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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한글을 탄압한 연산군, 황음무도에 빠지다

한글은 세종 28년(1446) 음력 9월 29일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됐다. 이름 그대로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였다. 하지만 당시 양반들은 한문만을 숭상하고 한글은 천한 백성들이나 쓰는 글자라고 여겼다. 특히 연산군은 한문 숭상 수준을 넘어 한글 사용 금지령까지 내리는 등, 한글을 철저히 탄압했는데... 

 

조선시대를 통틀어 한글을 탄압한 최고의 군주를 꼽으라면 단연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심정적인 면에서의 한문 숭상을 넘어 노골적으로 한글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글금지령을 둘러싼 연산군의 행태에는 연산군이 어느 정도의 폭군인지가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연산군이 한글금지령을 내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동왕(同王) 10년(1504) 7월 10일에 있었던 투서였다. 이날 새벽 왕의 처남인 신수영의 집에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제용감에서 일하는 이규가 보내서 왔다며 서찰을 전하고 사라졌다. 신수영이 펴보니 그 안에는 언문 즉 한글로 된 세 장의 익명서가 있었다.

 

▒ 한글 탄압의 시작, '한글 익명서'

 

조선시대 익명서는 내용에 관계없이 폐기처분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하지만 신수영은 너무 심각한 내용이라 판단하고 연산군에게 보고했고, 연산군 역시 크게 놀랐다. 왕은 즉시 이규에게 이 일을 물었으나 누군가가 그를 빙자해 투서한 것으로 드러났다. 왕은 명령을 내려 도성의 각 문을 닫고, 출입을 금하게 하고는 한글 익명서를 신하들에게 내렸다. 신하들이 받아본 익명서 3장은 모두 언문 즉 한글로 쓰였는데 사람 이름만 한자였다.

 

연산군

 

익명서의 첫 표면에는 무명장(無名狀)이라 적혀 있었다. 익명서 3장의 각 내용이 실록에 수록돼 있는데 핵심은 개금·덕금·고온지·조방 등 의녀들이 연산군에 대해 대역무도한 말을 했으니 엄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익명서에서 의녀 개금과 덕금은 연산군의 무차별한 신하살육을 비판했다. 의녀 덕금은 “주상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니, 여기에 무슨 의심이 있으랴?”라고 했는데 머지않아 왕위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의미였다.



둘째 장의 익명서 내용은 “옛 임금은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임금은 여색에 대해 분별하는 바가 없어 이제 또한 여기(女妓), 의녀, 현수(絃首, 여자 무당)들을 모두 다 조사해 궁중에 들이려 하니 우리도 들어가게 되지 않을까?”이었으며, 셋째 장은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가 폐비 윤씨의 생모인 신씨 때문이니 신씨의 친족을 몰살시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요컨대 한글 익명서는 연산군의 갑자사화와 황음무도에 대한 비판이었다.

 

▒ 한글을 통해 비판의 소리를 내는 백성들

당시는 갑자사화 직후로 연산군은 폭주하고 있었다. 왕의 위력에 눌린 양반들은 비판의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연산군은 조선팔도에서 궁녀들을 마구 뽑아 들였다. 누구의 비판도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황음무도한 짓을 행하는 왕이야말로 폭군이었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글을 읽고 쓰게 된 백성들은 자신들의 뜻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특히 궁중 여성들이 한글을 이용해 자신들의 뜻을 표시하는 일이 많았다. 예컨대 궁녀가 왕의 실정이나 궁중 안의 비행을 폭로하는 한글 익명서를 투서하거나, 왕비나 대비 등이 정치현실에 개입하는 한글 명령서를 반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연산군

 



이런 상황에서 연산군이 훌륭한 왕이 되려면 양반은 물론 백성의 여론에도 더더욱 귀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반은 물론 백성들의 여론도 폭력적으로 억압하려고만 했다. 특히 자신의 황음무도가 심해질수록 더더욱 그렇게 하려고 했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더욱 황음무도에 빠져들었다. 왕은 기생은 물론 의녀, 여자 무당 등을 색출해 궁에 들였다. 이런 와중에 의녀인 개금과 덕금 등도 뽑혀 들어갈까 두려워하며 연산군을 비판했고 그것이 연산군 10년(1504) 7월 19일의 익명서 투서로 연결됐던 것이다.

 

▒ 범인이 드러나지 않자 한글을 탄압하다

 

연산군은 개금·덕금 등을 체포하는 한편 익명서를 투서한 범인도 꼭 색출해내려 했다. 그러기 위해 막대한 재물과 고위관직을 현상금으로 내걸었다. 여기에서 나아가 서울 시민들 중 한글을 아는 사람들을 모두 소집해 한글을 쓰게 한 후 익명서 필적과 대조하기도 했다.

 

그래도 범인이 드러나지 않자 조선팔도에서 한글을 아는 사람들을 모두 조사해 한글 필적을 써 올리게 했다. 이와 함께 ‘언문은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말고, 배운 자는 쓰지 못하게 하라. 언문을 아는 사람을 모두 조사해 보고하고, 만약 고하지 않는 경우 이웃 사람까지 처벌하라’는 한글금지령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연산군 범 사냥도

 

이후 한글을 쓰다 잡히면 참형을 당하고, 다른 사람이 한글을 쓴 것을 고발하지 않으면 곤장 100대의 엄벌을 받았다. 또 한글 편지나 한글 서책을 소지하다가 적발돼도 엄중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에 따라 한글은 공식적으로 사라졌고, 한글을 이용한 백성의 비판도 표면적으로 봐서는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양반과 백성들의 여론을 억압한 연산군은 거칠 것 없이 황음무도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런 절대왕권은 연산군 12년(1506) 9월 1일 한밤중에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막을 내렸다. 폭력으로 억압되었던 양반과 백성들의 여론이 폭력으로 분출했던 것이다.

 

연산군의 행태는 인간이란 끝을 모르는 욕망 덩어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울러 최고 권력자가 자신의 욕망만 행사하며 다른 사람의 욕망을 폭력으로 누르고 말도 못하게 하다가는 패가망신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