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7월에 국내 한 대형 갤러리에 동물과 식물의 생명력을 작품 소재로 한 한 화가의 전시회가 열려요. 파독 간호보조원이었던 그 화가는 병원을 나와 미대에 들어갔고, 작품이 프랑스 중학교의 교과서에까지 실리게 되었지요. 화가 노은님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았어요.
1970년 독일로 파견된 한국의 한 간호보조원이 고단한 생활을 그림으로 달랜 지 올해로 꼭 50년. 그 사이 그에겐 많은 일이 있었다. 병원을 나와 미대에 들어갔고, 그림을 그렸고, 미대 교수가 됐으며, 독일인 동료 교수와 결혼도 했다. 정년 퇴임 후 시작한 골프에 맛이 들려 새벽 잔디를 밟아온 지도 10년째다. 그래도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면 붓부터 쥔다는 이 화가는 노은님(73·서울여대 석좌교수). “이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붓이요 다른 하나는 골프공”이라며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5월 17일 오후 경기도 파주출판단지 내 한 스튜디오. 벽에는 크고 작은 그림이 걸려 있고, 바닥엔 족자처럼 기다란 그림들이 습자지 사이로 여럿 겹쳐 깔려 있다. 그 옆으로 각종 도록과 자료집이 쌓여 있다. “며칠 뒤 갤러리 숙제 검사가 있어서 좀 정신이 없어요.” 화가 노은님의 전시를 그림자처럼 돕는 권준성 팀장이 조심스레 책자를 한 아름 가져왔다. 7월 말 국내 대형 갤러리 전시를 위해 선생의 독일 집에서 가져온 것이란다.
맨 위에 『한스 티만과 그의 제자들』이란 독일어 도록이 있다. 한스 티만(Hans Thiemann)이 누구인가. 국립함부르크미술대학 교수로 노은님의 스승이다.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를 사사한 독일 표현주의의 거장이다. 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은 바우하우스의 전통이 한스 티만을 거쳐 노은님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못을 한 번에 박는 능력, 그 감각을 잊지 마라”
티만 교수와는 어떤 인연인가?
독감으로 결근한 나를 찾아온 간호장이 내 그림을 보고 병원 회의실에서 전시를 하게 해주었다. 낮에 함부르크미대에 다니던 야간조 동료 간호사가 티만 교수에게 소개해주었다. 내 그림을 보더니 나를 굉장히 밀어줬다.
어떻게 밀어줬나?
병원과의 계약이 일찍 끝나자 다른 학생들보다 6개월 먼저 입학을 허가해주었다. 장학생으로도 추천해주었다. 자기가 본 중에 가장 재주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바우하우스의 모토는 “예술은 가르칠 수 없다”로 알고 있다. 그는 뭘 가르쳤나?
어떻게 그려야 하느냐고 물어보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고 하더라. 그래서 나뭇잎도 그리고 새도 그렸다. 다른 애들은 크고 멋진 추상화를 척척 그리는데 내 그림은 유치원생이 그린 것 같아 창피해서 다 쓰레기통에 버리고 갔다. 그런데 다음 날 와보니 티만 교수가 내 그림들을 칠판에 붙여놓고 “이게 진짜 그림”이라고 칭찬해주셨다.
뭐라고 하던가?
사람들이 나무에 못질할 때 대부분 못 대신 손을 쳐서 다치곤 하는데, 나는 못을 한 번에 딱 쳐서 깊숙이 박는 재주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감각을 놓치면 미술계를 떠나야 할 것”이라고 경고까지 했다. 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 손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더라. 본성에 있는 걸 바로 꺼낼 수 있는.
미대 교수(함부르크조형예술대학)가 되어서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쳤나?
나는 학생들과 노는 걸 좋아했다. 한번은 학생들과 북해 근처 섬으로 갔다. 거기서 모래사장 위에 아무것으로 무엇이든 그려보라고 했다. 학생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더니, 곧 신이 나서 다양한 도구로 갖가지 그림을 그려냈다. 자유롭게 그린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도 놀라워했다. 보고 싶으면 다 보이게 된다.
좀 엉뚱한 스타일인 것 같다.
면접 때 왜 미대에 지원했느냐는 질문에 “누가 가라고 해서요”라고 말했다. 방학 때 다른 애들이 한 보따리씩 작품을 가져온 것을 본 교수가 “너는?” 하길래 “방학인데 이런 걸 해야 돼?” 했더니 막 웃더라. 독일 사람들이 빈틈이 없는데,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숨통 역할을 한 것 같다. 조화를 이뤘달까.
프랑스 중학교 교과서에도 그림 실려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아트페어 피악(FIAC)은 노은님이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 아니 유럽 전역에 본격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1990년 FIAC에 나간 벨기에 브뤼셀의 필립 기미오(Philippe Guimiot) 갤러리는 도록 자신들의 페이지에 붉은 배경에 다리가 셋 달린 ‘이상한 동물(Feuertier·1986)’을 싣고 “프랑스에 최초로 소개하는 작가”라는 문구까지 집어넣었다. 이 그림은 파블로 피카소나 르네 마그리트 같은 저명 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프랑스 중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실렸다.
그의 작품에는 유독 동물이 많다. 2004년 발간한 에세이집 『내 짐은 내 날개다』에서 그는 “나는 그림을 파는 것이 아니라 동물을 파는 사람”이라고 썼다. 굵은 필획으로 표현된 물고기와 강아지와 새들에게는 원시적 생명력이 그득하다. 티슈 위에 볼펜으로 적어 놓은 작가의 메모에 눈길이 갔다. “생명은 물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물고기가 기어가고, 걸어가고, 날아가고… 이 모든 것이 똑같이 돌아간다고 본다.”
작품에 동물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뭔가?
어릴 때 전주 교동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동물을 좋아해 다양한 동물과 함께 자랐다. 집 앞 시냇가에서 물고기도 자주 잡았다. 지금 살고 있는 독일 남서부 헤센주 미헬슈타트의 집 근처에도 개울이 있고 숲이 울창하다. 숭어, 여우, 가재가 득시글하다. 이런 자연친화적인 분위기가 내 작품의 원천인 것 같다.
작품에서 생명에 대한 관심이 느껴진다.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차이가 없다. 다들 공평하다. 꽃나무를 사다 놓고 다음 날 푸대접하면 화낸다. 그게 느껴진다. 한번은 여행 가느라 친구에게 화분에 물을 주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잊어버렸고, 그것 때문에 4년간 말을 안 했다. 그는 “그깟 화분 때문이냐”고 내게 화를 냈지만, 난 그런 꼴은 못 본다.
그림은 매일 그리나?
아침밥 먹듯이 그린다. 계획이라는 것도 없다. 외려 뭘 그리겠다고 마음먹으면 그날 그림은 망친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종이를 좍 펴놓으면, 그다음에는 붓이 나를 끌고 간다. 붓도 빗자루고 뭐고 손에 잡히는 대로 쓴다. 재료 소재에 제한받지 않고,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붓이 끌고 간다는 말이 재미있다.
내가 모시고 사는 게 세 가지인데, 하나는 그림을 그리니 붓이고, 둘째는 결혼을 했으니 남편이고, 셋째는 골프를 시작했으니 골프공이다. 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지만 안 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골프를 늦게 시작했다.
정년 이후 뭐 하나 즐길 게 있어야겠다 싶었다. 친구들이 “양로원보다 골프장이 낫다”고 하더라. 독일에서는 18홀을 돌려면 골프 면허증이 있어야 한다. 레슨도 받아야 하고, 실기 필기 다 본다. 남편도 면허는 땄지만 흥미가 없어해 그냥 새벽녘에 혼자 나가 친다.
혼자 치는 골프는 무슨 재미인가?
그냥 산책보다 재미있다. 사슴이나 멧돼지도 만난다. 공 들어가는 소리도 경쾌하고. 카운트는 하지 않는다. 하하. 한참 치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면 내가 끌고 온 카트 흔적이 이슬 맺힌 잔디 위에 구불구불 남아 있다. 저게 내 인생이구나 싶다.
7월 한국 전시 다음은 어떤 전시인가?
지난해 5월 뉴욕 전시 중에 미헬슈타트 시장이 전화를 했다. 1400년 된 시립미술관을 보수 중인데, 내 이름으로 된 방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난 독일 사람도 아니고 미헬슈타트 사람도 아니다”라고 거절했더니, 자신의 이름으로 방을 가진 기존 세 화가들과 잘 어울린다며 2019년 11월 오픈에 맞춰 전시를 열어달라고 했다. 이제 그 준비를 해야 한다.
내년에는 무슨 계획이 있나?
내년? 모른다. 작년에도 ‘내년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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