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CEO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나서기를 좋아하고 말이 많지만, 내향적이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이도 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수공권으로 밑바닥부터 시작해 최정상에 오른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대체로 한결같다. 인물은 제각각임에도 이들이 성공에 이르기까지 관철해온 철학과 비전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현역으로 활발히 뛰고 있으면서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글로벌 CEO들의 경영철학을 모아봤다.
제프 베조스 아마존 CEO
지난해 1779억 달러(약 200조원)를 기록한 매출에 비하면 아마존의 순이익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아마존의 지난해 순이익은 31억 달러, 순이익률은 1.7%에 불과하다. 이윤을 고려하지 않는 파격적인 가격 정책과 매출 대부분을 미래 사업 및 인수합병에 재투자하는 경영방침 때문이다. 미국 온라인 매체 슬레이트가 “아마존은 소비자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투자자 집단이 운영하는 자선단체”라는 평까지 했을 정도다.
이 같은 경영전략의 중심엔 아마존 설립자 제프 베조스가 있다. 베조스는 장기적 사고의 신봉자다. 분기 단위로 실적을 결산하고 손익을 따지는 일반 기업과 달리 베조스는 5~7년 단위로 사업을 구상한다. 베조스는 2013년 경영전문지 하버드비즈니스리뷰 인터뷰에서 “우리가 벌이는 모든 사업은 회사에 이익이 되기까진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고객에겐 즉각 이익이 되는 것들”이라며 아마존이 장기적 사고에 입각해 운영되고 있음을 밝혔다.
이를 위해 베조스가 강조하는 아마존의 핵심 가치가 바로 첫날(day one) 정신이다. 베조스는 “초심을 잃고 둘째 날이 되는 순간 조직은 추락한다”며 “나는 지난 20년 동안 ‘오늘이 아마존 첫날’이라고 말해왔다”고 밝혔다. 회사 규모가 커졌다고 해서 처음 사업을 시작하던 스타트업의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첫날 정신은 아마존이 스타트업처럼 기민한 혁신 주도형 기업문화를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베조스는 “혁신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초기엔 투자자들의 이해를 받기 어렵다. 매일 첫날과 같은 자세로 장기적인 관점을 견지해야 비판을 견뎌내고 혁신을 완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마존은 ‘오너십을 갖고 장기 과제를 실천할 것’, ‘계속해서 혁신할 것’ 등을 직원들이 따라야 할 경영 원칙으로 삼고 말단 직원에게도 많은 자율권을 부여해 혁신을 독려한다.
스타트업 같은 문화가 직원들에게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은 대개 시장에 빨리 정착하기 위해 직원들에게 가혹한 희생을 요구하곤 한다. 20년이 넘도록 이윤 창출보다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는 ‘만년 스타트업’ 아마존의 기업문화도 혹독하기로 악명 높다. 직원들에게 자율권을 충분히 주는 만큼 결과에 대해선 가차 없이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메리 바라 제너럴모터스 CEO
제너럴모터스(GM) 111년 역사는 2009년 파산보호 신청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계 각지에 공장을 세우며 사세를 확장하던 GM은 몸집 불리기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수익을 올리는 데 소홀했고, 결국 비대한 규모를 주체하지 못해 무너져 내렸다. 이후 GM은 구조조정을 통한 경영 효율화에 매진하며 군살 빼기에 주력하고 있다.
파산보호 신청 이후 GM의 첫 CEO는 주요 자동차 업체의 첫 여성 CEO이기도 한 메리 바라다. 2010년부터 3년간 CEO를 역임한 대니얼 애커슨은 자동차 업계와 무관한 금융업자 출신으로, 파산 직전에 몰린 회사를 정상화하기 위한 구원투수 정도로 여겨진다.
그로부터 배턴을 이어받은 바라는 18세에 고졸 생산직으로 GM에 입사해 CEO가 되기까지 34년간 GM에서만 일한 자동차 전문가다. GM 역사의 2막은 바라와 함께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다.
바라는 단순함과 효율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자로 명성이 높다. 바라가 글로벌 인사 부문 부사장이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직군별로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다르게 정해져 있는 회사의 복장 규정이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하고, 10쪽짜리 문서를 단 한 문장으로 바꿨다. “적절하게 입으시오(dress appropriately).”
관리자들 사이에서 이 규칙 때문에 직원들이 옷을 너무 가볍게 입는다는 불만이 나오자, 바라는 말했다.
“직원들에게 불만이 있으면 직접 얘기하세요. 여러분은 관리자이지 규칙 집행관이 아닙니다. 팀을 이끄는 건 여러분의 책임이에요.” 딱딱한 규칙을 걷어내고 중간관리자들이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바라는 인사 보고서의 90%를 줄였다. 제품 부문 부사장일 때는 “거지 같은 차는 이제 그만(no more crappy car)”이라는 한마디 지시로 전 직원을 긴장시키고 업무 효율을 높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CEO가 된 뒤에도 바라의 성향은 그대로다. 바라는 “지금까지 GM은 지나친 관료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파산은 100여 년간 고착된 문화를 혁신할 좋은 기회가 됐다”며 소통이 더욱 원활하고 투명한 조직문화를 만드는 데 매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첫걸음은 경영구조 효율화다. 바라는 인도네시아, 태국, 인도 같은 신흥국 시장은 물론 유럽 시장에서도 과감하게 철수했다.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자동차 판매가 줄면서 매출이 소폭 줄었지만 GM은 갈수록 견실해지고 있다. 2014년 1%대였던 순이익률이 지난해 4분기엔 5%로 5배나 뛰었다. 바라는 기존 사업을 줄이고 수익률을 높여서 번 돈을 마치 IT 스타트업처럼 전기차, 자율주행차, 차량공유 등 첨단기술에 투자하며 미래에 대비하고 있다.
토니 페르난데스 에어아시아 CEO
21세기 최대의 M&A 실패 사례로 꼽히는 AOL과 타임워너의 합병은 막대한 구조조정으로 이어지며 수많은 실업자를 낳았다. 그러나 그 혼란 속에서 새로운 사업을 싹틔운 사람도 있었다. 토니 페르난데스 에어아시아 CEO 얘기다.
30대 중반 나이에 워너뮤직 부사장 자리까지 오르며 성공 가도를 달리던 그는 AOL과 타임워너의 합병에 반대해 사직서를 냈다. “내가 반대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면 위선이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거침없고 저돌적인 페르난데스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망설임 없이 사표를 던졌던 것처럼 페르난데스는 늘 마음이 가는 대로 돌진했다. 영국에서 저비용항공사(LCC) 이지젯과 라이언에어의 성공을 지켜봤던 그는 아시아에서도 같은 사업을 하면 승산이 있으리라고 봤다. 2001년 페르난데스는 부채 120억원을 짊어지고 있는 에어아시아를 1링깃(약 280원)에 인수했다.
당시 에어아시아는 직원 250명에 항공기는 단 두 대뿐이었다. 게다가 미국 9·11 테러와 사스(SARS, 중증 급성호흡증후군) 유행 등으로 여행업계가 침체된 시점이었다. 주변에서 모두가 인수를 만류했지만 그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인터넷을 통해 고객에게 표를 직접 판매하는 등 비용을 최대한 줄이면서 수익성 높은 노선에 집중하는 전략으로 2년 만에 회사를 흑자로 돌려놓았다. 오늘날 에어아시아의 항공기는 230여 대, 직원은 2만여 명에 달한다.
“그 누구의 말도 듣지 말고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페르난데스는 기회가 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독단에 빠지거나 오만해지기 쉽다. 한 가지 중요한 차이는, 페르난데스는 그 위험을 충분히 인식할 정도로 지혜로웠다는 데 있다. “똑똑함과 멍청함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페르난데스는 말했다. “내가 에어아시아 사업에 실패했더라면 인수는 멍청한 짓이 됐을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면서도 그 여정에서는 다른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약점을 보완했다. 젊어서부터 성질이 급했던 페르난데스는 20대 나이에 워너뮤직에서 첫 승진을 하자 빨리 더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고 싶어 안달했다. 그런 페르난데스에게 한 상사가 “천천히 인내심을 갖고 경험을 쌓아라. 빨리 올라갈수록 빨리 내려오게 된다”고 충고했다.
페르난데스는 이를 인생 최고의 조언이었다고 돌이킨다. “나는 성질이 급하고 말실수가 잦은 편이다. 그래서 나는 늘 그의 충고를 마음속에 간직해왔다”고 페르난데스는 말했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모든 걸 하루아침에 이룰 수는 없다.”
이기준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