. 하나에 1000유로에서 시작되는 노약자용 보조막대도 있다. 고급스러운 장식과 소재로 만들어진, 파리의 명소이기도 하다. 역사에 남다른 관심을 갖는 프랑스인 특유의 국민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룹 여행을 통해 파사쥬 역사를 공부하는 프랑스인들도 볼 수 있다.
고서점은 파사쥬의 필수요소다. 필자는 운이 좋게도 100년 전 동부유럽의 민속의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책을 20유로에 살 수 있었다. 수동 프린터를 통해 제작된 책으로, 200유로라 해도 아깝지 않을 수준이다. 서점 주인에게 가격을 잘못 부른 것이 아니냐고 되물으니까 상하 두 권이었는데 한 권이 사라졌기에 싸게 판다는 답이 돌아왔다. 완벽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의미다.
쥬프로와 안에는 파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호텔도 들어서 있다. 호텔 쇼팽(Chopin)으로 하루 숙박비는 200유로 정도다. 파사쥬에 빠진 사람이라면 한번쯤 묶게 되는 19세기 시간여행의 무대가 될 듯하다.
파사쥬는 한국의 북촌마을이나, 중국의 후통(胡同), 일본의 로지(路地)의 프랑스 버전이라 볼 수 있다. 한국인이 북촌마을을 자랑으로 여기듯 파사쥬도 프랑스인의 가슴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북촌마을·후통·로지와 다른 것은, 이미 그 가치를 200년에 알고 지금까지 소중히 보관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화와 더불어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남아 있는 파사쥬를 통해 어제의 기억과 전통을 21세기, 22세기로 연결해가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관광단지로 둔갑하면서 화장을 하는 식이 아니라, 생활 속에 묻어나는 기억의 무대이자 향연이다. 인생의 최전성기에 느낄 수 있는 성숙미가 묻어는 현장으로서의 파사쥬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