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28일 한국납세자연맹 회원들이 국회 정문 앞에서 특활비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 사진:연합뉴스
서울 강남구 도곡동 양재천변을 따라 타워팰리스·대림아크로빌 등 최고급 주상복합아파트가 즐비한 지역에 국정원 소유의 I빌딩이 있다. 이 건물은 지하 5층, 지상 18층 규모로 국정원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12~18층을 사용한다. 나머지 1~11층은 일반 사무실과 일식집, 여행사 등 상가로 임대 중이다. 일반인들은 11층까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만 12층 이상은 출입이 제한돼 있다.
그런데 2010년 7월, I빌딩에서는 ‘수상한 공사’가 진행됐다. 823㎡(248평) 규모의 맨 꼭대기층 중 4분의 3가량을 개조하고, 1층부터 18층까지 논스톱으로 운행되는 전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또 내부는 주거용으로 리모델링을 한 후 유명 크리스털 브랜드 장식품과 고급 집기 등을 들여놓았다. 공간 개조와 인테리어 공사 등 리모델링에 들어간 비용은 10억원이었다. 고급 펜트하우스로 탈바꿈한 이곳은 원세훈(66·구속 수감) 당시 국정원장과 부인 이모(65) 씨가 사용했다. 2011년 원 원장이 내곡동 관저를 두고 상대적으로 보안이 취약한 도곡동 안가에서 생활한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다. 이에 당시 국정원 측은 “1995년 지어진 기존 국정원장 관저가 너무 낡았고, 빗물이 새 수리 공사를 하고 있다”며 “(도곡동 빌딩은) 임시 관저”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지난 정부 국정원 관련 적폐 수사를 진행 중인 검찰의 수사 결과는 국정원 측의 당시 해명과 달랐다. 검찰은 국정원 적폐청산 TF로부터 넘겨받은 자료를 분석하는 한편 당시 국정원 예산 업무를 담당한 기조실 관계자 등을 소환해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검찰은 “도곡동 펜트하우스는 원 전 원장 부인이 지인들과 모임을 갖는 사적 공간이었다”는 국정원 관계자의 진술을 확보했다. 또 당시 공사업체를 원 전 원장이 직접 골랐고, 공사 과정은 부인 이씨가 주도한 사실도 드러났다.
특히 검찰은 건물 리모델링 공사에 사용된 비용 10억원을 국정원 예산으로 처리했다는 관련자 진술을 확보했다. 국정원 예산은 다름 아닌 ‘특수활동비’(이하 특활비)를 뜻한다. 공사비 전액을 우선 현금으로 지급한 뒤 이를 ‘해외공작금’ 항목으로 회계 처리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회계 서류에 별도의 영수증은 첨부하지 않았다. 도곡동 펜트하우스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박근혜 정부 초기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가 시작된 이후인 2014년에 철거됐기 때문이다. 국민 혈세만 낭비한 셈이다.
검찰은 원 원장 재직 때 또 다른 거액의 특활비가 해외로 빼돌려진 정황을 잡고 수사 중이다. 검찰에 따르면 2011~2012년 200만 달러(약 20억원)가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미국 스탠퍼드대의 한 단체 계좌로 이체됐다. 이 돈 역시 ‘해외공작금’ 명목으로 회계 처리된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은 송금에 관여한 국정원 기획조정실 직원들을 소환해 “원 원장의 지시로 돈을 만들어 미국에 보냈다”는 취지의 진술을 확보했다고 한다. 이 같은 큰 규모의 돈이 공작금 명목으로 외국의 한 대학 단체에 전달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원 원장이 자신의 퇴임 후를 대비하기 위해 사전 정지작업 용도로 특활비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원 원장은 2013년 3월 퇴임 후 스탠퍼드대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지내기 위해 이 돈을 기부했다. 그리고 이 기부금에서 나오는 연간 10만 달러의 이자를 자신의 미국 체류비로 쓰겠다는 계약을 맺은 정황도 나왔다. 원 전 원장이 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기부금 원금은 온전히 대학 측에 넘기는 조건에도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원 원장의 퇴임 후 유학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2013년 당시 윤석열 수사팀이 국정원 댓글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원 전 원장을 출국금지했고, 그의 미국행은 무산됐다. 현재 이 돈은 스탠퍼드대 관련 계좌에 남아 있는 것으로 검찰은 파악하고 있다.
이와 관련 원 전 원장의 부인 이씨는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200만 달러의) 이자까지 350만 달러가 연구소 펀드에 있는 것으로 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명박(MB) 정부 국정원은 원장의 특활비 사적 유용 외에도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민간인 여론 조작팀(사이버 외곽팀) 활동 비용으로 30억원의 특활비를 사용하기도 했다. 검찰 수사 결과 국정원 심리전단은 2009년 5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민간인으로 구성된 30개팀(3500명)을 조직적으로 운영하며 인건비로 한 달에 2억5000만~3억원을 지급했다.
“특활비 제도 개선이 진짜 적폐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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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국회의 특활비 사용 실태에 대한 여론의 비난이 거세지자 국회에서는 관련 법 개정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 11월 28일 바른정당·국민의당 의원 10명은 국회 특활비 폐지를 골자로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법안 대표발의자인 하태경 바른정당 의원은 “개인의 쌈짓돈으로 전락한 정부의 특활비 적폐를 지적하기에 앞서 국회 특활비부터 없애놓고 얘기하자”며 “국회가 먼저 솔선수범의 자세를 보여야 행정부 예산의 투명하고 공정한 운용을 감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법안의 주요 내용은 ‘국회의장은 국회 소관 예산요구서를 작성함에 있어서 특활비 등 별도의 총액으로 제출하는 항목을 포함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국회법 제23조 3항)을 신설하는 것이다. 여당인 민주당 추미애 대표도 국정원과 국회 등의 ‘묻지마 특활비’를 통제하는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특활비 집행 내역을 정확하게 기재하고 이에 대한 증빙자료를 갖추되 비공개 결산을 하는 방향으로 국정원법과 국회법을 개정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관련 법 개정이 실제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홍준표 대표의 언급 등으로 특활비 사용과 관련해 국민적 비난이 거세게 일어난 2015년에도 여야 정치권은 “예결위 내에 특활비 개선 소위를 구성해 집행 실태를 점검하고 제도적 개선을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다 할 제도적 개선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번에도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크지 않겠느냐는 부정적 시각도 많다. MB정부 당시 국정원 기조실 직원으로 일했던 P씨는 취재 말미에 “국정원만 때려잡고 끝낸다면 진정한 적폐 청산이라고 할 수 없다”며 소회를 밝혔다.
“국정원의 행태가 잘못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모든 비난을 감수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국회나 검찰 역시 과거 자신들의 특활비 사용 내역이 적나라하게 국민 앞에 공개된다면 똑같은 비난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진짜 적폐청산을 하려고 한다면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 특활비 문제를 제대로 도마 위에 올려놓고 대수술을 해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