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SNS 등이 등장한 이후 우리는 과거에 비해 더욱 많은 정보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고, 누구와도 손쉽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지난 몇 십 년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스마트폰, SNS 등은 편리함과 동시에 우리에게 실시간 스트레스도 함께 가져왔음을 우리는 익히 느끼고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수 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들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스트레스를 어떻게 관리해야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까?
환자가 병원을 찾을 때, 가장 알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내가 왜 아픈가’이다. 원하는 것은 고통의 제거이지만, 알고 싶은 것은 고통의 이유인 것이다. 하지만 의사들로부터 확실한 해답을 듣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 환자가 처한 상황이나 외부환경을 의사가 단번에 파악할 수는 없다. 이럴 때 의사로부터 환자가 가장 많이 듣는 대답 중 하나가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인데, 이 대답을 들으면 환자는 더욱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도대체 스트레스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도대체 무슨 스트레스를 어떻게 줄여야 한단 말인가.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심화시키는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인터넷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점이다. 스마트폰의 이용자는 세계적으로 급증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인의 스마트폰 이용은 세계최고 수준이다. 독일의 뇌과학자 만프레드 슈피처의 <사이버 스트레스>(박병화 옮김, 알마, 2017)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한국만큼 청소년의 스마트폰 이용률이 높은 국가는 없다. 인구비율로 따졌을 때 16세 이상의 한국인 가운데 스마트폰 이용자가 70퍼센트 이상이다. ‘SNS 활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으면,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스트레스는, 10대 청소년들의 인간관계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많은 사람이 ‘SNS피로도’를 호소하며 알림음을 끄거나 페이스북 등에서 탈퇴하고 있다. 스마트폰 사용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수면 장애와 우울증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잠들기 직전까지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수면장애와 우울증 비율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현저하게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인터넷 사용은 끊임없이 ‘내 삶’을 ‘불특정 다수의 삶’과 비교하게 만든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올라온 타인의 멋지고 자랑스런 라이프스타일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며, 사람들의 자존감은 예전보다 훨씬 자주, 지속적으로 상처를 입게 되어 있다.
▒ 스트레스: 위기와 기회의 야누스적 얼굴
이렇듯 스트레스로 인해 극도의 정신적 황폐함을 겪을 수도 있지만, 오랜 스트레스로 고생하다가 뜻밖에 새로운 결정을 내리거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을 찾기도 한다. 스트레스가 부정적인 역할을 하든 긍정적인 역할을 하든, 중요한 것은 스트레스가 어떤 결정적인 ‘신호’라는 것이다. 기존의 자극을 피해야 한다는 신호, 혹은 자극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라는 신호, 더 나아가 그 자극과 고통을 통해 내 삶을 돌아보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사실 현대인은 각종 스트레스를 피하느라 스트레스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할 겨를이 없다. 가족, 직장, 학교, 병원, 군대, 관공서 어느 곳이든 스트레스 없는 곳이 있겠는가. 하지만 잠시 스트레스를 향한 알레르기 반응을 멈추고, 스트레스의 효과를 생각해보자. 모든 행복한 일에는 어느 정도 스트레스가 공존하지 않았는가.
모든 스트레스를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없지만, 최근 인지행동 치료 분야에서는 스트레스를 통제하는 다양한 기법이 개발되고 있다. 데이비드 번즈의 <패닉에서 벗어나기>(박지훈 옮김, 끌레마, 2013)는 의사가 직접 환자의 삶에 개입하여 그의 스트레스를 함께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는 환자가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자신이 먼저 나서서 각종 시범을 보여주기도 하며 환자의 치유 과정에 적극 개입한다. ‘노출모델’에 따른 인지치료는 자신이 가장 피하고 싶은 스트레스에 오히려 자신을 적극적으로 노출시키는 방법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한 것에 착안하여, 번즈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두렵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은 실제 외부 상황이라기보다는 내 ‘생각’이라는 것이다. ‘두려움을 생각하는 내 마음’을 바꾸면, 두려움을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고, 다양한 자극을 ‘공포’로 인식하는 사고방식 또한 바뀔 수 있다.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것은 과거의 상처와 연관된 비논리적 사고에서 비롯되므로,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면 공포를 느끼는 방식 또한 바꿀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 인지치료: 과잉된 공포는 정신의 조작극
번즈 박사는 공포나 긴장감을 느끼는 뇌의 활동이 일종의 정신적 사기극이라고 본다. 예컨대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고층건물의 엘리베이터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 정말 위험하구나, 나는 곧 떨어져 죽고 말 거야!” 발표공포증을 앓는 사람은 발표가 시작되기 전에 이런 망상에 빠진다. “나는 분명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겠지. 모두가 날 바보 취급할 거고, 나는 무대 위에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 거야.”
위험을 과장하는 것도 공포증 환자의 특징이다. 피를 두려워하거나 건강염려증을 앓는 사람들은 작은 위험에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느낀다. 예를 들어 면도를 하다가 살짝 찰과상을 입기만 해도 이렇게 공포에 떠는 것이다. “아, 왜 이렇게 피가 많이 날까! 혹시 뭔가 심각한 병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작은 스트레스 요인에도 커다란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은 자극 자체보다도 자극을 받아들이는 자기 자신의 마음 때문에 더 고통받는다.
번즈 박사는 환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스트레스를 오히려 치유의 기회로 역전시키는 방안을 강구한다. 제프리라는 환자가 ‘나는 결코 패소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느끼고, 자신이 이 패소로 인해 쫄딱 망해 노숙자가 될 것이라는 과잉된 공포로 힘들어 하자, 번즈 박사는 ‘실패한다면 모든 사람이 나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라는 신념이 그릇되었음을 증명하려 한다.
10명의 사람에게 제프리는 ‘내가 패소했다’고 알렸다. 그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힘겨운 일이었지만, 실험결과에 제프리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소송에서 졌다는 말을 무려 10명의 동료 변호사에게 알렸지만, 다음 주에 그들을 만났을 때 5명의 변호사는 그 사실을 기억조차 못했고, 정신 없이 자신들의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나머지 5명의 변호사는 제프리에게 등을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제프리를 적극적으로 감싸주려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패소했던 경험과 극복의 과정을 털어놓으며 제프리를 도와주려 했다.
‘모두가 나의 실패를 비웃을 것이다’라는 부정적인 과대망상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난 것이다. 세상은 제프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의롭고, 지혜로우며, 배려와 온기로 넘쳤다.
▒ 자기자비: 자신을 ‘솔직한 자아’로 만들자
<이젠 내가 밉지 않아>(마디, 2017)의 저자 애널리 루퍼스는 평생 자기혐오로 스스로를 괴롭혀 온 자신의 인생사를 고백하며 그 혐오의 뿌리가 주로 ‘자기 몸에 대한 증오’에서 온다고 이야기한다. 애널리는 가수 피오나 애플의 사례를 든다. “나는 내 몸을 너무 혐오해서 집에서조차 반바지와 브라만 입고 있을 수 없는 단계를 겪었다.” 피오나는 노출이 많은 옷을 입고 거울 앞을 지나다가 자기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그날 하루 기분을 망치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자기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자기혐오의 그림자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임을 고백한다. 어머니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을 향해 ‘뚱뚱하고 못생긴 돼지’라고 선고하듯 말함으로써 자기혐오를 심화시켰다. 누군가 어머니를 향해 그렇게 놀렸던 기억이 그녀를 평생 동안 따라다니며 괴롭힌 것일까. 어머니는 끝내 자신을 혐오하는 마음의 습관을 자신도 모르게 딸에게 물려주고 말았고, 애널리는 ‘자기혐오라는 감옥’에 갇혀 트라우마를 대물림하고 말았다.
그런데 어린 딸이 보기에 어머니는 전혀 못생기거나 뚱뚱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름답고 세련된 여성이었다고 한다. 애널리는 자기혐오라는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온갖 심리학을 공부하고, 마음챙김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주문을 외운다. 누군가를 만나러 나갈 준비를 하면서, 옷을 입으면서, 집을 나서면서, 애널리는 입으로 이런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린다.
“가식 떨지 마. 가식 떨지 마.” “바보 같은 몸짓으로 사람들 주목을 끌려고 하지 마. 네 주변 모든 사람의 즐거움이 너한테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 마. 그들 중 한 명이 지루해할까 봐, 괴로워할까 봐, 네가 주워섬긴 유명한 지역 건축가들에 대해 알고 싶어 할까 봐 걱정하지 마. 상호 신뢰의 고고함을 보여주려고 네 개인 정보를 마구 쏟아내지 마. 상대에게 가장 간절한 바람, 인생의 마지막 식사로 먹고 싶은 음식 같은 거 묻지 마. 너무 애쓰지 마.”
그녀는 스스로의 자기혐오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임을 인정하고, 어머니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자기혐오에서 자기애로 단번에 비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근의 심리학 연구들은 높은 자기애나 높은 자존감이 아니라, ‘자기 자비(self compassion)’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기 자비란, 자신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 기준을 들이대지 않는 것이다. 우선 자기 자신에게 좀 더 친절해지는 것이다.
누군가 일부러 나에게 잘해주지 않더라도, 힘겨운 순간에는 내가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자기 자비다. 자신을 향한 유연한 자비심을 기르면 더 나은 인간관계, 더 긍정적인 태도를 낳고, 활기, 낙천성, 감정지능, 대처기술, 자기 결정능력이 향상되며, 궁극적으로 행복감이 높아진다. 자신을 향해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덜 우울하고 덜 불안하며 자기애가 큰 것으로 나타난다.
“완벽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불완전함에 대해 연민을 갖는 것이다.” 자기혐오의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내가 좋은 것을 좋다고 하고, 내가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종의 ‘출입구’라면, 그 출입구를 드나들 수 있는 열쇠를 오직 자기 자신만이 지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라는 출입구를 너무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나’라는 세계의 출입구를 열 수 있는 열쇠와 자물쇠를 오직 ‘나 자신’에게 맡길 수 있는 결단력과 용기가 우리를 자기혐오의 스트레스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이다.
정여울 - 작가, 문학평론가. 1976년생. 서울대 독문과 졸업 후 같은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2004년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했다. 저서로 <공부할 권리>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마음의 서재> <헤세로 가는 길>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등이 있다.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