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종이달>은 치정극처럼 보이지만 조용한 심리공포물에 가깝다. 불륜과 횡령에 빠져드는 리카의 불안과 초조, 긴장과 죄책감은 행 단위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이 유혹은 사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빠져들 수 있는 것이기에 더욱 생생하다. ‘돈’의 위력과 파괴력을 원작이 파고든다면 영화는 여자 리카의 자기 발견에 더 무게를 둔다.
소설이 드라마나 영화화가 되는 일은 이제 비일비재하다. 평범한 40대 여성이 불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10억 원의 돈을 횡령한 영화 <종이달> 역시 소설이 원작이다. 이와 같은 영화 <위대한 개츠비>와 함께 영화 <종이달>의 리카가 범죄자가 된 이유를 말한다.
영화 <종이달>의 주인공 리카는 쇼핑할 땐 늘 메모한 것만 사려고 애쓰던 알뜰한 주부였다. 그러나 은행원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면서 대담한 횡령을 저지르게 된다.
미국 작가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는 주인공이자 이상형이며 뮤즈이자 악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누구도 그녀의 속마음을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직 개츠비가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를 되찾으려 한다는 사실만이 강박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 화려한 옷은 ‘중독’의 대상
소설과 영화에서 무척 의아한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개츠비의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셔츠 컬렉션을 보던 데이지가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는 장면이 그것이다. 셔츠에 파묻혀 있던 데이지가 흐느끼자 개츠비는 “왜 그러느냐?”고 묻는다. 이에 데이지는 “너무 아름다워서 울어요”라고 말한다. 너무 아름다운 셔츠 때문에 우는 여자, 과연 우리는 그녀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던 걸까?
이 장면은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토니 타키타니>에서 매혹적으로 변주됐다. 소설 <토니 타키타니>는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미국식으로 토니라고 지어진 한 일본인 남자의 고독을 그린 소설이다. 그런 그의 곁에 한 여자가 나타 난다. 그녀는 어떤 옷이든 그럴 듯하게 소화해 낸다. 토니는 우아하고도 매혹적인 여자에게 반하고 만다. 난생 처음으로 고독한 삶에서 한 발짝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녀에게 청혼하게 된 토니. 그도 남들처럼 평범한 부부가 된다.
문제는 여자에게 옷이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중독의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에이코는 결혼하고 나서도 쇼핑을 멈추지 못한다. 토니는 어느 시점이 되자 “이제 쇼핑을 멈추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에이코도 옳다고 여긴다. 고급 디자이너 부티크에서 산 옷을 반품하는 것으로 에이코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오는 길에 그만 사고를 당하고 세상을 떠난다. 이제 그녀는 죽었다. 그리고 731벌의 옷만이 남는다.
토니는 남겨진 옷들을 처분할까 하다가 다소 엉뚱하게 일을 벌인다. 키 165㎝, 발 사이즈 230㎜, 옷 사이즈 2인 여자를 신문광고로 구한 것이다. 아내가 남긴 옷을 입어주는 것, 그게 토니의 요구 사항이다. 아내의 사이즈와 꼭 맞는 어린 여자가 마침내 찾아왔다. 그 여자는 아내의 드레스룸에 들어가 가격표도 떼지 않은 고급 의상들 사이를 걷는다.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주저앉아 울기 시작한다. “도대체 왜 그녀는 이렇게 아름다운 옷들을 두고 세상을 떠났을까요? 왜?”
이 여자가 왜 울었는지 이해가 가는가?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의 아름다운 드레스 셔츠를 보며 눈물을 터트린 데이지처럼 어린 아르바이트생은 옷들을 껴안고 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데이지와 똑같은 말을 한다. “너무 아름다워서요.” 대체 그녀는 왜 울었을까? 아름다운 원피스와 사치스러운 스카프 그리고 화려한 가방, 그 안에 ‘나’를 담아 부상하고자 했던 여자, 가쿠다 미쓰요의 소설 <종이달>의 여주인공 리카는 어쩌면 데이지 혹은 에이코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 <종이달>의 여주인공 리카는 영화 <토니 타키타니>의 여주인공 에이코와 닮아 보인다. 미야자와 리에가 영화 <종이달>의 리카에 캐스팅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듯싶다.
▧ 40대 유부녀, 10억원으로 욕망을 사다
소설 <종이달>은 태국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방콕에서 지금 막 치앙마이로 옮겨온 중이다. 일본인이 자주 머무는 호화스러운 호텔에서 짐을 뺀 그녀는 현지 매춘부들이 들락거리는 지저분한 방으로 옮긴다. 그녀는 사람들이 많은 곳, 아니 일본인이 많은 곳을 피해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흐르는 물길을 따라 맴도는 부표처럼 이곳에 닿은 그녀는 “이러면 아무도 내가 나란 걸 모를지도 모른다. 우메자와 리카는 이 세상에서 몰래 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사라지기 위해 태국에 온 것이다.
영화 <종이달>의 큰 줄거리는 스캔들 기사와 다를 바 없다. 평범한 40대 계약직 은행원이 대학생과 불륜 비용을 메우기 위해 10억원을 횡령한 이야기, 지금도 포털 사이트 상·하단 어디엔가 점멸되고 있을 그런 흔하디 흔한 치정극인 셈이다. 하지만 막상 영화 그리고 소설을 들여다보면 이를 두고 단순히 정신 나간 유부녀의 대담한 치정극이라 비난하기는 어렵다.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늘 조마조마하며 살아간다. 불륜을 저지르고 횡령을 하면서도 그녀는 어떤 점에서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어 보일 정도이다.
리카의 여고동창 유코는 “리카가 1억엔 정도나 되는 큰돈을 도대체 어디에 쓸 수 있었을까, 전부 써버린 게 맞을까?” 하며 의아해 한다. 이 의아함은 소설을 읽기 시작한 독자에게도 전달된다.
소설을 읽어 가다 보면 그녀는 돈이 아니라 제 것이 아닌 욕망을 훔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점에서 리카는 자신의 욕망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어느 새 우리 뇌리에 주입된 남들의 욕망을 따라 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리카는 대범한 횡령을 저지르면서도 매순간 들키기를 바란다. 누군가가 자신을 그곳에서 빼내주기를 간절히 원한다. 리카가 간절히 구출됐으면 하는 곳, 그곳은 바로 자본의 개미지옥이다. 소고기도 100g당 가격을 비교하고 쇼핑할 땐 늘 목록의 것만을 사려고 애썼던 알뜰한 주부 리카는 점점 더 돈에 무디어져 간다. 더 많이 쓰고 더 많은 것을 갖게 될수록 돈에 대한 감각도 마비돼간다.
▧ 자본주의의 ‘함정’ 불륜, 횡령
리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과 물질로 환심을 얻으려 하는 것, 사실 이는 인간의 나약한 본성이기도 하다. 돈은 생각보다 무척 영악해서 사람의 나약한 부분을 파고든다. 마치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주기 때문이다.
‘돈’의 위력과 파괴력을 원작이 파고든다면 영화는 여자 리카의 자기 발견에 더 무게를 둔다. 소설에서 그다지 큰 비중으로 이야기되지 않는 고타와 리카의 섹스는 영화에서는 매우 중요한 모티브로 반복된다.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자 리카는 ‘만약에…’라며 과거를 회상한다. 소설 속 리카의 말처럼 그녀의 일상은 조용한 지뢰밭이었기에 언제든 터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설 <종이달>의 리카는 불륜과 횡령에 빠져들고, 저축금액을 줄이는 정도로 소비를 늘렸던 여자가 생활비에 손을 대고 빚을 지고 심지어 회사 돈에 손을 대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소설은 그 사람이 특별히 악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도시인이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도 지금 이 순간 텔레비전을 켜면 여성을 위해 남편도 엄마도 모르는 돈을 빌려주는 여성 전용 대출광고가 방영 중이다. 사랑받고 싶지만 확인할 길 없는 자아의 공백을 건드리는 공허한 메시지, 이 메시지가 계속되는 한 <종이달>의 작가 기쿠다 미쓰요의 전언은 여전히 현재적으로 남을 것이다.
원작 소설과 영화 <종이달>의 리카,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토니 타키타니>에이코처럼 나도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