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의 행보가 심상찮다. 최단기간 1천만 명을 달성하더니, 현재는 누적관객수가 1천7백만 명을 넘었다. 역대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했지만 열기는 쉽게 식을 줄 모른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같은 책임지는 리더가 필요해서일까? 실제 역사에서 명량해전은 어떻게 승리를 했는지 살펴보자. 영화와는 다르지만, 그 절심함과 기적같은 모습은 역사의 모습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의 부산포 상륙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가꿈꾼 대륙 침략의 서막이었다. 일본에 남아 있는 히데요시의 황금부채를 보면 조선·중국·일본 등 3국 지도가 그려져 있다.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조선을 거쳐 명나라를 정벌하고, 인도까지 진출할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 조선은 싸워야 할 적(敵)이 아니라 대륙을 정복하는 편리한 ‘길’에 불과했다. 육지의 일본군은 거대한 태풍이 한반도 전역을 휩쓸 듯 조선 곳곳을 초토화시켰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히데요시와 일본군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대이변이 펼쳐졌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남해의 일본 수군을 무참하게 박살냈기 때문이다.
1593년부터 명나라와 일본군은 조선을 배제한 채 강화협상을 벌였다. 속셈이 달랐던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이 결렬되면서, 히데요시는 다시 침략을 준비했고 그 정보가 조선 조정에
전달되었다. 다시 몰려오는 왜군에게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전투 중 도망친 경상우수사 배설이 끌고 도망친 12척을 제외하고 거북선을 포함한 대략 150여 척의 전선이 바다에 가라앉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조정에 원균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와 신하들은 경악했다.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그때 선조와 조정이 낸 해법은 단 하나였다. 명령 불복종으로 내쳤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하는 것이었다. 120일 동안의 백의종군을 끝내는 재임명장을 받은 이순신은 진주 초계에서 9명의 군관과 함께 전라도 쪽으로 출발해 이후 16일간 326.4㎞의 대장정 끝에 장흥 회령포에 도착했다.
그의 대장정은 충격적인 패전에 따라 동요하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길 위에 넘쳐나는 피란민을 위로하고 안심시켰고, 그들 중 자원자를 군사로 모았다. 또 지휘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의 부하 장수와 지역의 리더들을 모았다. 승려까지 의병장 직첩을 내주며 부족한 군사력을 벌충했다. 나아가 지방의 행정력을 복원시켜 군사를 동원할 준비를 했고, 군량을 확보할 토대를 마련했다. 이순신은 한 걸음 한 걸음 이동하면서 다가올 결전을 대비해나갔다.
고작 12척 밖에 없는 전함으로 일본의 대군을 이기기 위해서는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 이순신은 최고의 지형을 찾았다. 전함을 여러 곳으로 이동 끝에 울돌목을 기점으로 삼았다. 바닷물이 울면서 돌아나온다는 울돌목의 조류 흐름을 이용한 전투는 아군에게는 최대한 방어이자 공격의 포인트가되었다.
명량해전 승리의 한 동력인 철쇄(鐵鎖, 쇠사슬) 전투는 영화 <명량>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다. 2004년 가을부터 2005년 여름까지 방송된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명량해전의 기적 같은 승리 원인의 하나로 명량에 걸어놓은 철쇄를 꼽았다. 이 철쇄설은 임진왜란 당시와 그 후 160년 동안의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현재까지 연대가 확인 가능한 최초의 기록은 160년 후인 1751년, 이중환(李重煥,1690~1752)이 저술한 인문지리지인 <택리지(擇里志)>다.
“이순신이 바다 위에 머물며 철쇄를 돌맥이 다리 위에 가로 걸고 적을 기다렸다. 왜선이 다리 위에 와서는 철쇄에 걸려 이내 다리 밑으로 거꾸로 엎어졌다. 그러나 다리 위에 있는 배에서는 낮은 곳을 보지 못하므로 다리를 넘어갔으려니 하고 순류로 곧장 내려오다가 모두 거꾸로 엎어져버렸다. 또 다리 가까이엔 물살이 더욱 급하여 배가 급류에 휩싸여 들면 다시 돌릴 겨를이 없어 500~600여 척이 일시에 전부 침몰했고 성한 곳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택리지> 이후 우리나라와 일본의 기록에 철쇄 신화가 생겼다. 하지만 정확한 근거는 아직까지 알 수가 없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해전 전술에서는 주력 전선(戰船)인 판옥선(板屋船)이 두드러진다. 조선의 판옥선은 선체 위에 하체의 너비보다 넓은 상장(上粧), 즉 판옥을 설치했기 때문에 판옥선이라고 한다. 왜구의 배를 격파하기 위해 을묘왜변이 일어난 직후인 명종 10년(1555년)에 개발한 대형 전선이다. 대략 125~130명이 탑승했고, 그중 노를 젓는 격군은 90~100명 정도, 전투 요원인 포를 쏘는 포수와 화살을 쏘는 사수가 30~40명 정도였다.
2층 구조로 되어 있어 비전투원인 격군(格軍)은 아래층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었고, 전투요원은 위층에서 격군의 방해 없이 포와 활을 쏠 수 있었다. 크기가 대형이었기에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았던 일본 전선에 탄 일본군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성(城)과 같은 판옥선을 기어올라 백병전을 할 수 가 없었다.
또한 판옥선의 외판 두께는 약 12㎝로 상당히 두꺼웠고, 배의 주요 구성부분이 튼튼한 소나무로 만들어져 인명살상 유효 사거리 30~50m 정도인 조총탄환으로는 판옥선을 뚫을 수가 없었다. 선체가 튼튼하고 우리의 남서해안 특징인 조수간만의 차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형으로 되어 있어 각종 크기의 화포 사격 시, 포사격에 따른 반동에 영향받지 않았다. 또한 흘수가 낮아 선회 능력이 우수해 함포 사격시 포의 활용도를 높이기에도 편리했다. 높은 곳에서 포사격을 할 수 있어서 명중률도 높았다.
판옥선에 실린 포로는 천자(天字)·지자(地字)·현자(玄字) 총통 등이 있다. 천자총통은 길이 130㎝, 구경 13㎝, 무게 300㎏, 사거리 1.6~2㎞였고, 대장군전(大將軍箭 30㎏)과 철환(鐵丸, 조란환)을 발사했다. 지자총통은 길이 88㎝, 구경 10.3㎝, 사거리 1㎞로 장군전과 철환을 발사했다. 판옥선의 각종 총통으로 일본군과의 직접적 접촉 없이 1㎞ 떨어진 거리에서도 함포사격으로 일본 전선을 격파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순신은 근접전을 피하고 일본군과 간격을 유지하면서 함포 사격으로 일본군을 공격했다. 원균이 지휘했던 칠천량 해전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해전에서 판옥선이 격파된
사례는 없었다.
명량해전에 참전한 조선 수군의 전선 수에 대해 12척이냐 혹은 13척이냐는 논란이 있다. 또한 일본 전선 수도 130척, 133척, 200여 척, 330척, 333척, 500척으로 제각각이다. 이순신이 직접 쓴 명량해전 당일의 일기에서도 차이가 있다.
이순신이 상대한 일본 전선의 수에 대해서도 기록이 각각 다르다. 먼저 두 개가 존재하는 정유년(1597년)의 <난중일기>를 살펴보자. ‘정유년 1’이라고 칭하는 일기의 9월 16일에서는
“이른 아침에 정찰군사가 들어와, ‘무려 200여 척의 적선이 명량으로 들어와 곧바로 진(陣)을 치고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3척이 우리의 배를 둘러쌌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정유년 2’ 9월 16일 일기에서는 “이른 아침에 특별 정찰군이 들어와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적선이 명량으로 들어와 곧바로 진(陣)을 친 곳으로 향해 오고 있다’고 했다.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0 여 척이 우리의 배들을 둘러쌌다”고 했다. 이순신의 일기에서도 133척 혹은 130여 척으로 기록된 것이다.
<선조실록>에서는 ‘정유년 2’처럼 ‘130여 척’으로, <선조수정실록>에서는 ‘200여 척’으로 되어 있다. 류성룡의 <징비록>에서는 200여 척, <이충무공행록>에서는 333척, <명량대첩비문>에서는 500여 척,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서는 330여 척으로 되어 있다.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133척 혹은 130여 척이 정확한 듯하다. 기록을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명량대첩이다.
영화 <명량>이 개봉 12일 만에 1천만 관객 흥행을 돌파했다. 최단 기간 천만 관객을 동원을 한 명량, 그리고 그 명량 속의 이순신을 현실로 불러낸 김한민 감독을 만났다. 그에게 영화 <명량>과 이순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천만 관객. 조금이라도 예상을 하셨나요?
“명량은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봤어요. 절대 실패할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있었죠. 좀 본능적인 것이었는데, 일단 전작 <활>에서 경험을 했고…. 내가 추구하는 장르적인 재미와 역사적인 의미가 같이 결합하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해상전이라는 재미와 스케일이 있고, 거기에 이순신이라는 실존인물이 가진 역사성, 이 두 가지가 잘만 결합하면 핵융합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영화 만드는데 참고가 좀 되었나요?
“반대 의미에서 참고가 됐습니다.(웃음) 전 <칼의 노래>가 굉장히 수사적인 문체를 가진 작품이라고 봤어요. 장군을 너무 고뇌하는 인물로 그렸고, 김훈이라는 인간이 느껴지는 이순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담백한 분이셨죠. <난중일기>를 보면 강렬한 문체 속에서 이순신 장군이 가진 것들이 엿보이거든요. 무인 특유의 심플하면서 간결한 결정들이죠. 누구누구를 곤장을 쳐서 보냈다, 누구를 참했다 등등. 어떤 현상에 대해서 어떤 편견도 갖지 않는 분 같아요. 무인들의 특징이 그런 것이거든요.”
- 김 감독의 이순신은 <칼의 노래> 속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이나 김명민 배우가 분했던 이순신 등 그 모든 이순신과 어떻게 차별화 되는 건가요?
“<난중일기>를 참조했다고는 하지만 김한민이라는 한 인간을 통해서 무언가 필터링된 건 사실일 테니까…. 아까 말했던 담백한 무인으로써의 지점이죠. 그리고 이순신이라는 인물은 바른 안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원칙과 신뢰를 지키는 사람. 바른 안목은 결국 그분의 생사관에서 나오는 게 컸던 것 같아요. ‘대의를 위해서 무인으로서 지켜야 할,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고 그러다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거다’ 라고 생각하니 담백한 거죠. 그것 말고는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죠.”
- 이순신 장군을 어떠한 영화적 키워드로 그리고 싶으셨나요? 저는 잔 다르크처럼 초월성이 있는 영웅이라고 보는데요.
“초월이라…. 초연성하고도 맥락이 닿아 있네요. 이 영화의 화두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명량이라는 해전의 핵심적인 요체라고 봤어요. 거기에 맞춰서 해전도 구상을 했던 것이고. 그렇다면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데 이순신은 절대적 역할을 해야 하고…. 그리고 이순신이 그 절대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이순신에게 무언가가 있어야 하고, 그 무엇인가는 이순신의 정신적 요체일 것입니다.
그 요체는 아까 말씀드렸던 이순신의 생사관이고요. 장수된 자가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거지 그 이상 뭐가 있겠느냐 하는 것…. 그 부분이 어떻게 보면 초월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맥락
이 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순신의 초연함이 가장 극적으로 보이는 것이 명량이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왜냐하면 명량에서는 제가 봤을 땐 그냥 목숨을 던진 거예요. 죽자, 다만 장
수된 자로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싸우다가 죽으면 되는 것 아니냐, 그런데 거기에 많은 사람이 순응하지 못했죠.
삼도수군통제사로서 갖는 군율과 권위를 가지고 그들을 끌고 나가긴 했지만, 결국 그렇게 끌고 나가니 나머지 사람은 저 뒤에 가 있고 혼자 대장선을 이끌고 고군분투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지요. 장군이 선봉에서 본인이 솔선수범해서 죽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면, 다른 장수들이 거기에 분명히 감화되는 지점이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니까요. 그 대강의 골격만 있는 명량해전 기록에서 뭔가 엮어지는 비전을 봤어요.
어쩌면 이 영화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비전을 보았죠. 단순히 ‘비워져 있는 걸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운다’ 이런 게 아니라 이순신의 생사관을 통한 자기희생, 이런 정신의 요체를 쭉 훑어가다 보니 이 해전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딱 보이더라고요.”
- 전라좌수영이 있는 순천에서 태어나 작금에 이순신 장군님을 불러냈는데, 이순신의 거울에 비춰 본 김한민이란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순신의 정신에 뭔가 반향을 일으킨 이순신 후손 중의 일부?(웃음) 장군이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숭고한 정신을 갖고 있던 분인데 그런 정신에 조금 반응하는 후손의 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면 좋겠네요.”
김한민 감독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삼청동 카페에서 광화문 네거리까지 천천히 걸었다. 광화문 한복판에는 앉아 있는 세종대왕과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나란히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주변으로 구호를 외치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는 대한민국의 백성들과 그들이 탄 차가 쉴 새 없이 오갔다. 마음이 아팠다.
사실 이순신은 술을 잘 마셨다. 첩도 있었다. 그러나 <난중일기> 속 시를 짓는 이순신, 노래를 듣는 이순신, 기생과 노는 이순신 대신 고뇌하는 이순신만이 가득한 이 땅. 울돌목의 곡소리가 1천만 관객을 불러들인 지금. 모든 것이 배수의 진을 치고, 몰려오는 외부의 세력과 일전을 불사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명량의 바다가 다시 광화문광장에 넘실거렸다.
침몰하는 진도 울돌목의 배속엔 세월호도 있는 것일까. 아,이순신. 백성들의 이순신, 아니 이순신의 백성들이 명량을 본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눈에도 부디 보이기를….
글 :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goldagebook@naver.com
인터뷰 글 :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심리학과 교수·영화 평론가
- 월간중앙 201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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