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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식인풍습은 정말 존재했나?

정말 식인종은 존재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 식인종이 정말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때가 있을 것이다. 영화나 책에서 아프리카나 브라질의 원주민이 전쟁에서 잡은 포로를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고서 먹는 장면이나 자신이 나무에 묶인 채 광란의 춤을 밤새도록 추는 원주민에 둘러싸여 있는 장면을 본 적도 있을 것이다. 일부는 20세기 중반까지도 목격자들에 의해 사실임이 확인되었고, 그것도 주로 남미, 중미, 북미, 아프리카 등의 농경사회 및 고문화 사회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식인풍습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아프리카에 간 슈바이처 박사가 어느 날 토인들에게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이야기를 했다. 듣고 있던 한 토인이 “한 10명 정도 죽었나요?”라고 물었다. 슈바이처가 “아니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죽었어요”라고 대답했다. 식인종 노인이 “백인들은 죽은 사람을 먹지도 않는다면서 왜 아깝게 그런 짓을 하느냐”라면서 아쉬워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에피소드이지만 많은 함의가 들어있다. 먼저 발달된 기술로 성능 좋은 무기를 만들어 대량 살상 전쟁을 벌이는 이른바 문명세계 유럽인들의 어리석음을 질타하는 촌철살인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또한 실질적 이익이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일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더욱 본질적 의문을 제기한다. [식인문화의 수수께끼(Cannibalism)](한스 아스케나시)에 소개된 19세기 식인풍습에 놀란 유럽인에게 미라냐스 부족의 족장이 대답한 내용이다.

“당신네 백인들은 악어와 원숭이 고기도 먹지 않더군요. 그건 맛이 좋은데도 말이오. 만일 돼지나 게가 그렇게 많지 않다면 당신들도 악어와 원숭이를 먹었을 것이오. 굶주림이란 괴로운 것이니까. 이는 관습에 따른 문제일 뿐이오. 내가 적을 죽였다면, 그를 그대로 버리느니 먹는 것이 낫소.”

인간이 제대로 살라가려면 투입과 산출의 에너지 균형이 맞아야 한다. 비용과 이익의 관점에서 음식을 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에너지보다 음식 섭취에서 생산되는 에너지가 많아야 육체가 유지된다. 개인은 물론 가족 단위에서도 약간의 잉여에너지가 있어야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의 최저 생존조건은 개체와 집단 차원에서 에너지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상식적으로도 음식을 먹어서 얻는 에너지보다 음식을 구하는 데 사용되는 에너지가 많다면 서서히 굶어죽게 된다. 따라서 끊임없이 먹이를 구하는 운명은 다른 모든 생물과 인간이 다를 바가 없다.

식인의 문제도 비용과 이익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역사시대에 들어와 문명화가 시작되면서 식인은 도덕과 윤리, 종교 차원에서 강력하게 억제돼왔지만 문화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식인풍습은 고대로부터 많이 관찰되며, 20세기 초반에도 원시부족들에게 남아있었던 현상이다. 원시시대의 식인은 전쟁에 승리하고 난 후 포로의 인육을 먹으면서 승리를 확인하는 주술적 의식의 일종이었다. 만약 포로로 잡은 적의 고기를 먹기 위한 전쟁 행위가 비용 이익의 관점에서 유리했다면 식인풍습의 잔영은 길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가 지적했듯이 이는 효율의 관점에서 유지되기 어려운 구조였다. ‘인간은 큰 동물이기는 하지만 이를 잡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인간 사냥감들은 사냥하는 자들만큼 경계심이 많고 잘 달아난다. 또한 그들을 죽이는 만큼 자신들도 죽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인간의 고기를 얻으려고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고기는 전쟁의 부산물로 얻은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전쟁 포로의 고기를 먹는 것은 비용과 이익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합리적이다. 완전한 동물성 식품의 공급원을 낭비하는 것은 영양상으로 조심스럽게 선택해야 할 사안이다.’

따라서 지능을 가진 다른 인간의 고기를 먹기 위한 전쟁은 실익보다는 위험이 컸기에 기피했지만, 전쟁에 이긴 후에 포로의 고기를 먹는 것은 부수적 이익이어서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경이 시작돼 1인당 생산성이 높아지고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식인은 전쟁의 부수적인 차원에서도 이익이 없는 행위로 바뀌어진다. ‘국가의 형태를 띤 정치 조직의 출현과 함께 전쟁 식인풍습은 돌연 사라졌다. 부족이나 부락 사회는 낮은 생산성 때문에 잉여를 생산하지 못하는 포로를 살려 두는 것은 먹여야 할 입이 하나 느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와 달리 국가사회에서는 포로가 잉여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먹기보다는 그들의 노동력을 유지하는 게 훨씬 낫다.’

전쟁 포로를 처리하는 방식은 바로 생산성의 증가와 사회 조직의 특성을 반영한다. 즉 생산성이 낮은 수렵단계에서 전쟁포로는 존재할 수 없었다. 포로도 먹어야 살기 때문에 식량을 배당해야 하는데, 집단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먹이를 구해야 겨우 생존할 수 있는 낮은 생산력의 수준에서 실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의 고기라도 먹어서 전쟁의 손실을 보충하고 정신적 승리를 확인하거나 아니면 죽이고 물건이라도 빼앗는 것이 당연했다. 농경시대의 초기에 들어서면서 적을 죽이고 고기를 먹는 데서 오는 이익과 목숨을 살려주고 노예로 삼아서 평생 일을 시켜서 오는 이익이 비교 가능한 수준이 됐다.

물론 노예는 호시탐탐 도망이나 반란을 도모하는 위험이 있기에 이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비용도 포함해야 한다. 점차 생산력이 높아져서 노예로 부리는 것이 명확하게 이익이 되는 시점에서 포로를 죽여서 고기를 먹는 식인풍습은 사라지고, 대신 전쟁 포로를 노예로 만들어 평생 일을 시키게 된다. 그리고 노예의 경제적 가치가 발생했기 때문에 소유 재산으로 인식해 노예를 거래하는 시장도 생겨난다. 경제적 요인으로 식인풍습이 사라지고 노예로 대체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식인을 금기시하는 다양한 도덕적 논리와 종교적 가르침도 생겨났다. 비록 노예를 시민과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하지는 않고 ‘말하는 가축’ 정도로 대하였지만 그래도 소·돼지·양처럼 먹어도 되는 가축과는 분명히 구분했다.

오늘날에 식인은 옳고 그름에 대한 논란거리도 되지 않는 악덕이고 금기이다. 물론 문명사회에도 기근이 들고 전쟁으로 식량이 부족해지거나, 배가 난파되어 망망대해를 떠도는 특수한 상황에서 사람 고기를 먹었다는 사례는 간혹 생겨나지만 그야말로 특수한 경우이다. 그렇다고 이른바 식인풍습이 있었던 과거의 모든 종족을 미개하고 야만적이라고 매도하기는 어렵다.

이 대목에서 한 번 생각해 볼 점은 오늘날에는 당연시되는 도덕과 윤리에 내재되어 있는 동기와 배경이다. 문명이 시작되면서 생겨나고 체계화된 도덕과 윤리의 배경에는 농경시대 정착생활에 따른 생산력의 향상이라는 경제적 배경이 기저에 있다는 점이다. 불과 100여년 전인 20세기 초반에도 지구상 일부지역에 잔존하고 있었던 식인풍습은 단순히 야만과 문명, 도덕과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1인당 생산성의 향상이라는 경제적요인까지 내재된 복합적 사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