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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차붐 부자'의 특별한 아시안컵, 축구인생 스토리

지난 호주 아시안컵 '차두리 신드롬'이 불면서 '차붐 부자'에 대한 관심이 다시 한번 뜨거워졌다. 차두리의 아버지, 그리고 차범근의 아들, 이 차붐 부자의 감동적인 축구인생 스토리를 들어본다.

 

1월 31일 막을 내린 호주 아시안컵에서 차두리는 베테랑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축구뿐 아니라 한국 근대 스포츠사 100년을 대표하는 스타인 '아버지의 그늘'로 인해 비교당하며 상처 받았던 시절이 있다. 2002년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차범근'이라는 사람의 위상을 다시 느끼며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고 하지만 말이다.

 

"저와 아버지를 비교하고 그런 것들이 이제는 크게 스트레스로 와 닿지 않아요. 하지만 축구선수는 누구나 자기가 열심히 한 것에 대해 보상받고 또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한국에서는 그게 어려워요. 그러다 보니 회의감이 들 때도 많죠.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정말로 두 배, 세 배 이상의 노력을 해야 하고 에너지를 소비해야 해요."

 

 

차범근과 아내 오은미 씨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의 아픈 기억을 꺼내며 아들 차두리에게 더욱 미안해했다. 당시 차범근은 한국팀을 지휘하다가 성적 부진으로 중도에 경질되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가 언론을 뒤덮었다. 그때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차두리는 한국축구의 영웅이었던 아버지가 일순간에 대역죄인 취급을 받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봐야만 했다. 한창 예민한 시기에 그 모진 일을 겪으면서도 그는 단 한번도 아버지를 원망해본 적이 없다.

 

힘든 시기를 보내던 가족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왔으니, 바로 차두리가 태극마크를 달게 된 것이다. 2001년 10월 29일, 독일에 있던 부부에게 차두리가 가대표에 발탁됐다는 전화가 왔다. 당시 고려대에 재학 중이던 차두리가 20세 이하 대표팀 상비군에 뽑혀 국가대표와 연습 경기에서 중거리포로 골을 넣는 등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쳐 거스 히딩크 전 대표팀 감독으로부터 전격적인 부름을 받게 되었다.

 

▦ 차붐 부자의 끝과 시작을 함께한 아시안컵

 

차붐 부자는 아시안컵과 깊은 인연이 있다. 1972년 태국 아시안컵 때 차범근은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당시 18세 11개월 나이로 아시안컵 최연소 출전이었다. 당시 한국은 결승에서 이란에게 패해 아쉽게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A매치 통산 132경기에서 59골을 터뜨린 '차붐의 전설'이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그 뒤로 43년이 지난 1월, 이번에는 아들 차두리가 2015년 호주 아시안컵을 누볐다. 아버지인 차범근이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한 대회가 아들인 차두리에게는 국가대표 마지막 무대가 된 것이다. 이번 아시안컵 대표팀에서 최고참이었던 차두리는 경기장 안팎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며 동료들을 이끌었다.

 

그는 호주 아시안컵 기간 내내 '차미네이터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는 월 22일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에서 연장 후반 막판 하프라인에서부터 치고 나가 상대 수비수 두 명을 제치는 폭발적인 60미터 드리블로 팬들을 열광시켰다. 그리고 자로 잰 듯한 땅볼 패스로 손흥민의 골을 도왔다. 그의 이름은 국내 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휩쓸었다.

 

대망의 아시안컵 결승 상대는 개최국 호주였다. 한국은 1960년 이후 아시안컵에서 우승한 적이 없었기에 이날 경기에 임하는 태극전사들의 각오는 남달랐다. 차두리 역시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불태웠다. 관중석에서 직접 경기를 지켜보며 아들을 응원하던 차범근이 오히려 더 긴장한 듯 했다.

 

120분 혈전 끝에 한국은 1:2로 졌지만, 투혼을 보여준 태극전사들에게 팬들은 아낌없는 환호를 보냈다. 시상식 후 준우승 메달을 걸고 차범근에게 두 팔을 흔드는 차두리의 모습은 시원섭섭해 보였다. 그는 "비록 졌지만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다. 이제 나를 사랑해주신 만큼 후배들을 응원해달라"고 후배들을 걱정하는 모습도 보였다.

 

▦ 왜 팬들은 차두리에게 열광할까?

 

아시안컵 결승전 직후 인터넷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는 '차두리 고마워'였다. 김연아가 소치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서 판정 논란 끝에 은메달에 그친 날 실시간 검색어 1위였던 '연아야 고마워'처럼 말이다. 국민들은 김연아 때처럼 차두리에게 박수를 쳤다.

 

냉정히 말해 차두리는 아버지 차범근이나 박지성, 기성용, 손흥민과 같은 톱스타 반열의 선수는 아니다. 하지만 팬들은 차두리의 플레이와 활짝 웃는 그에게 엄청난 지지를 보낸다. 왜 수많은 팬들은 차두리에게 열광할까?

 

 

그의 거침없고 시원시원한 플레이가 매력이라는 분석이다. 남아공월드컵 직전에 벌어진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그는 폭발적인 공격 가담 능력을 보여주며 '차미네이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월드컵 본선에서도 거구의 유럽·아프리카 선수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자 '차로봇', '차바타'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꾸밈없는 솔직함도 차두리의 매력이다. 차범근은 아들의 인기 비결을 묻는 질문에, "아, 그 녀석이 너무 말이 많고 늘 웃고 있으니 그런 거 아니냐"고 쑥스러워하면서도 "팬들이 솔직한 모습을 좋아해주시는 것 같다. 두리는 말하는 게 거짓이 없다. 어렸을 적부터 참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안 좋은 상황이 닥쳐도 항상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는 모습이 대견했다"고 설명했다.

 

▦ 차범근이라 적고 차두리라 읽는다

 

차두리의 시계는 다시 돌아간다. 그는 국가대표에서 은퇴했지만 작년 말 소속 팀 FC과는 1년 재계약을 했다. 1년 더 K리그 무대를 누빈 뒤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나겠다는 계획이다.

 

"지금  제 경기력이 어떨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대표팀에서 다행스럽게 좋은 경기력을 보여 뿌듯하게 은퇴할 수 있었다. 이제 소속 팀에서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더 철저히 준비하겠다. 후회 없이 선수 생활을 마치고 싶다"

 

차두리도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고민해야 할 시기다. 6년 전 인터뷰에서 그는 국내에 멋진 재활센터를 만드는 게 꿈이라고 했다. 지금 그의 계획은 조금 바뀌어 지도자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은퇴 후 독일로 건너가 일단 지도자 자격증을 딸 계획이다. 아버지가 차범근 축구교실을 만들었던 것처럼 특히 유소년 육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

 

"마티아스 잠머가 독일 유소년을 10~15년 꾸준히 담당했죠. 전 그 결실을 직접 보고 들었어요. 독일 프로축구 리그는 영국이나 스페인처럼 많은 돈을 들여 스타 선수를 사오고 그러지 못하거든요. 하지만 계속해서 우수한 선수가 배출됩니다. 잘 갖춰진 유소년 축구 덕분이죠. 그런 쪽 일을 해보고 싶어요. 물론 맹목적으로 독일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한국에 맞게끔 문화를 만들어야죠. 선수는 절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아요. 좋은 선수를 빨리 발견해 잘 키워나가는 게 중요하죠."

 

 

13년 전인 2002년 한일월드컵 직후 차범근은 아들 차두리와 함께 찍은 CF 광고에서 "차범근의 아들이 아니라 이제 차두리의 아버지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광고 카피는 어쩌면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도 차두리에게서 '차붐의 아들'이란 타이틀은 떼어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제 어느 누구도 차두리를 아버지 덕분에 유명한 선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호주 아시안컵에서 43년 전 아버지가 그랬듯 한국축구의 주역이었다. 이젠 차두리도 '차붐의 아들'이란 수식어에 대해 부담을 털고 마음껏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해도 될 것 같다. 이젠 그 역시 당당히 한국을 대표하는 오른쪽 수비수로 기억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