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들은 2019년 현재 어디로 향하고 있나. ‘위기 돌파를 위한 혁신’ 이외에 더 큰 비전을 이야기하는 기업은 왜 없는가. 포브스코리아 창간 16주년을 맞아 권오준 포브스코리아 편집장이 한국 벤처 1세대이자 불굴의 투지로 한국 반도체 장비산업을 일으켜 세운 황철주 회장과 마주 앉아 한국 기업의 현주소를 진단했다.
권: 대한민국 기업의 역사는 길어야 60년이다. 하지만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성장해왔다. 그 과정에서 질적 성장보다 양적 성장에 치우쳐 왔다. 앞으로 100년, 200년 지속 가능 경영을 하기 위해서는 그간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황: 100년, 200년 기업은 열심히 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가 도래했지만, 대한민국은 논리적인 사고나 혁신, 기초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앞세워 해외 기업들을 밤새서 모방하며 성장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더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지금까지 성장해온 방법을 하나도 써먹을 수 없는 시대로 바뀌었다. 이런 상태에서는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유지하는 것 자체도 힘들다. 그런데도 우리는 더 잘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져 있다. 사람은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지해야만 발전하는데, 대한민국 사회는 이미 기득권과 고정관념에 빠져 있다.
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세게 말씀하신다.
황: 그게 현실이다. 기득권과 고정관념으로 혁신은커녕 퇴보하고 있다. 유교와 성리학이 대한민국의 근간이라는 생각이 그렇다. 대한민국 화폐에는 모두 유학자가 그려져 있다. 제일 높은 금액인 5만원권에는 신사임당이 새겨졌다. 당대엔 훌륭한 인물상이었지만, 대한민국 현대사회 발전과 아무 관계가 없는 분들이다. 경제에 대한 국가적인 철학이 없다는 방증이다. 돈은 자본주의 국가의 잣대와 철학을 나타낸다. 유교나 성리학이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나 파급효과가 있나? 거의 없다. 조선시대에도 인구의 10%가 채 안 되는 양반사회 안에서만 통용됐다. 그것도 일제강점기에 말살됐다. 가난하고 힘도 기술도 정보도 없었기 때문에 침략을 받아서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그러면서 그나마 양반계층이 갖고 있던 철학까지 다 사라졌다. 그 이후에는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됐다. 지금의 에티오피아보다 더 처절했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어떤 정신과 철학으로 부활했나?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경제발전이었다. 천연자원도 없고 관광자원도 없고 오로지 산업 발전에 의해 전 세계 6, 7위의 경제대국을 만들었다. 그저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빠르게 모방하는 것이 전부였다.
권: 그 당시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운 정주영, 이병철 같은 기업가들이 더는 나오지 않는 것 같다.
황: 대한민국 경제는 기업가정신에 의해 시작됐다. 그 시대 기업가들은 자기만을 위해 기업을 창업한 건 아니다. 국가 주도로 배고픈 국민을 살리기 위해 대기업을 육성한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이렇게 최빈국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군 주역이지만, 사회와 국가에서 존중받지 못한다. 우리가 스스로 시장을 개척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방을 통해 빠르게 성장했다. 해외 기술을 벤치마킹하고, 해외 고급인력을 스카우트하고 다른 국가 또는 기업이 만든 시장에서 돈을 벌었다. 가난했을 때는 일단 먹고살아야 하니까 국제 사회도 이해해줬다. 그러나 지금은 대한민국의 경제 규모가 OECD 회원국 중 7위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60~70년 전 의식과 방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이게 정말 심각한 문제다. 우리나라 산업은 다 일본, 미국, 유럽에서 가져왔고, 교과서와 경제학서도 다 모방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원천기술이 없다. 아직 한 번도 스스로 연구해서 세계에 우리의 경제학이나 산업기술 논리를 펼친 적이 없다. 세계에서 대학 진학률이 제일 높은 나라에서 이런 사실을 모른다는 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새로운 기업가정신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다.
권: 기업가정신의 개념은 무엇인가.
황: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첫 번째가 사랑, 두 번째가 기술혁신이다. 이 두 가지를 합친 것이 기업가정신이다. 여기서 희망이 나온다. 이것을 실천하는 일이 기업가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권: 사랑의 대상은 누구인가.
황: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이 기업 CEO가 종업원을 대하는 것이 리더십이다. 아무리 못 배운 부모라도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게 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능력이 부족하면 능력을 키워주고, 위험은 책임지고 성공은 공유해야 한다.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성장 동력이 생긴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파괴 동력으로 작용한다. 기업가나 지도자라면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희망은 노력하는 만큼 대우를 받고 잘 살 수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물을 빼앗긴다면 누가 열심히 하겠나. 그럼 결국 희망이 사라진다. 희망이 사라지면 혁신도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리셋해야 한다. 대한민국만의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기준이 없으면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없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옳고 그름의 논리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가진 사람들의 기득권과 못 가진 사람들의 억지, 생떼로 돌아가고 있다.
권: 글로벌 스탠더드가 있지 않나.
황: 글로벌 스탠더드와 별도로 대한민국만의 기준을 정립해야 한다. 1등만 쫓아가는 사람은 절대 1등이 될 수 없다. 1등의 생각을 극복하고 그보다 앞서야 더 잘할 수 있다.
권: 개척자 정신이 뛰어났던 1세대 경영자들이 물러나고 2, 3세대로 넘어가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단순한 이윤 추구나 외형 확장의 차원에 머물러 있기엔 세계적인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 기업을 운영하는 당위와 가치의 범위가 넓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 자기만의 철학을 갖고 기업가정신을 실천하는 경영자들이 있나.
황: 철학이 있는 기업가가 없다고 본다. 우리는 지난 60년간 쫓아가는 데만 익숙해져 있다. 도로에서 앞차만 따라가다가 놓치면 뒤차는 길을 잃는다. 이게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그러나 이젠 우리가 쫓아가는 상대도 더 발전하기 힘든 시대가 왔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를 쫓아오는 기업은 엄청나게 많다. 뭐든지 부족했던 옛날에는 1등부터 꼴등 제품까지 다 팔렸다. 이제는 지식과 기술, 정보가 실시간으로 공유되기 때문에 새로운 제품, 시장을 개척한 1등 기업이 시장을 독식한다.
권: 단순히 비교하긴 힘들지만 일론 머스크나 제프 베조스, 손정의, 마윈에 비해 한국 대기업 총수들은 다 4차 산업혁명, 위기만 이야기한다. 사고의 울타리가 너무 다른 것 같다.
황: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한 기업이지 성공한 기업은 아니다. 효율적인 제품을 내놨지만 남의 아이디어를 가져와서 효율적으로 관리하며 성장했다. 경영학 측면에서는 효율적인 성장을 이뤘지만 기업가로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단계까지 가진 못했다. 추격형, 모방형 사업으로는 존경받는 기업이 나오긴 힘들다. 이젠 바뀌어야 한다.
권: 삼성, LG 등 대기업들도 다 혁신을 부르짖고 있다.
황: 혁신은 말로 하는 게 아니다. 어렵고 힘들고 리스크가 큰 일이다. 그런데 머리가 좋고 많이 배우고 스펙이 좋은 사람은 어려운 일을 안 한다. 사회 구조가 안 하게 만들었다. 쉽고 편한 일만 하면 진급할 수 있는데 누가 하겠나.
권: 기업문화와 시스템을 바꾸면 되는 것 아닌가.
황: 그건 오너의 몫이다. 혁신은 대통령, 장관, 오너가 하는 것이다. 위에서 시대에 맞는 기준을 재정립해줘야 한다. 오너가 직접 하든가, 아니면 밑에서 할 수 있게 만들어주든가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위에서 스스로 개선도 못 하고 아래서 제안할 길도 막혀 있는 게 우리나라 현실이다.
권: 기업 규모가 커지면 중간 리더그룹이 생긴다. 모두 10~30년 이상 옛날 방식으로 일해왔던 사람들이다. CEO가 얘기해도 아래로 전파되어 자발적으로 움직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황: 그러면 다 같이 망하는 거다. 오너가 얼만큼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느냐가 문제다. 그게 리더십이다.
권: 기업이든 사람이든 장점이 다 있다. 한국 기업만의 장점이 있을 텐데 그걸 계승하면서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황: 한국 기업의 장점은 끝났다. 모방경제는 끝났고 혁신경제로 가야 한다. 다만 한국 사람의 장점은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 중소기업이 많은 이유도 대기업이 급성장해서 그렇다. 대기업이 필요에 의해서 중소기업들을 끌고 왔다. 잘해서 끌려온 게 아니라 무작정 쫓아온 거다. 그런데 이젠 쫓아갈 게 없어지고 쫓아갈 동력도 없다. 그럼 동시에 다 같이 무너지는 거다. 대한민국의 경쟁력은 결국 사람밖에 없다. 근면성실하고 열정적이고 도전적인 사람들이 많은데 이걸 성장 동력으로 끌고 가지 못하고 있다.
권: 요즘 기업가들로부터 과거 기업가들의 집념, 불굴의 투지가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황: 우리나라엔 사업가만 있고 기업가가 없다. 내가 정의하는 사업가는 시장에서 남의 기술과 돈, 노동력으로 돈을 번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실패하면 사기꾼이 된다. 반면 기업가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키워서 사회와 함께 성장하고 공유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기업가는 망해도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내지만 사업가는 망하면 많은 사람에게 고난만 남긴다. 기업가가 망하면 정부가 나서서 보호해주겠다는 국가적인 철학이 있어야 한다. 기업가는 노동자들을 지식인, 기술자로 만들고 없는 시장을 개척했기에 망해도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권: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뜨고 나서 애플 매장 앞에 추모 행렬이 이어지는 걸 보고 ‘이 사람은 진정한 기업가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 맞다. 리더는 조직원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사람이 아니라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기업의 리더는 고객으로부터 대우를 받는 거지 조직원으로부터 대우를 받는 게 아니다. 조직원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대우를 받게 되면 혁신도 없고 명품도 없다. 스티브 잡스는 굉장히 괴팍했다. 그래야만 자기 자신과 싸우고 기술과 싸우고 리스크를 다 안고 갈 수 있다. 항상 몰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에게 주변에서 엉뚱하고 쉬운 얘길 하면 화를 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기업을 만든 사람은 모두 몰입해 명품을 창조했다. 한국 기업들은 몰입이 아니라 관리 위주로 성장했다. 그래서 제품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명품은 안 나온다. 아이폰에는 오너의 혼이 들어갔지만 갤럭시에는 좋은 기능만 들어갔다. 그래서 충성도가 다르다. 이젠 명품 기업이 나와야 할 때다. 그래야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정리=김민수 기자 kim.minsu2@joins.com·사진 전민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