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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크리에이터의 작업실, 그 속에 숨겨진 ‘공간의 기술’

크리에이터에게 떠오르는 영감은 창조 작업의 귀한 밑천이다. 영감과 창조의 원천은 바로 무의식에 저장된 방대한 빅데이터의 결과물이다. 이런 결과물을 무의식의 세계에서 의식의 세계로 가져올 때, 이완된 몰입의 시간이 필요하다. 편하게 몰입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 크리에이터에게 중요한 이유이다.

 

남다른 발상과 아이디어를 원할 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무엇일까? 바로 공간을 이동하거나 바꾸는 것이다. 그만큼 창조적인 생각을 할 때 공간이 미치는 영향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대표적인 크리에이터 두 명의 작업실을 찾아 그 속에 숨겨진 공간의 기술을 찾아본다.

 

서울 연희동 정치호 씨 사무실에 들어서면 빈티지 TV 세트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사진기자 출신인 그는 디자이너로 독립에 성공해 디자인그룹을 이끌고 있다. 지난해엔 아날로그TV 재해석한 TV장식장을 선보여 주목받기도 했다.

 

그의 집은 마치 새하얀 이집트 사원 같았다. 서울 연희동 언덕배기에 걸터앉은 3층집은 군더더기 없는 사각의 입면체다. 겉모습은 단순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실제로 1층 그의 작업실로 들어서면 오래된 보물창고(?)가 펼쳐진다. 옛날 할머니집에 있었을 법한 구식 TV들이 한쪽 벽에 가득 쌓여 있고 싱크대 옆에는 외국에서 가져왔다는 빈티지 자판기가 서 있다. 책상으로 쓰는 널찍한 테이블 위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물건들이 무심히 놓여져 있다.

 

그 유명한 독일의 산업디자이너 잉고 마우러(Ingo Maurer)LED 조명과 이탈리아 디지인계의 거장 알렉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의 스탠드, 국내에는 거의 없다는 Bohm()의 스털링 엔진 세트까지. 그중에서도 내 눈을 잡아 끈 것은 너무나 고급스럽게 잘 생긴연필깎이였다.

 

그건 스페인 엘 카스코(El Casco)사가 1976년에 만든 M430시리즈 중의 하나예요. 엘 카스코는 100년 전통의 총기 회사인데 대공황 시대 때 자구책으로 연필깎이를 비롯해 탁상용 소품을 만들기 시작했죠. 제련 기술이 워낙 좋은 회사라서 여기 들어가는 모든 소품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었어요.”

 

자신이 아끼는 물건을 설명하는 순간, 그의 뿔테 안경 너머로 눈이 반짝였다. 그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치호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자신이 가진 다양한 수집품만큼이나 수많은 일을 한다. 사진기자 출신으로 본업인 사진 이외에도 <빅이슈>란 잡지를 디자인하고 가구, 조명 등 생활용품을 만드는 디자인그룹 엇모스트(Utmost)를 이끌고 있다. 지난해 리벌스(rebirth·재생)’라는 주제의 전시회에서 아날로그TV를 재해석한 월넛 TV장과 전통 고가구인 반닫이를 재현한 작품들을 선보여 주목 받기도 했다. 이뿐인가. 기업들의 유명 브랜드도 도맡아 기업 이미지를 통일하는 CI(Corporate Identity)부터 제품 패키지며 공간디자인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것의 경계를 허무는 크리에이터라는 수식어가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영감을 주는 물건들로 빼곡한 작업실

 

정치호 씨의 사무실은 마치 미술관 같은 느낌도 준다 / 사진제공·정치호

 

그에게 물었다. “수집하는 물건들이 참 다양하네요. 보통의 콜렉터들은 피규어라든지 안경이라든지 한 가지 품목을 정해서 모으기 마련인데요.”

 

그의 답이다. “일부러 수집하려고 모은 게 아니라 실생활에 필요해서 산 것들이니까요. 연필깎이도 제가 연필을 쓰다 보니 연필깎이가 필요했는데 이왕이면 디자인적으로 괜찮고 스토리가 있는 걸 사고 싶어서 찾게 된 거예요. 여기 있는 조명이나 스피커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고요. 모든 디자인에는 원류라는 게 있잖아요. 그 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포인트가 될 만한 물건은 저나 같이 일하는 디자이너들한테 도움이 될 수 있죠.”

 

그가 곁에 두고 쓰는 물건 하나하나에는 역사와 스토리, 디자이너의 철학이 숨겨져 있다. 그중에는 정말 구하기 힘든 희귀한 물건들도 있지만 일부러 진열장을 만들어 따로 전시하진 않는다. 자연스러운 풍경처럼 작업실에 어딘가에 녹아들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다 손님이나 의뢰인의 눈에 우연히 발견되면 대화의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날 내가 꽂힌연필깎이처럼 무수한 소품 중에 한두 개쯤은 외뢰인의 시선을 끌기 마련이니까.

 

그와 대화를 나눌수록, 그의 공간에 익숙해질수록 이곳은 정씨의 전장(戰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전투복을 연상케 하는 야상점퍼를 즐겨입는 그는 이곳에서만큼은 뛰어난 공간의 지배자이자 사령관이다.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물건에 대한 사람의 반응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찰할 수 있다. 디자인을 보는 안목, 관심사, 사람에 대한 태도까지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상황을 통제하고 관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의 작업 방식과도 일맥상통한다. 예전에 한번 그가 인물사진을 찍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5분 남짓, 몇 마디 나누면서 인생사진을 찍어내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상대가 일상적인 대화에 집중하는 사이, 그가 가진 가장 깊은 얼굴을 포착하는 식이다.

 

크리에이터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 보여지는 순간, 뭐든지 금방 카피되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원천에서 나오는지 쉽게 노출되는 걸 꺼려한다. 그런 그의 내면이 그의 작품에도, 공간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다. 그 중심에는 공간 곳곳에 놓인 그만의 소장품들이 있다. 그가 소유한 모든 물건은 작가 자신이 불어넣은 의미와 감정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 된 것들이다. 이런 물건들은 마치 제페토 할아버지가 만든 피노키오처럼 언제든지 자신의 소리를 내며 또 다른 스토리를 이어 간다. 때론 물건들의 단순한 배열이 마치 악기의 배열처럼 아름다운 화음을 들려 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만이 느낄 수 있는 이런 공간의 파장은 그곳에서 치열하게 해결책을 찾아나갈 크리에이터에게 편안하고 익숙한 만족감을 선물해 준다. 그리고 그렇게 기분 좋은 이완의 상태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다.

 

창조는 무의식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일반적으로 뇌가 처리할 수 있는 정보는 초당 4000억 비트 정도라고 한다. 우리는 그중에서 2000비트 정도의 정보만을 실제로 처리할 뿐이다. 나머지 대다수의 정보는 무의식 속에 저장돼 간다. 이렇게 무의식에 저장된 방대한 빅데이터는 스스로의 편집과정을 거치며 우리에게 쉴새 없이 그 결과물을 전달해준다. 이 결과물들이 바로 영감과 창조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무의식의 답을 의식의 세계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완된 몰입이 필요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식의 몰입은 집중이라는 긴장된 상태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무의식의 몰입은 분산이라는 이완의 상태를 필요로 한다.

 

수많은 예술가가 꿈속에서 자신이 만들어낼 노래의 선율을 듣거나, 그림의 영감을 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00여 년 전 천재 과학자로 불리던 니콜라 테슬라는 아예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것을 꿈속에 넣어 해답을 찾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면벽 수행 같은 김수영의 글쓰기 공간

 

두 번째 방문한 크리에이터의 공간은 베스트셀러 작가 김수영씨의 집이다. ‘중학교 중퇴, 검정고시로 들어간 상고에서 골든벨을 울리고 세계적인 투자회사 골드먼삭스에 들어갔던 그.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암 투병 이후 73개의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하나하나 이뤄간 여정을 기록한 <멈추지 마, 다시 꿈부터 써봐>라는 책은 청년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씨를 안겨줬다. 꿈을 찾아가는 자신의 여정을 수많은 책과 영상, 강연으로 만들면서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삶의 희망과 감동을 주는 멘토로 성장한 김수영 작가. 자신의 삶 자체가 콘텐트이자 창작물인 그의 공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서울의 중심지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 들어선 순간, 첫눈에 들어온 거실은 놀랍도록 단순했다. 80개국 이상을 여행한 그의 집안에는 그 어떤 여행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방문한 나라의 특산품이나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과 주고받았을 이국적 물건들, 심지어 작년에 결혼한 신혼임에도 결혼사진 한 장 보이지 않았다. TV가 있어야 할 곳에는 작은 소파가 놓여 있었고 소파가 놓여야 할 곳에는 큰 테이블과 라탄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을 뿐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기분에 따라 달리 피운다는 향초가 전부였다.

 

그가 집필할 때 머무는 서재도 단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출판한 책과 참고용 도서들이 놓인 작은 책장, 큰 컴퓨터가 놓인 책상이 전부였다. 마치 아직도 여행중인 것처럼 언제라도 캐리어에 짐을 싣고 떠날 수 있도록 만든 공간 같았다. 사는 집에 작업실을 만들어 놓은 작가들은 대부분 집 어딘가에는 영감의 원천이 될 만한 장치를 마련해놓기 마련이다. 그런데 김 작가의 집에서는 특별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작가님의 방을 보니 지금까지 어떤 곳에서 글이 잘 쓰여졌는지 궁금한데요?”

 

공주 마곡사나 김천의 수도암에서 글을 썼을 때였던 것 같아요. 멀리는 태국의 코팡안이나 마추픽추의 뜨거운 태양 아래를 여행했을 때, 혹은 길을 걷다가 우연히 보게 되는 감동적인 풍경 속에서도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죠. 물론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의 작업환경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에요.”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서재 책상의 위치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이곳저곳에서 구해온 여러 가지 자료와 기록이 모여 작품으로 승화되는 작가의 책상은 창작의 단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작가는 본능적으로 벽을 등지고 방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위치나 창가 근처에 책상을 둔다. 책상에 앉아서 볼 수 있는 사소한 것들에서도 창작의 단서를 찾아야 하는 크리에이터들에게 시시각각 변하는 창 밖의 풍경이나 빛의 느낌, 소품 하나로 분위기가 바뀌는 방의 모습은 좋은 자극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기 드물게 그처럼 면벽을 하며 작업하는 이들도 있다. 김 작가의 작업용 책상은 밖이 내다보이는 커다란 베란다 창을 뒤로 한 채 방의 가장 그늘진 벽에 붙어 있었다. 벽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벽에게 연주하는 음악가를 떠올리기 힘든 것처럼 벽을 바라보며 영감을 떠올리는 작가도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는 아니다.

 

김수영 작가는 면벽 수행하듯 글을 쓴다. 그의 사무실은 단출한 편. 벽을 마주한 컴퓨터에서 작업을 하고 때로는 악기를 연주하며 영감을 얻는다. / 사진·신기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