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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선조의 아들, 임해군을 가토에게 바친 함경도민들

임진왜란 직후, 선조가 파천을 하고 우리나라의 왕자 2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선조의 아들 중 임해군과 순화군이 그 주인공이다. 임해군은 일본의 가토 장군에게 함경도민들이 손수 포로로 잡아 바쳤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임진왜란 직후, 선조의 자녀들이 입궁하면서 파천 소문이 퍼져나갔다. 선조는 “종묘와 사직이 이곳에 있는데 내가 장차 어디로 간단 말인가?”라며 파천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파천 소문 자체가 인심을 흉흉하게 만들었다. 

민심을 진정시키는 한 편 파천은 결정되었다. 선조는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첫째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모셔와 파천 행렬에 동참시키는 것이었고, 둘째는 왕자들을 파견해 근왕병을 모집하는 것이었는데 모두 파천 반대론을 누르기 위한 조치였다.


임진왜란

▎임진왜란 중 왜군의 남해안 지역 점유가 몇 년간이나 지속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조선의 국력이 약한 데다 선조의 무책임이 더해졌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따른다. 서울 용산구 소재 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임진왜란 전시물. 조선 해군이 왜군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 이혼과 힘 합쳐 육군 최초의 승리에 기여한 임해군


선조는 세자 광해군을 제외한 4명의 왕자 중 임해군과 순화군 두 명을 각각 함경도와 강원도로 가게 했다. 임해군은 선조의 큰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심을 많이 잃어 친동생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다. 이런 상황에서 두 형제의 알력을 최소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한, 형제 간의 경쟁심을 이용해 근왕병 모집을 최대화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 만약의 경우 임해군의 근왕병 모집 실적이 아주 탁월하다면 세자를 바꿀 수도 있었다.


강원도 금화에 도착한 임해군은 그곳에서 왜적이 이미 춘천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임해군은 그곳으로 함경도 감사와 군사령관들을 소집했다. 이에 호응해 북청에 주둔하던 남병사 이혼이 4000명에 가까운 병력을 이끌고 왔다. 이 병력이 당시 조선 관군 중에서는 최정예 병력이었다. 임해군은 그중에서 200명을 선발해 선조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전쟁터로 가게 했다.


왜군 황금가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했던 왜군 장수들의 황금가면. / 사진·중앙포토


남병사 이혼은 관군과 힘을 합쳐 경기 양주 해유령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였다. 70여 명의 왜적을 참수한 이 전투는 임진왜란 이후 육군이 얻은 최초의 승리였다. 이외에도 임해군은 함경도 주민들의 항전 의지를 고양시키기 위해 말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세금을 대폭 감면했다. 임해군의 근왕병 모집 활동은 비록 몇몇 부작용 예컨대 강제적 물자 수탈이나 불법적 노동력 징발 등을 야기하긴 했지만 현실적인 성과도 내고 있었다.


그러나 5월 27일에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평양의 선조는 물론 덕원의 임해군 역시 위험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할 각오를 하고 의주로 갔고, 임해군은 마천령을 넘어 함경북도의 경성으로 퇴각했다. 그 당시 순화군은 임해군과 함께 있었다.


▒ 함경도인들, 두 왕자를 잡아 왜장에게 내주다


임진강을 건넌 왜적은 황해도 평산에 이르러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로 각각 길을 나눠 침략했다. 함경도로 쳐들어간 왜장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였다. 황해도 곡산을 경유한 가토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함경도로 쳐들어갔다. 당시 남병사 이혼은 왜적의 침입로를 철령으로 예상하고 강원도 회양에 주둔했다. 하지만 그곳은 황해도 곡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에 가토는 무인지경을 달리듯 함경도로 쳐들어갈 수 있었다.


6월 17일, 가토는 안변에 도착했다. 가토는 병력을 나눠 일부는 안변에서 흡곡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게 했다. 반면 자신은 주력 부대를 거느리고 함흥으로 진출한 뒤 북청, 단천을 지나 계속 북진하면서 왕자들을 추격했다.


북병사 한극함은 마천령에서 가토를 막으려 했으나 대패했다. 이에 앞선 6월 11일, 선조가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하자 함경도에는 국왕이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에 망명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여기에 해정창 전투의 패배 소식이 더해지고 또 임해군과 순화군의 회령 도피 소식이 더해지자 함경도 사람들은 왕자들 역시 명나라에 망명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임진강 전경

▎임진나루 인근 전망대에서 바라본 임진강의 전경.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이곳을 거쳐 피란을 갔다. / 사진·중앙포토


▒ 명과 왜의 ‘협상 제물’이 된 왕자들


사실 해정창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임해군과 순화군이 회령을 향해 갈 때부터 망명할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함경도 사람들은 왕자들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꼈고, 그랬기에 왕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그 사실을 일일이 써 붙여 가토에게 알렸다. 이런 사실에서 보면 해정창에서 패배한 이후 선조는 물론 임해군과 순화군도 함경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임해군과 순화군을 사로잡은 국경인은 이 사실을 가토에게 알렸다. 회령에 가토가 들어왔을 때 왕자 등은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가토는 “이 사람들은 바로 너희 국왕의 친아들과 조정 대신들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곤욕을 주는가?”라며 결박을 풀게 했다. 이후 가토는 6진 지역을 모두 접수하고 9월 초에 안변으로 철군했다.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역시 안변으로 끌려갔다.


가토는 포로로 잡은 이홍업에게 자신의 협상안을 주어 선조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여기에 더해 왕자들의 편지는 물론 수행 대신들의 편지도 보냈다. 가토의 협상안과 왕자들의 편지가 선조에게 전해진 때는 10월 19일이었다.


당연히 조정 중신들은 가토의 협상안을 결사 반대했다. 선조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선조는 협상안을 가져온 이홍업을 사형시킴으로써 거부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는 한편, 명나라에도 강력한 반대 의지를 알렸다.


조선군과 왜군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1592년 12월 26일에 4만3000여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도하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군의 전투 양상은 공세적으로 바뀌었다. 1593년 1월 8일, 조명 연합군은 평양을 공격해 탈환했다. 이여송은 그 여세를 몰아 개성을 탈환했고 1월 24일에는 서울 근교의 벽제역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러나 왜적을 얕보던 이여송은 벽제역에서 유인술에 말려들어 대패했다. 놀란 이여송은 평양까지 후퇴하고 더 이상 진격하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일본과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명나라에서는 임해군과 순화군 석방에 총력을 기울였다. 두 왕자를 송환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왜군과 협상하자고 하면 선조가 결사반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조선정벌기 이순신장군

▎19세기 중기에 간행된 일본 <조선정벌기>에 묘사된 이순신 장군. / 사진·중앙포토


▒  포로로 잡힌 지 1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되다


1393년 2월 20일, 명나라 사신 풍중영은 안변에서 가토와 만나 강화회담을 가졌다. “명나라 사신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라는 가토의 말에 풍중영은 “조선의 왕자들이 포로로 잡혔기에 특별히 강화해 어려움을 풀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가토는 “내가 명나라 사신과 회담하는데 조선 사람들을 참여시킬 수 없습니다”라며 통역을 위해 배석했던 조선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리고 풍중영과 단둘이 하루 종일 회담했는데 그 자리에 참여한 조선 사람이 없어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가토는 자신이 이전부터 주장하던 내용 즉 두 왕자를 돌려보내는 대신 대동강 이남지역 또는 한강 이남지역을 내놓으라 요구했을 것이 분명하다.


풍중영과의 회담 후 가토는 통역으로 따라온 최우에게 사람을 보내 “조선은 땅을 할양하고 화친하기를 바라는가?”라고 물었다. 최우는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이므로 땅을 할양하고 화친하는 등의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가토는 “국왕이 전하는 서찰은 없는가?”라고 물었고, 최우는 없다고 답했다. 그 후 가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로 보면 가토는 화친의 전제조건으로 영토 할양을 약속받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풍중영은 먼저 왕자들부터 송환하라고 주장했고, 가토는 “이미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에게 보고했기에 마음대로 풀어줄 수 없다”는 말로 거절했다. 이어 선조 역시 영토 할양에 관해 어떤 서한도 보내지 않았음을 확인한 가토는 회담을 결렬시켰다. 그 대신 한양에서 강화회담을 재개키로 했다.


명량대첩 재현

▎임진왜란 당시 13척의 배로 적선 133척을 격퇴시킨 명량대첩을 기념하는 재현행사의 한 장면. / 사진·중앙포토


▒  전후(戰後) 나라 사정을 더욱 악화시킨 왕의 ‘무책임’


강화 회담이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명과 일본 사이에는 일종의 묵인이 형성됐다. 즉 일본은 한양에서 자진 철수해 남해안 지역으로 물러가고, 그 대가로 명은 일본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묵인이었다. 4월 19일, 일본군은 한양에서 자진 철수해 남해안 지역으로 물러갔다. 그때 임해군과 순화군은 부산으로 끌려갔다. 이후 명군은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공식화되지 않았을 뿐 명나라는 일본의 남해안 지역 점유를 묵인했고, 일본은 명나라 군대의 조선 주둔을 묵인하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영토 할양을 통한 화친이라는 가토의 협상안이 관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묵인의 증표로 임해군과 순화군이 명군에 송환됐다. 그때가 1393년 7월. 포로로 잡힌 지 1년 만이었다.


선조의 입장에서 왕자들의 송환은 마냥 기쁜 일만은 아니었다. 조선을 조선으로 보전하기를 원한다면 선조는 영토 할양을 공인하거나 묵인하는 그 어떤 상황도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선조는 두 왕자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처단하지도 않았다. 임진왜란 중 일본군의 남해안 지역 점유가 몇 년간이나 지속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조선의 국력이 약해서였다. 그것에 더해 선조의 무책임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책임한 아버지 밑에서 포로로 고초를 겪어야 했던 임해군과 순화군. 과연 이 때 선조의 선택이 달랐다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크게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