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쓸어 넘긴 머리에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 세상 고민을 다 짊어진 듯하기도 하고, 무언가 자기만의 사고에 푹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개인사에 대해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좀처럼 떼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엔 눈빛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가는데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 관심사에 천착하는 몰입형 전문가 스타일. 정기현(62) 국립중앙의료원장의 첫인상입니다.
국립의료원장에게 올해처럼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 적도 없었을 것 같은데요. 그만큼 할 말도 많을 정 원장을 지난 12월 5일 서울 중구 을지로의 국립의료원에서 만났습니다.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인터뷰까지….”
기자와 만난 정 원장의 첫마디였다. 틀린 말도 아니다. 지금까지 국립의료원장이 여론의 관심사가 된 적은 없었다. 정 원장의 이력이 남들의 시선을 끌 만큼 화려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지난 가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 원장과 국립의료원은 뜨거운 감자였다. 야당 의원들의 질타가 집중됐다. 그의 소회가 궁금했다.
취임 후 처음 치른 국정감사였는데, 신고식 치곤 꽤 호된 자리였던 것 같다.
“사실 제가 잘 알려진 인물도 아니고, 두드러지게 보여지는 게 없어서 궁금하기도 할 거다. 저게 뭔가, 하고 말이다. (낯선 시선과 견제가) 지극히 당연하다. 국립의료원에 와보니 무시당하고 방치됐던 조직의 모든 문제가 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차분하게 하나하나 해보려고 했더니 사건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지난 10월 2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감장은 국립의료원에 대한 법정을 방불케 할 정도로 뜨거웠다. 의료기기 영업사원이 수술에 참여했다는 의혹에 대해 의원들의 추궁이 집중됐기 때문이다. 윤일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립의료원에서 2016년부터 2년 동안 의료기기 회사 직원에 의한 대리수술이 40여 차례 이뤄졌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정 원장이 이에 사과했지만 야당 의원들은 사퇴를 요구했다.
이 밖에도 2017년 말에는 의료원 직원이 자신의 차량에 마약류 의약품을 보관했다가 자진신고했고, 지난해 4월에는 병원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된 한 간호사의 신체에서 마약성 약물 성분이 검출되기도 했다. 또 직원 103명이 독감 백신 550개를 구매해 의사 처방전 없이 23명에게 불법 투약한 사실이 내부 감사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국감장에서 드러난 사건들은 총체적인 관리 부실을 보여줬다.
“이미 간직해 왔던 문제들이었다. 개인의 일탈인지 구조적 문제인지를 가려서 개인 일탈이면 인식을 바꾸면 되지만, 오랫동안 이어져오면서 (일탈과 구조적 문제가) 뒤섞여 있었다.
국감에선 제가 관리를 제대로 안 해서 그런 문제가 터졌다고 지적을 당했지만, 취임 전부터 있던 일이라고 변명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서운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책임자로서 비판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국감 끝난 다음날에는 다시 취임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낙하산 인사’ 비판 보도가 의지 일깨워
국립의료원에서마저 대리수술을 관행적으로 해온 게 드러나 충격을 주기도 했다.
“다시 한 번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대리수술을 하게 되는 구조적인 문제도 있지만 우선 의사들 스스로 각성해야 한다. 대리수술을 하는 건 의사가 스스로 면허제도를 부정하는 셈이다. 대리수술을 묵인하면 의사 면허가 왜 필요하겠나. 의사에게 면허를 주는 건 그만한 수련과 노력을 다한 다음에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필드(수술방)에 들어가라는 의미다. 의사들이 좀 더 면허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이런 관행을 고칠 방편으로 수술실 CCTV 설치 요구에 힘이 실리고 있다. 경기도의료원의 경우 이재명 경기지사 지시로 수술실 CCTV를 설치했다. 찬성 여론이 높지만 경기도의사회는 여전히 반대하고 있다.
“우리도 설치했다. 다만 필드에는 안 했다. 수술실 내부는 여러 필드로 갈라지는데 요소마다 CCTV를 설치해 필드에 들어가지 않아도 사각지대 없이 모두 보일 수 있게 했다. 옛날에는 수술방 안에도 CCTV가 설치돼 있었다.
선배 의사들이 후배들을 모니터링하고 지도하는 용도였다. 그러다 환자 인권침해란 지적 때문에 점차 사라졌다. 하지만 이제는 환자가 선택 가능한 권리 문제다. 경기도의사회가 국민적 신뢰를 받으려면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상한 논리로 반대해봤자 철없어 보일 뿐이다.”
일각에선 ‘코드 인사’라는 낙인 때문에 야당의 비판이 더 거셌던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국립의료원장을 지원한 건 개인의 의지였나?
“솔직히 자리가 필요하고 탐이 났다면 올 필요가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삶을 더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지, 윤택하게 만드는 게 아니지 않나. 중앙의료원장이 되겠단 생각은 0.01%도 없었다. 오히려 시·군의 보건소와 같은 하부 인프라를 제대로 만들어놓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건강증진개발원과 같은 다른 기관에서 활동하고 싶었다.
그런데 원장 공모에 지원해 보라는 권유를 받고 고민하던 중에 낙하산 논란 기사가 나왔다. 그때 원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발을 빼면 오히려 모양새도 이상하고, 억측이 기정사실화하겠다 싶어서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들었다. 어떤 인연인가?
“2012년에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에게 여성·어린이 부문의 공공의료 정책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낙선한 뒤에도 이따금 왕래를 하곤 했다. 하지만 정치 얘기는 그분도 안 하시고, 나도 일절 안 했다. (김정숙) 여사께서 야생화를 좋아하셔서 꽃 얘기나 좀 했을까.
그러다 지난해 대선에서 지인이 더불어포럼(당시 문 후보의 외곽 지원조직)을 만드는 데 도와 달라고 했다. 당시엔 광주·전남에서 문 후보가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면서 2012년에 만들었던 공약을 다듬는 일에도 참여하게 됐다.”
문 정부 의료정책 설계… “공공의료 발전의 비전 있다”
지난해 1월에 취임한 정 원장은 3개월 전인 2017년 11월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의료발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공공의료발전위는 의료 공공성을 강화하는 종합대책을 만들기 위해 한시적으로 출범했다.
민간 의료 인프라의 공공성을 확보하는 일과 국·공립병원들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두 가지 방향이 핵심 골자다. 그는 위원회 활동이 끝난 뒤 중앙의료원장 공모에 지원했다. 공공의료의 컨트롤타워에 공직 경험이 거의 없는 ‘시골의사’가 앉은 것이 코드인사, 낙하산 인사 논란이 벌어지게 된 배경이다.
정 원장은 “공모에 형식적으로 지원한 게 아니라 내 나름대로 국립의료원의 비전도 그려보고,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공모 때 제출했던 자료를 건넸다. ‘공공의료 발전과 국립중앙의료원 역할’이란 제목의 64쪽에 달하는 프리젠테이션용 자료다.
‘소멸 위기에 있는 지자체, 그 속에서 민간 (의료)시장조차 무너지는 일부(비수도권) 군 지역, 국가가 치매를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철석같이 믿는 고령의 농민, 건강보험료를 체납해 의원에도 가지 못하는 빈곤층, 지역 병원을 믿지 못해 4~5시간 이상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의 소위 ‘빅5’ 병원을 찾는 수술 환자… 이들에게 공공보건의료는, 그리고 의료의 공공성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자료의 첫 장에 적혀있는 물음은 공공의료에 대한 정 원장의 현실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던진 화두는 지방에서 오랫동안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던 고민의 산물이다. 정 원장은 전북대 의대를 나와 서울대 의료관리학교실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충북 옥천군으로 내려가 보건소장을 지냈다. 이어 전남 순천에서 중소 여성아동 전문병원을 운영했다.
의사 자격을 얻고 나서 시골 보건소장을 선택하기란 흔치 않은 일일 텐데.
“의사가 되고서 의료 현장의 여러 구조적 모순을 보고 보건 의료정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유일했던 서울대 의료관리학교실에서 공공의료정책을 공부했다. 은사님인 신영수 교수(현재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역 사무처장)께서 ‘공직에 가려면 바닥부터 보라’며 보건소장을 권하셨다. 아마 당시 의사 자격 보건소장은 내가 처음이었을 거다.”
관료조직 경험이 전혀 없는 젊은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나.
“당시는 의약분업 직전이었다. 보건소장으로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우선 약값 리베이트 관행을 손보기로 했다. 당시 공중보건의 월급은 40만원 정도였다. 가족 몇 명 있으면 생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래서 제약회사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 생활하는 게 관행으로 굳어져 있었다. 요즘 같으면 난리 날 일이었다. 그래서 18명의 보건의를 모아 놓고 건강증진사업에 참여하면 예산을 확보해서 수당을 올려줄 테니 리베이트를 받지 말자고 설득했다. 보건의들이 합의해줘서 관행을 깰 수 있었다. 당시로선 첫 시도여서 꽤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의대 졸업 후 시골 보건소장으로 자원
보건소장은 얼마나 했나.
“3년쯤 했다. 당시 백신 유통구조가 굉장히 불합리했는데 구입방식을 바꿔서 단가를 절감하려 했더니 조직적인 방해가 들어왔다. 알고 보니 도의회 의장이 백신 도매사업을 하는 분이더라. 아무튼 교과서로만 알고 있던 것과 현실이 달랐다. 이 동네에서 그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편히 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실은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아내에게 그때까지 변변하게 돈을 벌어다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내는 병원 약사였는데 남들은 의사 약사 부부니까 돈을 꽤 버는 줄 알겠지만 저희는 너무 가난하게 살았다. 현실적인 생활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련 없이 사직서를 냈다.”
돈을 벌 생각이었으면 대형 병원이나 학교로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사직하고서 한동안 고민하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 원진레이온 사태의 피해자들(진폐증 환자)이 국가배상을 받아서 ‘원진녹색병원’을 세웠다. 하지만 병원 설립사업에 참여했다가 개인 희생을 너무 강요하는 것에 동의할 수가 없어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순천으로 가게 됐다.
서울은 ‘의료계 운동권’이 좀 있어서 거길 벗어나려면 서울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 순천에서 여성병원을 하던 후배가 도와 달라기에 2년만 봐주기로 한 게 20년을 눌러앉고 말았다.”
정 원장이 지방을 떠도는 의사가 되게끔 만든 건 젊은 시절 그의 남다른 이력과 기질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는 늦깎이로 의과대에 진학했다. 본래 그의 꿈은 경영학도였다. 꿈을 좇아 성균관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지만 학생운동에 가담했던 게 문제가 돼 더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1979년에 반강제로 학교를 그만뒀다. 그 뒤에 의대 진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생의 항로를 바꿀 만큼 큰 고민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했지만 그는 젊은 시절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했다. 몇 차례 깊은 생각에 잠겼던 그는 “아직도 남아 있는 ‘부채의식’ 때문”이라며 겨우 운을 뗐다.
“성대 경영학과 시절 새문안교회 대학부에서 활동했다.(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에 있는 새문안교회 대학생회는 1970~80년대 한국교회에서 대표적인 ‘민주투사’의 산실이었다.) 당시 나는 민중신학을 처음 접했던 세대다. 몇 안 되는 친구들과 인명진 목사님이 조직하신 도시산업선교회에서 활동을 했었다.
(NL 계열의) 주류 학생운동과는 조금 달랐다. 도시 빈민 선교와 노동자 인권 보장 운동을 펼쳤다. 구로공단에서 야학을 하고, 위장취업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사회구조에 대해 더 갈등하고 더 번민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변혁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개인의 삶을 누리고 싶었다. 그 방편을 찾다 보니 의학을 선택하게 됐다.”
학생운동 부담 느껴 도피… 시골의사 선택은 ‘부채의식’ 때문
이미 의료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는 서울에 굳이 국립의료원이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서초구 외에 네 가지 정도 대안을 생각 중이다. 만일 통일이 되면 검역소가 생길 테고 그럼 배후병원이 필요하다. 그래서 파주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땅이 마땅치 않으니 과천 정부청사의 빈 땅을 활용하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세 번째로는 현재 위치에 잔류하는 거다. 이곳은 용산기지 이전사업과 관련해 미 공병단이 나간 빈 땅이 있다. 지금 의료원의 1.8배쯤 되는데 중구와 동대문구 전체에서 마지막 남아있는 허파 기능을 할 수 있는 땅이다. 현 병원 부지와 더해 잘 디자인한다면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는 아예 지방으로 이전해 가는 거다. 세종시도 후보지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 동네로 와 달라고 연락하고 찾아오는 분들이 많다. 아이디어는 많은데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공공의대가 개원하는 2023년 2학기 이전까지는 모든 게 마무리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국립의료원이나 지방의료원 등 공공의료기관에 대해 국민은 민간 병원보다 수준이 낮다는 인식이 큰 것 같다.
“서비스경쟁에서 공공부문이 좀 취약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무한경쟁 시스템이 의료기관이나 국민 입장에서 결코 좋은 건 아니다. 공공의료기관의 역할은 의료비 구조를 건강하게 만드는 거다.
병상수를 늘려 민간과 경쟁하는 게 아니라 안전망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본다. 희귀난치병이나 응급외상, 모자보건 등 민간에서 투자하기 부담스러운 분야들을 우리가 맡아야 한다. 그러면 민간과 공공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국립의료원은 의료정책이든 진료든 모든 영역에서 스탠더드(표준)를 제시해야 한다. 권위 있는 표준을 만드는 게 민간으로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최후의 안전망으로서 어느 정도의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표준을 만드는 게 의료원의 역할이라고 본다.”
공공의대·교육병원 통해 표준화된 의료인력 양성